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오재영
  • 1419
  • 2021-08-26 20:34:16
깊은 생각 없이 사는 시대.

누군가 그런 표현을 했다.
“청각(聽覺)은 임종할 때에 가장 최후에 사라지는 감각이라고...”
오늘 우리는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도 빠른 변화 속에 온갖 소음과 분주함으로 살고 있다. 이처럼 분주한 때 정상적인 求道者의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역설적이지만 그는 자원하여 자신을 관계된 것들로부터(사람이든 일이든) 차단하고 자주 자주 침묵(沈黙)하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그 과정에서 본인이 그동안 온갖 것에 자신도 모르게 선(線)을 넘어 영적위기에 처한 모습을 발견하는 소중함의 은총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영적 구도자들에게 그의 은밀한 생활이 결여되면 세속적 생활도 활력을 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 따라 대화(對話)는 잡담(雜談)으로 전락하고, 그가 접하는 사람들은 점차 단지 누군가에게서 들은 얘기만을 늘어놓을 수 있다. 이처럼, 정상적인 구도자와 이웃의 유일한 차이는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닌, 이웃은 단지 세상의 소식을 알고 있고,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위의 소로우의 지적이 옳다.

지금도 求道者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다가오는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 중에, 마음을 빼앗겨 내적 평정의 삶이 부족할 때 “그들은 더욱 필사적으로 더욱 끈질기게 우체국을 드나든다.” 그러나 그가 소유하게 된 “수많은 편지들을 가지고 다니며, 폭넓은 교제를 자랑하는 불쌍한 사람의 위치에서 분주할 때,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정작 들어야할 각자 자기 자신의 내면의 음성은 듣지 못한다.” 왜 우리는 말을 많이 하려하는가?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계속 말을 한다.

아놀드(Eberhard Arnold)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 침묵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편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정비하고, 그들의 신임을 끌어내기 위해 말을 사용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장점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기의 단점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과 다르게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이들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하나님께 맡긴다. 물론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데(롬8:31-34) 어찌하여 그가 자신에 관한 타인의 의견에 신경을 쓰겠는가?

원리적으로 모든 사실이 그러함에도 우리 중에 고요히 내적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극히 적으며, 다만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무척 많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내적 평정은 우리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실천할 때 받게 되는 큰 은혜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그는 비로소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한 확신을 알고 난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재보증과 승인을 구할 때 그들에게 그들의 내면의 깊은 물속에서 그것을 구하라고 조언할 수 있다. “타임지를 읽지 말고 영원을 읽으라”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결론짓는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침묵과 함께 필요한 것이 기도(祈禱)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이지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의사소통 방법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소리를 내서 기도하거나 생각을 통해 하나님에게 말한다. 본질상 기도는 다른 영적 활동과 훈련, 특별히 성경 연구, 명상, 예배, 때로는 독거와 금식 등을 포함한다. 하드맨(O. Hardman)은 기도에 잠긴 사람이, 어리석은 정책들로 가득하고, 특권과 안전함을 소유하려하며, 의심과 냉혹함과 선(善)에 대한 저항으로 충만해있는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담대하게 대적하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매번 하나님과의 분명한 교통이 끝난 후에 즉시 계속해서 기도하면, 그는 모든 합법적인 모험에 착수할 것이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선한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자신에게 동조해주는 사람들이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다 같이 사랑하게 되며, 기도가 그에게 부여해주는 이상을 실현하고, 동조하려 하게 될 것이다. 그는 동료들이 속해있는 많은 파벌들을 하나라는 안목(眼目)으로 보게 되고, 항상 그들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강도 높은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에게 사로잡히고 합일의 기쁨으로 가득 찰 때, 그는 자신이 경험한 생명력 있는 합일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분투할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국가적, 인종적 반목들은 오로지 이 유일한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들에게는 울림이 빈약한가?

소명(召命)에 사로잡혀 기도하며 사는 이들에게는“새의 날개가 새에게 부담이 되지 않듯이, 일관된 기도도 그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는 고독, 금식과 같은 다른 훈련과 병행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된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교회가 기도와 성경연구가 우리를 영적으로 부요하게 하는 활동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활동을 통해 영적 풍요함에 이르는 교회와 사람들은 거의 없고, 오히려 그것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처럼, ‘성경을 믿는’ 많은 교회들의 ‘공공연한 비밀’은 사람들이 기도와 성경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적절한 정상적인 영적훈련에 대해서 무지하고 기도와 성경 탐구에 대해서도 성공하지 못한 결과다.
이처럼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능력 있는 사역과 효과적인 훈련이 되려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전반적으로 훈련의 성격이 강조되어야한다. 영성 생활을 돕는 훈련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영성훈련을 통해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충심으로 축복할 수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내가 행한 선을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이 평안하게 되고, 나의 길을 가로막는 악을 물리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그 훈련활동이 그를 내면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능력과 더욱 깊이 관계할 수 있도록 무장시켜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훈련할 때 얻게 되는 잠재적인 능력이다.

왜, 영적 훈련이 필요한가?

인간에게 최초로 심장을 이식하는 데 성공한 드 브리스(William C.De Vries)박사는 이를 위해 동물들을 대상으로 수 없이 많은 실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 점에 대해 단순하면서도 깊은 소견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가 많이 연습하는 이유는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자동적으로 행하게 되기 위해서이다.”(달라스윌라드, 주요영성훈련 참고, 인용).

글을 마치며...

헬라 철학의 비조라고 하는 탈레스에게 누군가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를 아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남을 충고하는 일”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 평론가인 폴 발레리(Paul Valery), “그대가 용기를 다해서 생각한대로 살지 아니하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할 것이다.”

온갖 불법과 불의로 인하여 법치가 무너진 오늘, 후대를 위하여 항거하고, 진리를 보전하려 함은 하나님의 형상과 만물의 영장으로 구원 받은 소명자 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 드려 희생함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열정에 뒤따라야 할 희생과 함께 그에 따르는 훈련을 통하여 자신에게 베푸신 주님의 긍휼(矜恤)하심과 영적 신령한눈(眼), 깊은 기도와, 자신만이 들은 세미한 음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 분명하지 않으면 필패는 물론 함께 사단에게 이용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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