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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심하보 목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재영
- 1448
- 2021-09-11 15:15:43
토마스 라나커(Thomas Linacre)는 영국의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주치의였고, 왕립의과대학의 설립자였으며, 위대한 르네상스 사상가인 에라스무스와 토마스 모어(Thomas More)경의 친구였다. 그는 말년에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복음서 한권을 받아 처음으로 읽게 되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성경은 성직자의 전유물이어서 보통 사람은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리나크르는 교회사의 암흑기 중에서도 가장 칠흑 같은 시기를 살고 있었다.
즉 알렉산더 6세가 교황권을 쥔 시대였고 보르기아 교황이 뇌물, 타락, 근친 상간, 살인 등으로 기독교의 수치스런 역사에 크게 기여한 시기였다. 리나크르는 사복음서를 읽고서 한편으로 놀라면서 마음이 괴로웠다. 그는 “이것이 복음서가 아니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정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다.
지난 날 누구나 선뜻 입에 올려 폄하하는 이가 없던 고귀(高貴)한 자리가 이젠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치기만만(稚氣滿滿)히 보여 경멸(輕蔑)과 조롱을 당하는 비극적인 세태에 우리가 살고 있다. 지금 국가의 현재와 미래의 무한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大統領)직(織)을 존중하고 그 외의 대법원장과 국가의 공권력을 비롯한 기관을 인정하며 기대하는 이들이 있는가? 소수의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편 가르는 이들 외에는 인정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속한 조직과 주변인들에게 오히려 조롱을 받는 불신의 시대가 되었다.
전광훈 목사의 등장.
박근혜대통령의 탄핵으로 온 나라가 온갖 유언비어와 함께 혼란 중에 제대로 검증 할 여유도 없이 선동과 증오 속에 새 정부가 등장을 하였다. 문제는 새롭게 출발하는 대통령의 취임사에서부터 말의 성찬 뿐 그의 인격과 품격이 아닌 자칭 “캠코더”라는 신조어와 함께 중요한 자리마다 함량미달의 인사들이 등장을 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중에 적지 않은 국민들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기대하든 이들까지 저들의 지나온 삶의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등장할 때마다 수많은 국민들이 염려를 넘어 분노를 갖게 되었다. 인간 대부분 죄인들이지만 구설에 휘둘리는 이들이 국가의 공직(公職)에 오름은 본인을 비롯한 모두의 재앙이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의아해하면서 분노하는 가운데 전광훈 목사가 등장을 하였다.
그의 시의 적절한 자칭 “사이다 발언”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자 일부 정치모리배들까지 모여드는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정작 문제는 그가 내세운 목적에 뒤따라야할 인품이 구비되지 못하여 그의 다듬어지지 못한 거침없는 막말수준의 함부로 내뱉는 말, 경솔하고 천박한 행동, 그 주변 인물들까지 무책임하고 예의 없는 저속한 언사와 처신으로 인하여 점차 상식적인 이들이 그를 멀리 하게 되었다. 이제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사역에까지 자신들이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는 형편이다. 원인은 본인들이 내세우는 애국(愛國)에 걸 맞는 신앙의 인격과 덕(德을 구비해야 할 자기성찰을 소홀히 한 까닭이다.
심하보 목사.
지난해 10월 26일 밤 10시 수많은 이들이 광화문에서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모인 자리에 등장한 심하보 목사의 12분의 짧은 간증 “나는 비겁한 목사였습나다”라는 메시지는 한순간에 13만의 조회 숫자와 수많은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1백만의 조회숫자를 기록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그 이후로 그는 수많은 이들에게 유명인사가 되어 전목사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코로나 정국에서 나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들은 그동안 독재와 불법, 사회주의이념(社會主義理念)에 대하여 경각심을 일깨웠다.
깊은 내용 모두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이 갑자기 그동안 주장하든 미래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서로가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상대편을 공격하는 상식이하의 행태를 보여 이들을 지지하고 따르든 수많은 이들을 아연실색케 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하나같이 목적에 따르는 신앙적인 인격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가엾은 모습들이다. 누군가 그런 표현을 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하는 것은 함정이다…”지난 주간 시골에서 만난 지난해 광화문집회까지 참석했던 장로님 부부들의 실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국가를 염려하는 고귀한 뜻에 비하여 또 한편으로 죄를 짓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쓰렸다. 지금도 여전히 좌, 우를 불문하고 목소리 큰 자들이 옳다고 윽박지르면 정의(正義)가 되는 시대,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가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책임.
오늘 우리의 기독교대한감리회가 130여년을 존재하고 있는 신앙의 토양은 한때 불교와 유교가 융성했던 역사의 토대위에 있다. 과거 그 융성에 비하여 지금은 유명무실한 앞선 그 역사가 한편으로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자신이 따르는 진리를 위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고 민초들의 아픔을 위로하여 그 호응으로 전국 산천마다 사찰을 세워온 1천500여년의 불교가 쇠망(衰亡)하는 기간은 고작 15년이 걸리고, 뒤를 이어 등장한 유교(왕으로부터 정승, 판서, 지방향반까지 모두가 신자)였음에도 6백여년의 그 유교가 허물어지는 기간은 불과10여년이 걸렸다는 역사학자들의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13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갖고 전 국민의 18%의 어설픈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오늘 우리 기독교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가?
이생의 삶이 전부이기에 이 땅에 사는 삶이 끝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이들과 달리 내세의 주님 앞에서 영원을 향한 심판을 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그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분명한 “네비게이션”이 있다. 만약 그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그가 어느 여정의 삶을 이끌어 왔든지 인위적인 삶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본인이 소명자요 지도자라는 확신이 있다면 수많은 추종자들, 요란한 칭송과 자기스스로를 높이는 구호보다는 그는 먼저 그분, 자기 앞에 계신 오로지 유일한 청중이신 그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으로 살고 그 생을 마치면 된다. 그 외의 것들을 기대하며 두리번거림은 모두가 위선이요 객기며 허세다.
기독교는 말(言)의 종교라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크리스천들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다. 그러므로 경박한 말을 하는 자가 신중한 사람일 수 없고, 사려 깊은 자가 천박한 말을 할 수는 없다. 하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야 두말해 무엇하랴, 성경말씀에도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 구도자들에게 실수보다 더 나쁜 것은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그 타성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이들은 주변에서 자신의 피를 끓게 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심령이 뜨겁다는 것과 피가 뜨겁다는 것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상식과 생각 있는 이들마다 너나없이 국가의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는 시대에 적과 동지가 어디 있는가?
죠나단 에드워즈(18세기 미국교회를 구한사람)의 표현대로 “이 시대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잠시 지나가는 세상, 이 땅에서 주님 만나면 그는 어느 형편에 있든지 영원한 생명, 그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이라도 영원한 멸망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풍전등화’ 조국의 위기에 눈물로 중보의 자리에 엎드린 예레미야의 그 눈물이 필요하다.
글을 마치며...
어느 랍비를 찾아갔던 한 박식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결코 나이가 어리지 않았지만,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랍비를 찾아가 본적이 없었다. “평생 무엇을 했는가?”라고 랍비가 물었다. “탈무드 전체를 세 번 훑었습니다.” 그 박식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 랍비는, “그래. 하지만 탈무드가 자네를 훑고 지나간 건 몇 번이나 되나?”라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