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과정, 영혼의 때를 위하여...

오재영
  • 1270
  • 2021-10-09 06:22:52
오늘 우리들의 모습...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한없이 연약하고 나약한 것이 인간임을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다. 특히 구도자(求道者)집단의 영혼의 교도를 책임진 이들이라면 과거보다도 더욱 스스로 자기 성찰에 힘쓸 일이다. 모두가 오직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아니면 나(我)서지 못하는 것이 牧師의 숙명(宿命)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조국의 북녘 땅과 거대한 중국의 지하교회에서 굶주리면서도 신앙의 길(道)을 가는 이들의 밖으로 들리는 소식들은 흐트러진 모습들의 우리를 부끄럽고 두렵게 한다.

제자의 길...
어느 모임에서 신앙 때문에 18년을 감옥에서 보낸 중국인 목사가 소개되어 간증을 하게 되었다. 그는 청중에게 자신의 감옥살이 경험을 이런 말로 들려주었다.

“제 친구들은 제가 악명 높은 그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어떤 일을 했길래 몸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그 곳에서의 삶은 너무너무 고된 것이었다고 대답합니다. 수용소 당국자들은 제게 인분(人糞) 구덩이를 치우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 구덩이는 수감원들조차 가까이 가기를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내가 교육 수준이 높은데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자기들은 무신론자인데 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일을 시켰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나에게 인분 구덩이 치우는 일을 시키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러 해 동안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구덩이는 수용소 전체에서 수거된 인분으로 가득찬, 넓이 2미터 이상에 길이도 2미터나 되는 구덩이였습니다. 인분이 꽉 차면 적당히 썩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퍼서 밭에 비료로 보냈습니다. 구덩이는 아주 깊어서 바닥까지 깨끗하게 퍼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병균 덩어리 속에 직접 들어가 시종 악취를 맡아가며 인분을 조금씩 차례로 퍼내야 했습니다.”

“간수들과 모든 수감원들은 악취 때문에 가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혼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강제 노동수용소에서는 보통 모든 수감원들이 엄격한 감시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혼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구덩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혼자 있을 수도 있었고 주님께 실컷 큰 소리로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시편(詩篇) 모두와 여러 성경 말씀을 암송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가까이 와서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입니다. 그 때껏 외우고 있던 찬송들을 큰 소리로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내가 제일 즐겨 부르던 찬송 중 하나가 ‘저 장미꽃 위에 이슬’입니다. 그것은 체포되기 전에도 제일 좋아하던 찬송가였지만 그 때는 그 찬송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면서 나는 우리 주님과의 놀라운 교제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내 곁에 계신 우리 주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구덩이 안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나는 주님의 임재를 맛보았습니다. 그 분은 결코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나게 되었고 그 인분 구덩이는 나의 은밀한 동산이 되었습니다.”(고든 맥도날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 인용).

영적 나태함과 비만에 걸려있는 우리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대한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일화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찬란한 로마의 거리를 걸으면서 그 친구가 아퀴나스에게 “우리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아퀴나스는 “그러나 절름발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핍박이 끝이나고 국가의 보호를 받는 변화가 시작되면서 능력도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당시의 교회는 죄의 용서에 대해서만 고백할 수가 있었지 치유의 생명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다.

글을 마치며...

오늘도 선교의 대상들이나 크리스천을 불문하고 모두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좌절하고 있는데, 주변에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의 신중하지 못한 언행을 듣고 보노라면 어이없고 가련한 마음이다. 주님의 대속의 피(血)로 구원의 자리에 있건만 저들은 무슨 생각으로 살기에 저런 흔적들을 남길까? 세상 두려움도 모르고 자신이 영적 색맹(色盲)임도 잊어버린 가엾은 이들이 아닌가?

유대의 다윗왕의 치세에 관한 설명의 내용 중, 역대상 12장 32절의 내용은 언제나 책임 있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잇사갈 子孫 중에서 時勢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行할 것을 아는 頭目이 二百名이니 저희는 그 모든 兄弟를 管轄하는자이며...” 주님의 긍휼(矜恤)을 기도드린다.

이전 박영규 2021-10-09 설교-의인 10명은 어떤 성도인가?!/10월10일주/사회복지주일/강단 초록.
다음 김연기 2021-10-09 10월21일로 예정했던 제155회 늘푸른아카데미 정기강좌를 11월18일(목)로 다시 연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