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을 살다보니

함창석
  • 1335
  • 2021-10-15 18:55:52
저 같은 사람도 있으니

오늘 날 집값은 대단할 정도를 넘어 경탄스럽다. 현대에 와서 집을 대표하는 것은 아파트일 것이다. 수도권 지역 아파트는 보통 10억이 넘고 30억을 호가하는 아파트도 늘어나고 있다. 부동산 보유세 기준이 11억이 넘는다고 한다. 전세는 품귀가 되고 집값과 별 차이가 없다고도 하니 직장 생활하여 평생을 모아도 자기 집을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젊은이들 하소연을 넘어 아우성들이다.

나 같은 사람은 내 명의로 된 재산이 없다. 내 명의로 되었던 집도 처분하여 이주를 하면서 자기 명의로 해달라고 아내가 말해 그렇게 해주었다. 지금은 딸에게 명의를 넘겨주고 그냥 살고 있다. 나는 방 두 칸으로 하나는 서재 겸 컴퓨터 작업 방이고 다른 하나는 침대, 옷장이 있는 쉼 공간이다. 방 하나는 4평씩이다. 화장실이 달려 있다. 거실과 주방, 내실은 아내가 차지하고 있다. 나는 10여 평 남짓하게 활용하면서 산다. 아내는 15평정도 공간을 차지하고 5평 정도는 공유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살 때 한 집에 17명이 살았던 때도 있었다. 동네에서 그래도 넓은 집이라고 하였는데 훗날 알아보니 24평이었다. 물론 행랑채도 있었지만 말이다. 삼촌이 결혼을 하여 동생들 두 명을 낳을 때까지 같이 살았다. 시집 안 간 고모 2명, 장가 안 간 삼촌 2명 등 우리 형제자매 4명에 할머니 등 행랑채에는 일하는 친척 아재 등 17명이 작은 방 5개에 살았으니 요즘 같으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는데 그 세월에는 다 그렇게 살았다. 논이라야 고래실 논 10마지기, 밭 3000평이 고작이었고 아버지는 면서기로 다니셨다. 아버지는 5마력자리 소위 똑딱 기계방아를 구입 운영하였는데 동네 기술자 아저씨가 일을 함께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지붕도 함석이었다. 동네에 기와집은 부잣집 한 집뿐이었다. 그리고 40여 채가 넘는 집들은 초가였다가 1961년 5.16 군사혁명(일명: 군사쿠데타)이후 새마을운동으로 거의 슬레이트로 지붕을 개량하였다. 슬레이트는 석면발암물질이 들어 있다고 한다. 훗날 철거 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요즘 고향은 농협 융자를 얻어 주택개량사업으로 많이 변했다. 우리 고향은 농협 부채와 자기 재산이 비슷하여 처분하면 거의 없을 정도인 집도 있다고 한다. 노령화 되어 노인들이 별세하면 도시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상속받을 재산이 없다고도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집안 양자 문제로 인하여 나는 원하지 않는 도시생활을 하게 되어 원주, 서울로 옮겨가며 학창시절을 보내야 하였다. 산골에 살던 나는 면소재지 학교를 다니다가 도시로 전학을 하였다. 물론 서울생활은 친척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하숙을 하여 먹고 살던 고모 집인데 나는 한 평반인 다다미 다락방에 기거하였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웠다. 청소년 시절을 그렇게 살다가 교육대학을 입학하게 되었고 학교농장 근로 장학생으로 기거하며 학교를 마치고 초년교사가 되었다. 횡성 고향 근처로 돌아와 태기산 아래 화동지역 전기도 없고 버스도 하루 한 번 들어오는 벽지 아닌 벽지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는데 쥐들과 함께 허름하기 짝이 없는 학교 사택에서 기거했다.

1974년 22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며 낮에는 학교근무, 저녁에는 신자들을 위해 속회를 드리며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하여 훗날 교회를 개척하게도 되었고 예배당을 건축하며 5년 간 모았던 적금을 몽땅 건축헌금을 하며 지역사회에 환원 아닌 환원을 하기도 하였다. 그 때도 학교 사택에 살았다. 결혼을 하고 읍내로 발령을 받고 원주에 기거할 집 문제로 아버지와 상의한 결과 두 칸 방으로는 안 되니 방 4개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여야 한다하시기에 아내와 여러 가지 형편을 의논하니 아내가 친정 장모가 하시는 계를 타면 집을 구입하는데 보태기로 하고 집 명의는 아들인 내 명의로 해주는 조건을 달았다. 그래서 동생들 학비를 보태며 부모님을 모시고 자녀들 양육으로 10여년을 살았다.

1991년 아버지께서 일찍 66세로 소천 하셨다. 아이들 학교문제도 있고 하여 전세를 주고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형제자매들도 모두 출가 하였다. 어머니만 모셨다.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자 학교근처로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자 중간 지점에 아파트를 전세 얻어 살다가 아들은 부산으로 딸은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며 셋집 살림을 하였다. 아내의 월급은 모두 자녀들 뒷바라지를 하는데 쓰였다. 내 월급은 자녀들 학비 연금대부를 갚아나갔다. 개척을 하는 교회에 헌금으로 들였다. 섬기는 본 교회에 십일조를 비롯한 행사지원비로 헌금을 하며 두 번이나 건축에 참여를 하였다. 제자들 중에 약속한 장학금을 지급하였고 그 밖에 대학원, 계절학기 등 재교육에 학비로 재산을 모을 수가 없었다.

교감 교장 등 관리자로 있을 때는 10여년을 학교 사택에서 혼자 살았다. 40여년을 근무하고 정년퇴직할 때 받은 지원금 9천만 원은 살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혁신도시 아파트로 이주하는데 보탰다. 인생 말년을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준비를 하였다. 자녀들도 직장을 잡았고 결혼 출가를 하였다. 다행히 아들이 잘 풀리고 나는 연금으로 받을 수 있었기에 의식주 문제는 어려움이 없다. 연금은 은행에 40억을 예금한 것과 같다고 한다. 한 달 이자에 해당한다. 물론 사망 시에는 사라지게 된다.

2018년 봉산동에 살았던 집을 시청에 넘겼다. 도시재생사업이 국토관리부로부터 결정이 되어 토지감정평가에 따라 보상받았다. 5년 이상을 도시재생사업 공모에 협조를 한 결과 주택을 공방으로 활용하였기에 1억 원 가까이 현실보다 더 보상을 받았다. 그것은 봉산동 도시환경 개선사업 중 하나인 교회건축에 헌금으로 들였다. 교회 예배당은 유지재단에 넣게 되었다. 국토관리부에서 보상을 받아 문화관광부 산하인 유지재단에 넣었으니 그게 그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결과다.

주택 매매형식으로 받은 돈은 아내가 자기 시집 올 때 가져온 돈이라고 하며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하기에 모두 돌려주었다. 말은 노 후 대비를 하려면 현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내 소견으로는 소유욕을 버리지 못한 것으로 판단이 된다. 현실가로 매매하였을 경우로 2억만 달라고 하였으니 다행이다. 내 앞으로도 조금 떡고물이 남았기에 대학원에 등록금을 내고 공부를 하고 있다.

아내는 늘 말하곤 한다. 자기 동기들은 건물 몇 채를 사서 월세도 받고 하여 여행도 마음대로 다닌다고. 자기는 평생 내 뒷바라지만 하다가 늙었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더 죄송한 마음이 들게 된다. 가끔은 투정이 너무 심해지기도 하여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다. 아들과 딸을 위해 학비, 주택구입 등 지원을 해 준 것이 감사할 터인데 욕심이 끝이 없나보다. 친구들과 비교를 할 때는 마음이 괴롭다.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평신도 권사, 장로로서 교회도 여러 개 개척해 세우고 예배당도 건축지원하고 장학사업도 하고 시인으로 시집도 내고 박사 공부도 말년에 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어젯밤에는 꿈까지 요사스러웠다. 흑석동 고모네 댁에 집안 행사가 있어서 고모부 친척들이 많이 올라왔다. 나는 쫓기다시피 하여 다락마저 내놓고 상도동 작은 아버지 댁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에도 거실이라야 그렇고 방 두 칸인데 숙모 친정집 애들이 올라와서 잘 방이 없었다. 그 밤은 약간 추운 가을이라 마루에서 몇 밤을 보냈다. 그래도 학교는 갔다. 서울 하늘아래서 느끼는 쓰라림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꿈에까지 지금도 나타나다니 충격적이다. 청소년 시절 악몽으로 살아있다니 말이다.

서울 사는 동기들이 하소연을 한다. 세금에 치여 죽을 지경이라고 말이다. 사는 집이 값이 올랐지만 15억이라고 세금을 더 내야 한단다. 국민연금, 월세수입 등 한 달 3백만 원도 안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강남 일원동 아파트를 팔고 수지 아파트로 이사를 하며 차액 3억으로 80세까지 사는 것으로 보고 월 3백만 원 정도 10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런대로 회사 중역까지 지내고 노 후가 안정적이라던 친구인데 이제는 골프도 더 이상치기 힘들게 되었다고 한마디 한다. 그 친구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운동을 했다. 가끔 태국 등 해외에 나간다는 이야기도 했었는데 코로나로 해외를 나가지 못하니 국내 골프장이 너무 비싸 힘들다고 한다. 오히려 한 달 정도 동남아 등 해외에 나가면 비용이 덜 든다고 했다. 겨울철은 따뜻한 곳에서 여유 있게 보냈다는 말에 부러움도 생긴다.

창원 사는 사위가 서울로 발령이 났다. 당장 서울에 30평형 아파트를 살 돈이 없다. 창원은 5억 정도인데 서울은 두 배가 넘는 10억이라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선 자기 아버지 집으로 사위만 들어가고 딸은 아이들과 창원에 남아 있다. 물론 아이들 학교문제도 있고 전세계약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지만 돈이 없어서이다. 5억이 누구네 개 이름은 아니지 않는가? 시아버지가 마련을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나보다. 아직 상속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부모님과 합하기에는 너무 좁은 공간이라고 한다. 아내는 요즘 딸네 주거문제에 대해 걱정을 자주 하고 있다. 내년 봄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해결을 해야 하기에 나도 은근히 염려가 되어 자주 기도하게 된다.

그 동안 살아오며 굿네이버스, 월드비젼, 유니세프를 비롯한 단체후원과 각종 교회관련 단체 후원과 공동체 활동을 지원하였다. 6년 전에는 몽골 울란바토르 신도시 구역 날래흐에 산돌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사례비 협약을 통해 지원하고 있고 신학교 MTBC 장학회를 설립 장학기금을 적립하고 있다. 시탄비, 어린이날행사비, 구제사업 등 내 연금에 절반이 헌금되고 있다. 선교센터도 준비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선교참여가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지만 힘에 겨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도움을 받는 단체나 이들도 의례히 지원을 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구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며 환난 때에 언제나 돕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땅이 꺼지고 산이 무너져 바다를 메우며 바닷물이 성난 파도를 일으키고 산을 흔들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하나님의 성으로 흐르는 시내가 있으니 가장 높으신 분이 계시는 거룩한 곳을 기쁘게 하는구나. 주의 선하심과 한결같은 사랑이 평생에 나를 따를 것이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라.”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평화롭고 자유스러우며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어본다.

이전 박은영 2021-10-15 구약성경과 한자이야기• 찬송가와 한자이야기 강좌 (감리교신학대 평생교육원)
다음 민관기 2021-10-15 정애성 목사를 애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