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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도의 증언
이경남
- 1369
- 2021-11-08 23:59:18
저는 80년 5월 19일 새벽 2시 광주에 투입되었다가 5월 24일 송암동 오인 교전으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되기까지 일주일 동안 금남로를 비롯한 시내 진압 작전에 참여하고 이번 재판에 쟁점이 되고 있는 권용일 일병 압사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목격한 권일 병 사망 사건과 5월 21일 금남로에서 이런 불행한 사건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전후사정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재판과 변론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권일병 사망 사건
이 사건에 대하여 우리 사회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보고서를 낸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1995년 518 특별법에 의해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감찰부 합동으로 조사하여 보고서가 나온 바 있고 또 하나는 2007년 군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동일하게 조사하여 보고서가 나온바 있습니다
그리고 공히 이 두 보고서는 시위대의 장갑치가 돌진하며 군인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고하고 있고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진 정설입니다
그러나 1995년의 검찰조서에는 달리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일이 시민군 장갑차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인 장갑차에 의해서라는 목격자들의 진술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당시 장갑차에 깔려 죽은 계엄군은 시위대 장갑차에 깔려 죽은 것이 아니라 계엄군 장갑차가 돌진하는 시위대를 보고 후진하다 그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고 하는데 피의자의 생각은 어떤가요. 왜냐하면 당시 시위대 장갑차는 바퀴가 고무타이어였는데 계엄군 장갑차는 궤도였기 때문에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은 것은 계엄군 장갑차가 후진하다 깔려 죽은 것이라고 하는데요."
“당시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은 것은 저의 대대상황이 아니라 약간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11여단 선임 대대장으로 현장을 지휘하시던 61대대 안부웅 대대장)
이 분 외에도
61대대 1지역대 김 모 중대장 1995년 검찰조서
“우리 측 장갑차를 향하여 화염병을 투척 하였습니다 그러자 불이 붙을 것을 두려워한 장갑차가 뒤로 후퇴하였는데 그때 장갑차 뒤에서 휴식하던 병사 2명이 우리측 장갑차에 깔렸습니다” (뉴스타파 2019.4.23. 518 공수부대원이 장갑차에 깔렸다?)
62대대 대대 통신병 박 모 일병 2006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서
“21일 1시경 도청 앞에서 권용운 일병이 사망한 이유는 후진하는 계염군 장갑차에 깔렸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분명이 목격한 일입니다 나중에 시신을 장갑차에 싣고 조선대로 후퇴하였습니다” (뉴스타파 2019.4.23. 518 공수부대원이 장갑차에 깔렸다?
1981년 63대대 9지역대 이 모대위 진압 작전 수기 보안사 보관
“폭도가 장갑차에 화염병을 투척했고 폭도가 홍수처럼 달려 들어 왔으며 이때 밀릴 때 후진하던 apc에 뒤에 있던 63 대대 병력 1 명이 깔렸으며....” (뉴스타파 2019.4.23. 518 공수부대원이 장갑차에 깔렸다?)
당시 시위대가 차량으로 돌진을 시작하자 실탄이 없이 맨 몸으로 대치하던 군인들은 긴급히 도청 쪽으로 도피해야 했고 사태가 너무 다급했기 때문에 누가 죽고 다치고 하는 것을 살필 경황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차량 돌진이 멈춰진 후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동료 한 사람이 죽은 것을 알았고.... 군인들은 당연이 이걸 시위대의 차량에 의한 사망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지휘관들도 상부에 이렇게 보고한 것이 시위대 장갑차에 의한 군인 사망 사건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알아야 하는 것이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실을 솔직하게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신 안부응 대대장님입니다
그간 518을 그린 영화나 매스컴 등에서 선임 대대장으로서 현장 책임자였던 이 분에 대하여 아주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 분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물론 군인으로서 80년 당시 우리나라의 정국을 보는 시각이 군부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본시 이분은 성품이 인자하고 신앙심이 깊은 분으로 병사들에게 신망과 존경을 받는 분이었고 현장에서도 격해진 사병들을 만류하며 선의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무척 애를 쓰시던 분이고 지금도 분당의 한 교회에서 장로님으로 봉사하며 사시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5월 21일 정오 경 군지휘관들과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하던 시위대는 정오 경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량 돌진을 시작하는데 당시 대치선 마지막 줄 전일빌딩 앞 도로 중앙에서 서 있던 저는 차량 돌진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전일빌딩 맞은 편의 YMCA 건물 쪽으로 뛰기 시작했고 인도에 들어서 제 안전이 확보된 후 뒤로 돌아 도로를 바라보았는데 8지역대 5중대 통신병이었던 권 일병이 YMCA 건물 끝부분에서 사선으로 넘어졌고 후진하던 군 장갑차가 권 일병의 허리 위로 지나가고 그 순간 그의 상체가 들려지며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즉사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연속적으로 돌진하는 차량들에 의해 2차 3차 가해를 당하며 군인 한 사람의 육신이 처절하게 파괴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당시 상황이 각자 도피하기 너무 급했기 때문에 이를 목격하거나 증언할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래 이것이 시위대에 의한 사망 사건으로 받아들여진 것이고 군 상부에도 그렇게 보고가 되고 그래 전두환씨도 그렇게 확신했을 것입니다
지금 이것이 시위대 장갑차에 의한 것이냐 군인 장갑차에 의한 것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 중인데 이는 이게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 이후 이곳에서 일어난 발포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이게 누구의 장갑차이던 간에 이미 18 19 20일 사흘 간 시민 사망자가 9명이 나왔는데 그 중에 6명이 타박사자들입니다
다시말해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군인들의 진압봉과 소총 개머리판과 군화발에 의해 6명의 시민들이 사망할 만큼 무서운 진압 작전이 벌어진 것이고 이에 격노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선 게 20일 오후부터의 시민들의 시가행진이고 차량 시위이고 21일 오전 금남로의 시위입니다
설령 피고측의 주장대로 이 사고가 시민군 장갑차에 의해 일어났다 해도 18,19.20일 3일간 시내 진압 작전에서 이런 희생자를 낸 군인들의 폭력성은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는 군부의 잘못입니다
여기까지는 이미 화려한 휴가나 택시 운전사같은 영화나 각종 방송 매체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2. 5월 21일 금남로 사건의 전후(은폐된 진실)
존경하는 정 변호사님
변호사라는 직업이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도 변호를 해야하는 직책이고
그래 피해자를 위하며 변호를 할 때에는 정의의 사도가 되고 인도주의자가 되지만
가해자를 위하여 변호를 할 때는 불의의 지원자가 되고 공모자가 되는 어려움이 있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설령 기해자를 위하여 변호를 할지라도 진실과 사실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지 거짓과 허위의 토대 위에서 될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마 권 일병 압사 사건이 이렇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후 발생한 발포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어느 편의 장갑차였느냐에 따라 서로 책임을 전가할수 있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게 누구의 장갑차엿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1819.20일 사흘 간의 시내 진압 작전을 통해 시민 사망자가 9명이 나왔는데 그 중에 6명이 타박 사망자일 정도로 군인들의 폭력은 무지막지 했고 이런 폭력이 결국 평범한 수만의 시민들을 금남로에 모이게 했고 결국 게엄군 철수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차량으로 공격한 일이고 이런 시민들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던 광주기갑학교 장갑차가 넘어진 군인을 덮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이것이 군인이 아니라 시민의 장갑차였다 하더라도 지난 3일 간 광주 시내에서 자행한 군인들의 폭력적인 행위들은 용납할수 없는 악행입니다
그리고 단순한 사실 관계에 있어서도 권 일병은 군인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일인데 당시 군 상부가 이를 시민군에 의한 사건으로 이해하며 발포나 최종 무력 진압의 구실로 삼은 것이 이 사건입니다
만약 변호사님께서 군인들의 진압 적전의 불가피나 정당성을 주장하시려면 이 사건이 아니라 시위가 과격해지기 시작한 20일 밤 이후의 상황에 근거하셔야 합니다
광주 시내에서 가장 무자비한 진압 작전이 벌어진 게 19일 오후부터입니다
광주 시내 전역에 7공수 11공수 2000여명의 병사들이 투입되며 상상하기조차 힘든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시민들은 공포에 빠지는데 사태가 너무 심각하게 돌아가니 광주시는 갑자기 오후 9시로 통금을 앞당기고 그래 19일 밤은 시내 전역에 수색하는 군인들 외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공포와 침묵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일 군인들의 위세에 눌린 광주는 시위가 사라진 평온한 도시가 되는데 오후부터 격노한 시민들의 거리행진이 시작되고 차량 시위가 시작되며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자 시위가 폭력화하기 시작합니다
세무서 방송국에 방화가 시작되고 밤 9시 노동청 앞에서 쉬고 있던 함평경찰서 소속 전경들에게 고속버스가 돌진하며 경찰 4명이 압사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일이 발생하고
또 군부는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20 사단 6000명을 추가 파병하기도 결정하는데 이들이 도착할 광주역을 확보하기 위해 나간 3공수 여단 병사들에게 시위대의 차량이 돌진하며 정관철 중사가 압사하고 3명의 병사들이 중상을 입는 일이 일어나고 그러자 군인들이 발포하여 사망자가 나오는 그런 일도 벌어집니다
그리고 21일 정오 아침부터 모여든 시위대와 군인들이 대치하는 가운데 권 일병 압사 사건 같은 끔찍한 일도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도청 앞 발포 전 일어난 가장 중요하지만 얼려지지 않은 사건이 21일 아침 농성동에서 일어난 20사단 차량 피탈 사건입니다
20일 추가 파병된 20사단 6000명의 병사들은 21새벽 무사히 도착 전교사로 들어가지만 사단 지휘부 차량들은 서울에서 새벽 2시 출발 아침 8시 광주 톨케이트에 도착하는데 곧바로 농성동 거리에서 무장 시위대 300여명의 습격을 받습니다
장교 7명 사병 21명 지프차 14대로 구성된 이 지휘부 차량은 20사단 화학대장인 김이영 소령의 인솔 하에 광주에 들어오는데 이 습격으로 말미암아 큰 피해를 당합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1995년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02시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시경 광주애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등 지휘용 차량 14대를 탈취 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 시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00 여명이 아세아 자동차 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 시내로 진출하였음”(518 관련 사건 조사결과 1995.7.18. 페이지92-93.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감찰부)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518 특별법의 취지가 군부를 반란죄로 처벌하고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이해하려는 취지이다 보니 여기에 걸림이 되는 것은 의도적으로 감춘 것 같다는 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이러합니다
인적 피해
경상 5명 중상 2명 실종 1명(후에 복귀)
물적 피해
1)지프차 14대
2)M60 기관총 3문과 실탄 200발 M 60차량 장치대 2개
3)M16 4정,M16 탄창 91개
4)45권총 1정과 45권총 탄창 2개
5)대검 8개
6)CN 최루탄 32발
7)쌍안경4개
8)무전기 P-77 2대,V-47 3대,V-46 3대,V-64 3대, V-160 3대,G-39 1대, TA-312/TA-221 15/1(유선휴대전화기),그 외 다수품목,
9)장교우의 18벌
10)군복 35벌
11)방독면 18개
12)광주 지도(1대 5만) 20장등 그 외 다수 군수 물품등
(20사단 62연대 2 중대장 최종원 대위의 증언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두 분의 변호사님 그리고 오늘 방청하시며 보도를 하셔야하는 방송 언론 기자님
저는 80년 5월 21일 아침부터 오후 5시 조선대로 퇴각을 하기까지 금남로에서 벌어지는 군부와 시민들 간의 긴박한 대치와 갈등을 목격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돕고 또 이런 정치적잍 소용돌이에 아무 영문도 모른채 투입되어 이렇게 희생을 당하는 동료들을 참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던 사람이고 후에 이 일을 기록하여 우리 사회에 광주의 살상을 알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불행하고 사악한 일은 결국 대통령 사망 후
1)비상계엄을 해제하고
2)유신헌법을 철폐하고
3)정상적인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4)이원집정제같은 정부 주도의 개헌을 반대하고
5)노동 3권을 보장하고
6)족벌사학이나 어용 교수들을 퇴진시켜 대학을 순화해야 한다는 시민들이나 대학생들의 요구에 대하여
유신체제와 군부 통치를 지속하려는 집권욕에 사로잡힌 일단의 사람들이 5월 18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포를 하며
1)모든 정치 활동 중지 시키고
2)대학 휴교령을 내리고
3)옥 내외 시위, 집회를 금지 시키고
4)전현직 국가 원수 비방 금지 시키고
5)직장 이탈 및 파업 불허하고
6)언론사 사전 검열 및 지도급 정치인과 재야 인사 체포등울 주장하며 폭압적으로 대응한데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사회가 내부적으로 이렇게 분열하고 갈등하는 동안 정체불명의 과격 시위대가 군인들보다 먼저 총기와 장비로 무장을 하고 군인들을 공격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당시 금남로에서 시위대와 대치하는 임무를 맡았던 나는 후에 드러난 군부의 야욕과 군인들의 폭력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의 틈 속에서 누군가 기관총과 실탄으로 무장하고 우리를 겨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참 모골이 송연해 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권용운 일병 사망 사건 전후의 이런 모든 사정을 고려하셔서 재판부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고 언론 방송인 여러분들께서도 제 진술의 취지를 잘 이해하셔서 균형있는 보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021.9.15. 수요일 오후 오후 5시 광주고등법원 전두환 항소심 증언
*재판부의 요청에 따라 전반부는 증언할수 있었으나 후반부는 할수 없었다 내가 권 일병 사건에 대한 증인으로 요청었지 518 전반에 관한 증인으로 나온게 아니라는 것이 재판부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이것을 말할 날이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518에 대한 아무 부채의식이 없다 현장에서나 그 이후 내가 해야할 일을 다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