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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감 조선선교 1885년 시작? 아니 1884년! 역사의식 바로 가져야...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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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21 01:11:45
맥클레이 선교사는 6월 23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24일 한양에 도착하여 김옥균에게 선교윤허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건냈다. 김옥균은 이 탄원서를 고종에게 보였으며 1884년 7월 2일 고종은 교육과 의료선교 윤허를 하였음을 다음날 매클레이에게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매클레이는 ‘고종황제의 선교 윤허는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50년 후인 1934년 6월 24일 미감리회와 장로회는 각각 선교50주년 기념행사를 1934년 6월 24일에 했다. 또한 1984년에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100주년 기념대회를 1984년 8월 15일에 여의도에서 가졌다. 조선선교시작을 1884년 매클레이가 고종에게서 선교윤허 받기 위해 한양에 도착한 날을 출발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감리회는 1984년엔 100주년의 해를 잊고 지나갔다. 결국 101년째인 1985년에 4월 3(수)-5(금)에 선교 100주년 기념연합연회를 인천에서 가졌다. 그런데 감리교회는 2015년에 한국선교 130년 기념을 한다고 한다. 이는 조선선교시작을 1884년이 아닌 1885년으로 본 것이고 100주년 기념대회의 실수를 또 한 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협성대의 서모교수는 조선선교 시작을 매클레이가 고종에게서 선교윤허를 받을 때를 기점으로 볼 수도 있다고 했으나 이미 조선감리회는 1884년을 조선선교 시작으로 보고 장감 선교부는 선교50주년과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던 것이다.
1884.6.23. 매클레이 제물포도착
1884.6.24. 매클레이 한양도착, 김옥균에게 서한전달
1884.7.2. 김옥균 고종에게서 선교윤허 받음
1884.7.3. 매클레이 김옥균 방문, 김옥균 서교윤허 사실 전달
1884.12.4. 조선선교를 위해 파울러감독은 스크랜턴에게 목사안수
1884.12.20.조선선교를 위해 파울러감독은 아펜젤러 파송결정
1885.2.2. 조선선교를 위해 파울러감독은 아펜젤러에게 목사 안수
1885.2.3. 샌프란시스코 출발 27일 일본 도착
1885.3.5. 조선선교사 회의 / 감리사 매클레이 피선
1885.3.23. 아펜젤러부부 조선선교 선발대로 요코하마 출발
나가사끼 경유, 언더우드 탑승
1885.4.3. 아펜젤러부부, 언더우드 부산항 경유
1885.4.5. 아펜젤러부부, 언더우드 제물포항 도착
조선선교 시작을 미 장감 선교부는 1884.6.24.로 보았고
1934.6.24. 선교50주년기념식(장감선교부)
1984.8.15. 선교100주년기념식(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그런데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985.4.3.-5 선교 100주년 기념 연합연회
2015. 선교130주년 기념대회 구상
하고 있어 조선선교를 1885년으로 보고 있다.
위 연표에 1885년으로 볼 수 있는 사유가 이겠는가?
과연 조선 아니 한국선교는 언제부터 일까?
미국 선교부는 조선선교가 매클레이가 조선을 방문해 고종에게서 선교윤허를 받은 그 날부터라 하고 있고 한국감리교회에서는 그 이듬해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에 들어 온 날부터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감리교회의 주장처럼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에 들어 온 그 날을 기점으로 해야 하는가? 만일 조선 선교의 그 시작을 아펜젤러로 본다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 온 그 배경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펜젤러가 조선에 들어오게 됨은 매클레이의 조선방문과 고종의 선교윤허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매클레이의 조선방문은 가우쳐의 요청이 있었고 그의 요청은 보빙사절단이 미국에서 가우쳐를 만남에서 였고 보빙사의 미국방문은 조미수호조약과 푸트 공사의 내한에서다. 또한 조미수호조약은 신미양요에서 가능했고 신미양요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미국과의 전쟁이었고 제너럴셔먼호사건엔 백령도에 한문성경을 전했던 토마스목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사건이 있다. 조선선교에 꿈을 가졌던 영국인 토마스의 죽음이 조선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거쳐 19년 후 아펜젤러가 조선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면 조선선교의 시작을 1866년 토마스의 죽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연결된 사건들 속에서 과연 조선선교의 시작의 깃 점이 어디냐고 물을 때 토마스라는 것도 매클레이의 조선 방문이라는 것도 아펜젤러선교사의 첫 발이라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교사들의 이야기고 선교사들을 파견한 본국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펜젤러 선교사의 제물포 입항이 조선선교의 시작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는 제물포에 닿기 전 이미 부산에 머물러 1박을 하고 왔기에 조선 첫 발이 제물포가 아니라 부산이기도 하다.
매클레이의 조선 방문으로 고종에게서 윤허를 받은 것이 조선선교의 시작이라면
고종이 매클레이에게 선교윤허를 한 그 시점이 조선선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고종의 선교윤허가 매클레이가 조선을 방문하여 김옥균에게 선교윤허를 받아 줄 것을 요청해 김옥균이 고종을 만나 이 탄원서를 전달하였고 김옥균은 서한 전달과 더불어 조선의 개화를 위해 서양의 기술과 서양의 정신이(서도서기) 필요하다고 했다. 즉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실 윤허의 현장은 그렇다. 여기엔 푸트공사와 통역관 윤치호가 참여하였다. 윤치호의 일기에 보면 “주상께서 미국 상선이 조선 내해를 항해하는 일, 미국인이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는 일, 전신시설을 설치하는 일 등을 허락하시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선교윤허의 배경에는 단순 매클레이의 요청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보빙사절단의 방미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보빙사의 방미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건이지만 미국에서 무엇을 했으며 또 그들의 귀국으로 무엇을 했는지에 관해 아는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조미수호조약 이후 푸트공사가 조선에 상주하게 되자 고종은 바로 조선 공사를 미국에 파견할 수 없자 보빙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민영익을 단장으로 하고 박영식을 부단장으로 한 보빙사절단을 파견하면서 그동안 잘 몰랐던 것으로 고종은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살펴보라고 임무를 주어 보냈다. 굳이 말하자면 산업스파이 같은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보빙사절단은 배를 타고 미국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상공회의소 초청으로 만찬을 접대 받았다. 그리고 와싱턴으로 기차여행 할 때 볼티모아에서 탑승한 가우쳐목사가 조선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미대통령을 만난 보빙사는 미국의 군사력, 우체국, 교육, 농업정책 등 다 방면의 것을 살펴보았다.
견학을 마친 보빙사는 부단장 홍영식과 더불어 최경석 고영철 현영택 로웰은 시찰을 마친 후 바로 워싱턴을 떠나 기차로 오던 길을 되돌아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일본을 거쳐 제물포로 귀국을 했고 단장인 민영익과 서광범 변수 등은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미대통령 1호 군함을 내 주었고 리스본 마르세이유 런던 파리 나폴리 카이로 싱가폴을 거쳐 일본을 경유해 보빙사가 출발한지 근 10개월 만에 제물포로 귀국하였다.
민영익보다 일찍 귀국한 홍영식은 귀국하여 1883년 11월 고종을 만나 보고하였다.
고종 : 우리가 미국에서 장점을 취할 것은 무엇이냐?
홍영식 : 특히 우리가 가장 중요시 할 것은 교육에 관한 일인데 만약 미국의 교육방법을 본 받아 인재를 양성해서 백방으로 대응한다면 아마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므로 반드시 미국교육제도의 법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 보고를 통해 고종은
1)1884년 우정국을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의 기초가 되었고,
2)1884년 미국농작물과 가축을 들여와 왕실목장에 근대 농업시험장 설치,
1885년 조선전역 305 군현에 서양 농작물 보급했고
3)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학교를 세웠으며 고종은 남학교를
배재학당이라 했고 명성황후는 여학교에 이화학당이라 이름을 하사하였다.
4)1887년 조선 최초로 에디슨 전기회사를 통해 전기를 도입하였다.
이렇게 보면 고종은 1883년 11월 보빙사의 부단장인 박영식의 보고로 인해 이미 미국의 교육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을 건의 받아 검토 중에 있었고 그 이듬해인 1884년 7월에 김옥균을 통해 매클레이에게 윤허한 것이다. 결국 보빙사 박영식의 방미와 견학, 가우쳐와의 면담, 매클레이의 조선방문, 고종의 선교 윤허가 서로 연계된 한 선상에서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 매클레이가 방문하여 선교요청에 대한 윤허가 아니라 박영식의 보고 후 적어도 8-9개월간 고종은 이 일에 많은 생각을 하였고 대화도 있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결국 고종이 미국에 가 우리가 배울 것을 보빙사에게 찾아보라 임무를 주었고 고종은 그 결과에 대해 받아 들였던 것으로 본다면 조선선교의 구 시작은 고종의 선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이다.
조선선교 시작은 적어도 아펜젤러 도착이 선교기점은 아니라고 본다. 이미 우리 감리교회나 한국기독교회는 그 시작을 1884년으로 보고 출발하였고 이미 50주년 100주년을 기념하였다. 그런데 우리 감리교회만 그 시작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130여 년의 선교역사를 가진 우리로서 이젠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매클레이가 고종에게 선교윤허를 받은 1884년 6월 24일이 선교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조선선교의 시작을 조선에 도착한 선교사에게 두지 말고 우리 조선을 매클레이에게 선교윤허를 한 즉 조선역사에 기독교를 수용한 날인 7월 2일로 그 시작의 날로 볼 수는 없는가? 고종이 미국을 알아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보빙사의 보고에 의해 이뤄진 선교윤허 결단의 날이기 때문이다.
1882.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 푸트공사가 부임하자 고종은 보빙사절단 파견을 결심하고
1883.6. 보빙사절단 임명(단장 민영익 부단장 홍영식 등 11명)
*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아 오라 특명을 내림
1883.7.16. 보빙사절단 제물포항 출발
1883.9.2. 샌프란시스코 도착
1883.9.7. 샌프라시스코 출발 9.12시카고 도착
1883.9.13. 워싱턴을 행해 출발, 볼티모아에서 탑승한 가우처 만남(조선선교요청)
1883.9.18. 아더대통령접견 고종친서전달
1883.9. 가우쳐, 보빙사절단 자기 집으로 초청 및 가우쳐대학 견학(조선선교요청)
* 보빙사 일행은 미국에서 우체국, 농림부시험연구소, 보험회사,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전기회사, 산업박람회 및 가우쳐대학 등을 방문
1883.11. 가우쳐 미선교부에 조선선교 요청
1884. 1.31 가우쳐, 일본 주재 매클레이에게 조선 방문 요청
1884.3.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매클레이에게 조선방문 명령
1883.11.22. 고종에게 박영식의 보고
무엇보다도 기기의 제조 및 차, 전보 등이 급선무인데
특별히 미국 교육방법을 본받아 인재양성 촉구 함.
1884.6.23. 일본에서 매클레이 도착 김옥균 선교요청서한 받음
1884.7.2. 고종, 김옥균이 가져 온 선한을 보고 선교윤허
이런 일정에서 보듯 고종은 미국에서 무엇인가 배우길 원했으며 박영식의 보고와 같은 선상에서의 매클레이 요청에 선교를 윤허 한 것이다. 그러면 조선선교 그 시작을 언제로 보아야 하는가? 딱히 시작의 날을 선정하기는 그렇다. 그러나 1884년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것도 미국이나 그 어느 곳도 아닌 우리가 선교의 주체라는 것....
이렇게 선교역사의 기점을 불분명한 상황 하에서 갖는 130년 주년 기념행사는 별 의미 없다고 본다. 우리의 선교역사가 언제 시작되었냐는 역사적 정리도 제대로 안 된 채 2015년에 130년 기념행사를 가진다는 것은 별 의미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예산이 있다면 감리교역사를 정리하는 일부터 착수해야 할 것이다. 사실 무엇 하나 우리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연구하고 발표하고 정리하기 위해 모여 공식적으로 이야기 나눈 일도 없었다.
감리교신학대학의 설립년도나 정동 내리교회의 시작의 날도 불분명하다. 모두가 자기가 원하는 날에 그 시작이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감리교회 역사에 대해 정리된 것 없이 지나는 일들이 많다. 조선 선교의 시작에 대한 정리부터 시작하여 정체성을 갖는 감리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의 주장은 그 어떤 결론을 말하기 보다는 이젠 우리 스스로를 돌아 봐야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