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 가문 3인 정리했어요.

민관기
  • 1897
  • 2022-02-18 03:04:36
*. 대정부 청원서 그대로 입니다.
*. 세 분 모두 다 국가보훈처의 심의 대상에 올랐습니다. 8월초 훈장 추서 결정 통지온다 통보 받았어요.
*. 무엇이든 댓글, 문자주셔도 됩니다.
*. 010 3082 7004


헨리 게어하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근대 조선 남성 교육의 아버지, 민주공화정 소개, 한국의 민도 높임)
생몰일 : 1858. 2. 6 ~ 1902. 6. 11


생애조명
미국 펜실베니아주 출신으로 부친+은 독일계 스위스의 아펜젤+ 출신이며 모친도 독일계의 메노나이파의 신앙이 독실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1876년 웨스트체스터대학 재학중 장로교회 집회에 참석하여 회심을 체험하고 이 날(1876. 10. 6)을 제2의 생일로 기렸다. 허나, 회심 이 후 장로교회의 신앙유형에 갈등을 느껴 1879년 랭카스터 감리교회를 통해 감리교회로 이적하였다. 1882년 드루신학교에 입학해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그리피스의 Korea, the Hermit Nation을 읽었다. 1883년 전국신학교연합 집회에 드루신학생 대표로 참석해 훗날 선교 동역자 언더우드를 만났다. 1884년 드루 졸업반 때에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한국 선교사로 아펜젤러를 선임되어 청교도의 후예인 엘라 닷지와 혼인하고, 부산항과 제물포항을 거쳐 1885년 부활주일 조선에 당도하여 이렇게 기도했다.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히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이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와 빛을 하락해 주옵소서“

허나, 갑신정변의 여파가 있어 서양인 여성의 입경이 금지되어 아펜젤러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2진으로 스크랜턴이 입국해 선교 기반을 닦았고, 아펜젤러 부부는 7월 19일에야 한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우선, 아펜젤러는 미국 공사대리 폴크를 통해 조심스럽게 학교 설립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긍정적 반응을 얻어 학생 고영필, 이겸라 등 2인을 얻어 학당을 여니 이것이 배재학당이며, 매서인을 고용해 감리교회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출판하여 보급케 하였고, 1887년부터 조선 감리교회 감리사가 되면서 교회, 학교, 병원의 선교사업을 관장하고 정동에 1층짜리 양옥을 건축하여 선교 본부로 활용하였으며, 성경공부를 위한 벧엘예배당을 설립하니 이것이 정동제일교회이며 감리교신학대학교의 모체이다.

아펜젤러는 1888년 선교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자 존스, 언더우드와 지방 순회 전도여행에 나섰다. 1880~1890년에 전국 8도중 6도 1천8백 마일 하였는바, 언더우드와는 일찍이 친분이 있어 감/장 선교구역 분할은 큰 마찰없이 진행되었다.
1887년 한국성서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어 1890년 한국성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하였고 1892년부터 회장이 되어 문서사업을 관장하며 활동하며, 정동제일교회(현, 문화재 교회)를 1897년 붉은 벽돌로 신축하였다.

한편, 아펜젤러는 청년운동에도 공적을 남겼다. 갑신정변 때 망명했던 서재필과 손잡고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 내에서 활동하였고,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엡웟청년회를 조직했고, 헐버트, 언더우드와 YMCA를 조직했으며, 연희전문의 기초를 놓았고, 민족 지도자들이 투옥되었을 때 옥중 심방하여 이상재, 이승만, 남궁억 등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었고, 이승만, 신흥우, 정교 등과 각별한 관계를 만들었다.
1897년 최초의 순한글 종교신문인 <죠선크리스토인회보>을 창간하여 교회와 사회에 민족계몽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용의주도하기도 하지만 너무 지나친 활동인가? 40대에 이른 아펜젤러의 모습은 노인의 외모를 나타냈다. 1900년 아펜젤러는 1차 1891년을 이어 2차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갔고 광무황제는 아펜젤러를 초대해 노고를 치하하고 선물을 내렸다.

다시 한국으로 온 아펜젤러는 남지방회 감리사가 되었다. 1902년 6월 1일 무어감독, 스웨어러 목사 등과 서울 인근 시흥 소재 무지내 교회를 방문하던중 경부선 철도 공사를 하던 일본인 노무자가 일행을 러시아인으로 착각하여 공격을 받아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하여, 6월 첫 주일 목포에서 열릴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 못해 1주일 늦은 6월 11일에야 제물포를 떠날 수 있었다. 그는 조사 조한규와 목포가 고향인 정신여학교 학생과 함께 일본 상선을 탓으며, 짙은 안개로 다른 일본 상선과 충돌하여 침몰하며 순직하였다. 그의 생 마지막 장면은 같은 배에 탓다가 생존한 미국인 탄광 기술자 보울비에 의해 증언되어 물에 잠기면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비서와 여학생을 구출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전해진다.

1902년 6월 29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엄수된 추도예배는 각 교단의 선교사들과 목사와 평신도들, 외국 외교관들이 참석하였다.

*. 아펜젤러의 최고의 공헌 3가지 정리
1. 배재학당과 감리회신학회, 연합 종합대학교 설립시도의 열매로 연희전문 맹아로 민족 인재 양성 및 서재필, 이승만 등 요인 보호와 독립협회 창설, 독립문 건립시 기도와 배재학생들 애국가 제창 그리고 춘생문 사건 관여와 광무황제의 호위무사.
2. 독립신문, 한글 성경, 각종 문서 보급으로 대한인의 민도(문자와 언어생활 일치) 급상승하여 3.1 혁명 인자 배출
3. 독립신문에 민주공화정 보도로 대한민국 정체의 실체를 알리고 실현케 하기 위해 독립협회 지원이 자원화되어 신민회로 임정의 정체로 채택케 됨

그리고 추가로 한국인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순직하심으로 딸과 아들까지 대를 이어 선교사가 되어 진정한 한미정치군사동맹의 기초인 한미감리회종교동맹의 선구자*이며, 아들과 딸이 이를 완성하였다는 사실.
*. 아펜젤러가와 노블가는 아들과 딸이 혼인하고 대를 이어 선교사로 활약하니 인연이 끊어질 일이 없었다.
*. 감리회라는 종교는 전래 이 후 시종일관 정치를 지향하여 미국식 기독교국가를 목표로 햇다. 물론, 자신들이 다스리겟단건 아니었다. 조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조신한 행동, 대군주 폐하와 황태자 저하 탄신축하예배, 명성황후 추모예배, 춘생문 사건, 황실 시의, 황실 호위무사 = 식사담당과 야간경호 등
+. 부친 : 이 기록은 아펜젤러의 부친은 아들이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는 것이 맘에 안들어 아들의 배재학당 건축시 거듭된 도움 요청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기에 기록한다. 교단의 배신자로 느꼇단 말이며 아들은 이에 아랑곳 않고 한국 선교를 하였다는 말이다.
+. 아펜젤 : 스위스의 한 고장 이름이며 동네 이름을 사람의 성으로 썻다. 이 동네는 생긴 지형이 알(산)이 피어오르고 평평한 분지라 한다.




앨리스 아펜젤러(Alice Rebecca Apenzeller) (미감리회 여선교사로 목사안수, 이런 여성 없다)
생몰일 : 1885. 11. 9 ~ 1950. 2. 20

생애조명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으로 선교사 아펜젤러의 딸이다. 1902년 한국에서 유치원 과정을 마친후 고국에서 랭타스터 쉬픈고등학교를 비롯 웨슬리언 대학과 콜롬비아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한때 윌슨 대통령의 딸과 베타 시그마를 창설하기도 했다. 1902년 부친의 순직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앨리스는 1915년 마침내 선교사로 이화학당에 부임하여, 역사와 영어를 강의했고, 3.1 혁명의 와중엔 학생들에게 격려와 위안을 아끼지 않았고, 20년 프라이 당장이 귀국하였을 때엔 당장 서리로 봉직하였으며, 21년 월터의 후임으로 제6대 학당장에 취임하였고, 3층 7백 16평의 학당 건축을 달성하며,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여전으로 승격 초대 교장이 되었다. 다시 줄기찬 모금으로 신촌의 5만여 평 부지를 매입 1929년 고등학교와 전문학교를 완전히 분리하였으며, 31년 여성 목사안수를 받았고, 35년 새 교사를 준공하여 프라이홀로 이사하며 36년 이화 개교 50주년에 15년 이상 근속자 표창과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에게서 한국 언론계가 주는 감사장, 37년 미국 보스턴대학의 명예 교육학 박사학위, 38년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은메달 받았다. 39년 김활란에게 교장직 위임하고 명예교장이 되었다.

40년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으로 강제송환되어 하와이 선교사업에 종사중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한국인을 지도/격려하였고, 해방후 한국에 돌아와 이화여대의 명예총장이 되었으며, 이화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중 1950년 서거하셨다. 외국인 여성으론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닷지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 (배재학당장, 아버지와 누나를 이어 살자)
생몰일 : 1889 11. 6 ~ 1953. 12.

생애조명
대한제국 선포후 내어난 최초(셔우드 홀은 1893년)의 한양에서 태어난 누나를 이어 태어난 서양 아기이다. 1900년 아버지의 안식년으로 고국에 귀국하여 남아 1907년 프랭크린마샬아카데미를 비롯 프린스턴, 드루, 뉴욕 대학을 차례로 16년까지 졸업하고 17년 선교사로 내한하고 18년 노블 감리사의 딸 루스 노블과 혼인하였다. 인천지방 사업에 3년간 복무하다 1920년 선친이 창립한 배재학당 교장에 제4대로 취임하였다. 배재에 황국신민서사석을 설치하라는 왜의 압력에 알았다고 말로는 하고 실제로 안하길 3~4년 또 와서 하라고 하면 알았다 돌 사왔다. 여기다 하겠다하며, 끝내 설치 안하여 배재의 민족정신을 수호하였다. 40년 본국으로 추방당하여 1950년 6.25 전쟁으로 다시 한국으로 와 기독교세계봉사회 책임자로 기독교세계구제회에서 진실로 피난민, 고아, 과부 들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1952년 배재중고등학교 이사장 취임 활동하던중 53년 과로로 뉴욕감리병원에 입원했다가 회생하지 못하시고 서거하셨으며, 유해는 화장되어 양화진에 누나와 함께 안장되었다.
유언으로 ”나의 뼈를 나의 고국이자 사랑인 한국에 묻어달라“였다.

아버지와 누이와 함께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들과 살다가 간 고 아펜젤러 박사는 사실적인 한국사람이다.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한다. 부족하다. 아펜젤러는 1905년 이 후 끊긴 한미수호조약의 마지막 수호/완성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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