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선교보고

함창석
  • 2048
  • 2022-02-14 17:58:45
성경: 사도행전 28장 1-6절
설교: 하나님 선교

육지에 무사히 오른 후에야 우리는 그 곳이 몰타섬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토인들은 우리를 친절히 대해 주었으며 비를 맞고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불까지 피워 주었다. 그때 바울이 나무 한 아름을 불에 집어넣자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뜨거워서 기어 나와 그의 손에 달라붙었다. 섬사람들은 뱀이 바울의 손에 매달린 것을 보고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살인자이다. 그가 바다에서는 간신히 살아 나왔으나 정의의 신이 절대로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뱀을 불 속에 떨어 버리고 전혀 해를 받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이 곧 부어오르거나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알았는데 오래 기다려도 아무렇지 않자 생각을 돌려 바울을 신이라고 하였다. 그 근처에는 그 섬의 추장 보블리오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있었다. 그 추장은 우리를 따뜻이 맞아 주고 3일 동안이나 정성껏 대접해 주었다. 그때 추장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앓고 있어서 바울이 들어가 기도하고 손을 얹어 낫게 해 주었다. 그러자 그 섬의 다른 병자들도 이 소식을 듣고 와서 고침을 받았다. 그들은 여러 가지로 우리를 깍듯이 대접해 주고 떠날 때는 필요한 물건까지 배에 실어 주었다.(행 28;1-10)

멜리데는 시실리 남부 약 95㎞ 지점에 위치한 지중해상의 섬이다. 로마로 향하던 중 유라굴로를 만나 난파한 바울 일행이 상륙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섬이다. 페니키아, 카르타고의 식민지를 거쳐 2차 포에니 전쟁(B.C. 218년경) 이후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섬으로 원주민들은 카르타고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3개월을 체류하며 추장 보블리오 부친의 병을 고쳐 주기도 하였다.(가스펠서브, 멜리데, 라이프성경사전, 2006) 보불리오는 ‘평민’, ‘대중적’이란 뜻이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에 압송되어 가던 도중 좌초되어 상륙했던 멜리데 섬의 추장이다. 그는 바울 일행을 3일 간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이때, 바울은 열병을 앓고 있던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쳐 주었다. 보블리오를 멜리데 섬의 로마 최고 관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4, 5세기 성경학자인 제롬(Jerome)은 보블리오가 복음을 듣고 후에 순교를 당했다고 전한다.(가스펠서브, 보불리오, 라이프성경사전, 2006) 그레데는 미항, 라새아, 뵈닉스 세 항구가 있다. 뵈닉스는 ‘종려나무’, ‘대추야자’란 뜻이다. 지중해상의 섬 그레데 남쪽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또 다른 항구 도시인 미항에서 서쪽으로 약 65㎞ 지점에 위치했다. 오늘날의 ‘포르토 루트로’(Porto Loutro)로 추정된다. 입지적 요건이 좋아 1년 내내 안전한 항구로 알려져 있다.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탄 배는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무리한 항해를 시도하다가 유라굴로라는 돌풍을 만나 결국 파선하여 표류하다가 가까스로 멜리데 섬에 안착하게 된다(행 27:1-44).(가스펠서브, 뵈닉스, 라이프성경사전, 2006)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과는 다른 면으로 선교하게 하시고 그 결과도 우리가 예측하던 것과는 다를 수 있는 것을 살아오면서 체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도록 복을 주심으로 역사하심을 알게 되는 때가 많아 우리 스스로도 놀라게 되는 것이다.

디도서

디도서는 그레데 섬의 목회자 디도에게 주는 목회 메시지로 디모데전·후서와 함께 목회서신에 속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1차로 석방된 뒤 네 번째 선교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 디도와 함께 그레데 섬을 방문하게 된다. 짧은 방문 후 디도를 남겨 두고 그레데 섬을 떠난 바울은 그레데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지역임을 파악하고 목회자 디도에게 목회 지침들을 기록하여 전달하게 된다. 따라서 비록 짧은 서신이긴 하지만 본 서신에는 장로들의 자격, 거짓 교사를 향한 경고, 성도 양육에 필요한 지침, 성도들의 바른 대인 관계와 사회생활을 위한 조언 등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들과 성도들의 바른 생활에 관한 실천적 측면들이 잘 나타나고 있다.

본서신의 저자는 바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본서신의 내용이 이를 증거한다(1:1). 또 사상적 흐름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유사하다. 그리고 초대 교부들 역시 전통적으로 본서신을 바울 저작으로 본다. 반면, 혹자는 본서신의 교회 직분들은 2세기 때 나타난 제도이고, 본서신의 내용이 사도행전에는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어 본서신의 바울 저작설을 부인하기도 한다(Bauer, Holtzmann). 그러나 감독이나 집사, 장로 직분은 이미 1세기 때 교회에서 존재했으며, 사도행전이 바울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이 아닌 이상 빠진 내용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서신의 사상적 흐름이나 문체, 어휘 등은 아무래도 바울의 것으로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1차로 로마 감옥에서 석방된 후에 기록된 디모데전서와 분위기가 흡사하다. 또 2차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기록한 디모데후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본서신은 디모데전서를 기록한 뒤 얼마 있지 않아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대략 A.D. 64-65년경) 그 장소는 디모데전서를 기록한 곳과 동일 장소인 마게도냐 또는 아가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린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레데 섬은 그리스 반도 남단 100여㎞ 떨어진 지중해상의 큰 섬이다. 이곳은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로마 제국은 이 섬을 정복하고 이주 정책을 폈다. 자연히 일찍부터 그레데 원주민을 비롯한 헬라인, 유대인, 로마인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레데는 로마 정부에 항거하여 자주 민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사회는 항시 불안하고 무질서하며 어수선하였다. 이곳에 설립된 그레데 교회는 이런 사회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디도는 이 교회에 목회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조직과 행정에 필요한 지침들을 통해 디도가 교회를 바르게 다스리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본 서신을 가만히 살펴보면 바울의 취지는 목회 기술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부차적일 뿐 본서에는 기독교 핵심 교리들로 가득 차 있다. 세 장으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지면이지만 본 서신에는 선택, 영생,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재림, 중생, 칭의 등의 교훈들이 나타난다. 직분도 중요하고 교회를 조직하는 기술도 필요하며 교회를 다스리는 능력도 중요하나 이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교회의 본질, 곧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 사역을 분명하게 깨닫고 믿는 믿음인 것이다. 목회는 바로 이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본서신은 분명하게 교훈하는 것이다.

디도

1. 바울의 동역자- 디도는 바울의 네 서신(고후, 갈, 딤후, 딛)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디도가 누가의 친척이었다는 암시에 의하여 설명되었다. 그는 갈 2:1, 3에 나타나고 있으며,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러 간 바울과 바나바를 동행한 이방인으로 나타난다(A.D. 49년). 이 공의회에서 제기된 근본 문제는 할례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요구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바울의 견해 가운데 공의회의 매우 중요한 측면의 하나는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디도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보살핌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바울은 디도를 보내어(아마 고후 2:4; 7:8에 언급된 서신을 휴대하고) 그 곳의 어려운 상황을 처리하게 하였다. 디도는 마게도냐에 있는 바울에게 돌아와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고 보고하였다). 이 보고에 힘입어, 바울은 다시 디도를 고린도에 보내어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한 연보를 이방인 교회에서 모으게 하였는데, 그 일은 디도가 일찍이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10-13장이 후기에 쓰여 진 서신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고린도 교인들과 바울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을 것이다. 딛 1:5은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두어 그 곳에서 교회를 세우도록 하였다고 보고한다. 서신 전체는 바울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의 '참아들'이라고 부르는, 동료 사역자에 대해 사도의 높은 관심을 표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마지막에 나타나는 개인적 언급은 디도가 또 다른 사역지, 곧 달마디아로 향하여 갔다고 보고한다(딤후 4:10).

2.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Sabinus Vespasianus) 로마 황제(A.D. 79-81년) 디도(Titus)는 A.D. 67년 그의 부친 베스파니안을 동행하여 유대인 폭동을 진압하러 유대로 갔다. 부친이 황제가 되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을 때, 디도는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전쟁을 지켜보기 위해 그 곳에 남아 있었다.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디도의 개선문이로마 공장(Forum)에 세워졌고, 그 개선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노략물로 삼은 보물들에서 본뜬 아이디어로 부조를 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디도의 짧은 통치 기간은 상당히 평화로운 시기로 간주되었다. 그의 부친과는 다르게, 그는 공공 사업(치세 기간 중 완성된 콜로세움을 포함하여)에 신명을 바치고, 재판과 모반자 처형을 억제함으로써 민중과 원로원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는 또한 79년 베수비우스(Vesuvius)산의 희생제를 돕고, 80년 화재와 재앙이 엄습하였을 때 로마 사람을 도운 자로 기억 된다. 원로원은 그의 사망에 즈음하여 디도를 신격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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