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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믿음의 대가 내려가야 합니다/2월20일주/주현후제7주/강단초록.
박영규
- 2089
- 2022-02-20 00:30:22
blog.naver.com/amenpark
설교-믿음의 대가 내려가야 합니다.
성경-마태복음1장17절
오늘은 믿음의 대가 내려가야 한다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1.노아(창6장)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믿음의 대를 이었고 셈의 자손들이 영적으로 믿음의 대를 이어 아브라함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2.아브라함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가 아들 이삭 손자 야곱에게 야곱의 12아들에게 유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대가 아브라함의 씨(자손)인 예수님까지 이어져 인류구원자이신 메시야 예수님께로 믿음의 대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갔습니다. 믿음의 대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축복입니다.
3.로이스(딤후1:5)
디모데의 외할머니 로이스의 믿음이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유니게의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 유전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대가 외가로 내려간 경우입니다.
저는 외할머니의 시어머니가 기독교인으로 독실한 믿음을 가지셔서 외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예수님을 믿으셨고 아버지 어머니께서 결혼을 하셔서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셨고 감리교단의 장로가 되시고 부족한 제가 모태신앙으로 목회자가 되었고 제 자녀가 감리교단의 목사가 되었고 손자들이 예수님을 잘 믿게 되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바울 사도의 믿음의 아들(딤전1:1-2절)
바울사도는 결혼을 하지 않아 자녀가 없었지만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또 바울사도에게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녀였습니다.
5.김일성
김일성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목사로 평양 칠골교회와 창덕교회에서 시무를 하였습니다. 김일성 어머니 강반석 집사의 오빠 강진석도 장로교 목사였습니다. 김일성의 친척(외삼종조부) 강량욱 목사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을 지냈고 대를 이어 이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은 "어머니를 모시고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라"고 유언을 남겼고, 1926년 김일성은 길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손정도목사를 찾아갑니다.
정동제일교회 제6대 담임 손정도 목사는 교회를 크게 부흥하게 했는데도 독립운동을 하려고 3년 만에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국회의장)을 지낸 후, 만주 길림성에서 교회를 세우고 동포들을 돌볼 때, 평양숭실학교 2년 선배였던 김형직의 아들 김일성이 찾아오자 세례를 베풀고 친자식처럼 돌보았습니다. 김일성이 만주 군벌에 의해 감옥에 갇혔을 때 힘써 석방시킨 까닭에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손정도 목사를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 생명의 은인"이라고 적었습니다.
손정도 목사 자녀들과 김일성은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그런 김일성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하나님을 멀리하고 아들 김정일과 손자 김정은은 적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6.록펠러가의 믿음-록펠러와 어머니 엘리자 데이비슨 여사.
록펠러가의 믿음
록펠러 어머니의 십계명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아무도 원수로 맺지 말아라.
4. 예배시간에는 항상 맨 앞자리에 가서 앉아라.
5.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만들어라.
6. 주일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7. 새벽마다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8.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9. 아침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10.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록펠러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신앙생활을 잘 했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번도 빠짐없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 어머니께서 축복을 받으려면 교회를 세우라고 해서 리버사이드 교회를 세웠습니다.
록펠러가
미국 명문 시카고 대학을 설립하였고 시카고 대학에서만 52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록펠러는 백만평이 넘는 12개의 종합대학을 설립했으며, 수십 개의 연구소와 교육재단, 병원, 의료협력기구를 세우고 자연사 박물관과 문화 관련 사업 등을 하고 4,982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가 죽을 때 남긴 돈이 14억 달러로, 이를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66억 6천 9백만 달러(26,669,027,777달러)로 현재 한국 돈으로는 31조 5,361억원이나 됩니다.
록펠러는 이 돈을 그가 세운 록펠러 재단, 일반교육재단, 록펠러 의학연구소 등에 모두 기부하였는데, 지금도 그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이러한 재단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록펠러는 자신의 자서전에, "나는 모든 사람이 정직하게 돈을 벌도록 돕는 것과 되도록 모든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 나의 종교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적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한때 의사들은 록펠러가 55세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그는 98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록펠러는 "나의 어머니는 가난하게 사는 농부였지만 나에게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믿음의 유산 물려 주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물려 주신 것은 십일조 신앙이었습니다. 내 나이 8살 때 어머니는, "이제 너 혼자 주일학교에 가라."고 교회에 보내시면서 일주일 쓸 용돈 20센트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중 2센트는 너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십일조를 바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록펠러는 그 말씀에 따라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어머니의 당부를 어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록펠러는 기자에게 말하기를, "그렇게 살아 보니 내 나이 50이 되자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록펠러는 나중에는 십일조만 관리하는 직원을 40명이나 별도로 두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믿음이 록펠러에게 유전이 되었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신앙의 바른 자세 10가지를 록펠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사는 삶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출처]말씀을 따라 살면 |작성자 나이스데이
록펠러가 헌금해서 세운 리버사이드 교회는 에머슨 포비딕 이라는 목사님이 설립 계획하고 록펠러 주니어 가 경제적인 지원을 하여 1930년에 완공된 교회입니다.‘리버사이드교회(Riverside Church)는 이름처럼 뉴욕 허드슨 강변에 자리한 리버사이드 교회는 흑인 인권을 위해 힘쓴 마틴 루터킹 목사, 넬슨 만델라 등이 연설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출처] 록펠러가 세운 리버사이드 교회|작성자 하늘문
7.웨슬리 어머니 수산나
김진두 교수의 웨슬리의 뿌리 책을 읽고서
중세부터 끊이지 않고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문을 이어 내려온 웨슬리 가문은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며 하나님 나라에 충성한 선조들에게서 웨슬리 형제가 나왔다는 사실은 아주 감동적입니다.
선조들과 부모인 사무엘과 수산나를 통해 신앙의 영향을 받아 존 웨슬리 형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교육에 의한 것이라는
존 웨슬리의 말이 사실로 입증되었으며 어머니 수산나가 메도디즘의 어머니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웨슬리의 선조들은 5세기 초 영국에 정착한 색슨족이라고 하며 원래 웨슬리 선조의 고향은 영국 남부의 서섹스 주였는데 1066년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16세 이상 남자는 모두 전사하여 이 때 웨슬리가의 한 과부가 아들 딸들을 데리고 서머세트주 지방의 작은 마을로 도망하여 숨어 지내며 자녀들을 키웠는데 그 마을 이름이 웰스웨인데 이 마을 이름이 웨슬 리가 이름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1539년부터 웰슬리라고 부르다가 웨슬 리가 된 것입니다. 웨슬리의 선조들은 중세부터 존경받는 기사 가문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의 고조부 허버트 경은 경건과 학식과 덕망으로
당대에 존경 받는 인물이었으며 증조부 바톨로뮤는 국교회 성직자요 의사였으며 조부 존은 옥스퍼드를 나왔으며
성직자로 개혁자로 비국교도 목사였으며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옥스퍼드대를 나와 성직자, 신학자, 시인, 국교회 목사였으며 존 웨슬리도 옥스퍼드를 나와 국교회 성직자
신학자, 옥스퍼드 대학교수 , 메도디즘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외조부 사무엘 아네슬리는 청교도의 대부였습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아네슬리는 1669년 1월 20일 런던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첫 부인이 아기를 낳다가 죽어 두 번째 결혼하여 두 번째 부인이 2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수산나는 막내로 태어낫습니다. 수산나가 19명의 아이를 낳은 것은 어머니의 다산의 실력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아네슬리가 24명만 낳았다면 수산나도 존 웨슬리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산나는 책을 많이 읽었으며
13세에 비국교도에서 국교도가 되었으며 수산나는 외모와 내면이 모두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1688년 사무엘과 결혼하여 1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청교도 신앙으로 자녀들을 훈련 시켰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을 엄격하게 규칙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가족 기도회를 드렸으며 자녀들과
상담을 하고 편지로 자녀들과 소통하였습니다.
수산나는 자녀들에게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가르치고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성찰하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수산나는 여성 최초의 설교가라 불릴 정도로 설교를 잘 하였으며 존 웨슬리의 신성회를 위해 웨슬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편지로 격려하였습니다.
수산나는 1735년 65세에 과부가 되어 자녀들의 효도를 받으며 살다가 1742년 7월 23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742년 8월1일 존 웨슬리는 어머니 장례식을 직접 주례하며 요한 계시록 20:11-12절 말씀을 설교하였습니다. 수산나는 진정한 청교도의 딸이었으며 그리고 진정한 메도디즘의 어머니 였습니다. 출처-김진두 교수의 웨슬리의 뿌리
오늘 믿음의 대가 내려가야 하는 중요한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대가 내려가서 노아의 가족처럼 고넬료의 가족처럼 가문과 가족이 성령을 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구주 예수님을 믿으셔서 구원과 영생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박 영 규 목사:서울제자교회 원로목사, 동대문교회 협동 목사,
*한국 위안부 소녀기념교회 담임목사,
*위안부 소녀 기념교회 설립추진 위원:배성기 목사,
국회의원 김민석 집사.
*북에 억류된 선교사, 국군포로, KAL승무원,
납북어부귀환 추진운동본부 공동대표. *북한선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