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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허락된 연단 통과한 사역자.
오재영
- 2064
- 2022-02-18 22:45:44
어느 지역, 비중 있는 교회에 커다란 분쟁이 일어났다.
교인 중에 한 처녀가 만삭이 되었는데, 그 아이가 목사님의 아이라고 교회 앞에서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자녀도 없고 상처한지 얼마 안 된 독신이었던 그 목사님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려고 애를 썼지만, 목사님이 해명하기 위하여 단상에 섰을 때에는 이미 모든 교인들이 목사님의 부정(不貞)을 믿어 버린 후였다. 목사님은 무참하게 강대에서 끌어내어졌다.
드디어 그 처녀는 아이를 출산하였고,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파면을 당하고 노회에서는 면직까지 당했다. 교회는 목사님을 퇴직금도 없이 내쫓았고, 그 처녀의 집안에서는 아이까지 목사님의 손에 들려 보냈다. 그 후 목사님은 강원도에 있는 어느 탄광으로 들어가 5년이라는 긴 세월을 눈물로 기도하며, 광부로 품을 팔아 어린아이를 양육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시기를 기다렸다.
결국 5년이 되던 어느 해, 성령의 강한 역사의 부흥회를 통하여 그 처녀는 회개와 함께 전 교회 앞에서 자기가 낳은 아이가 사실은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교회내의 어느 집사의 아이라는 사실을 온 교회 앞에 눈물로 자백을 하였다. 교회는 즉시 당회를 소집하여 교인들의 대표로 이루어진 사죄단(謝罪團)을 만들어서 목사님을 찾아 나섰다.
그러고는 사죄와 함께 다시 그분을 자신들의 교회의 목사로 모셨다. 그 이후로 그 교회와 목사님에 대한 소문은 널리 지역사회까지 퍼져 존경과 함께, 평생 성자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전날의 치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목회를 하였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 목사님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도 없다.
목사의 길을 걷는 이들마다 존경을 마다할 이가 있겠는가? 그리고 마음으로야 누구나 좁은 길을 다짐한다. 그러나 그 목사님과 같은 처신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 목사께서 큰 오해와 사역의 위기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이 모르는 자신만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무장된 사람이었기에, 그 위기의 때에 훌륭하게 통과함으로 수치와 치욕을 영광으로 바꿈으로 동일한 길을 걷는 이들의 머리를 숙이게 했다.
말씀의 사역자로 책임 있게 산다는 것.
얼마 전, 금년에 은퇴하는 목사님과 통화를 했다.
언제나 중심을 잡고 후배들의 궂은 일 도맡아 하든 이가 아직 후임을 정하지 못했다고 하기에 물었더니 당신은 교회에 일임하고 마음을 비웠노라고 했다. 그동안 주변에 비중 있는 교회마다 은퇴하는 과정에서 교회와 의견의 불일치로 은혜로 지나온 목회 마무리를 잘못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1억 때문 이드라고, 그로 인하여 지난 4~50여년의 사역을 부끄럽게 마치드라고 했다.
그동안 본인은 남들과 교단에 대하여 옳다는 측면에서 많은 말을 했으니 그 말에 책임지는 면에서 교회의 뜻에 맡기겠노라고 했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의 소문을 들을 때, 특히 의인에 대한 이야기에 대하여 칭송을 하지만 그 의인은 나와 상관없이 멀리 있을 때에만 박수와 함께 칭송을 한다. 그러나 어쩌다 그 의인이 나의생활 반경에 들어오면 그동안 자신이 바르게 살지 못한 이들 일수록 그를 부담스러워 한다. 그로 인하여 위선적인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므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내용이지만 소설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의는 아무 그릇에나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그릇은 심성의 맑기와 크기를 말한다. 의를 담는 그릇은 셋이다. 하나는 인품(人稟)이요 둘은 천품(天稟)이요 셋은 신품(神稟)이다. 인품은 고을의 환자를 고치는 그릇이며 천품은 세상 사방의 환자를 고치는 그릇이요 신품은 온 세상의 만병을 바라보는 그릇이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도 있다. “그 그릇에 합당한 인품이 아니면 물려주지 않는다”는 뜻 이다.
글을 마치며...
말씀으로 영혼을 교도하는 목회자가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는다면 교인들은 그의 설교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것이다. 혹여 그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고 걸림이 있어도 설교하는 목사의 본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스스로 이해하며 듣는다. 그러나 인격과 동떨어진 말씀 사역은 결코 오래 지속할 수는 없다. 그것은 주님께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심령이 변하지 않은 채 내용만을 전달하는 이들이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