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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가족을 만나세요.
민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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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1 02:35:49
*. 국가보훈처는 제임스 홀은 독립운동에의 공헌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심사 대상에서 지금은 제외중이나 추가 공헌록을 제출하라 요청하였다. 곧, 현재, 로제타 홀과 셔우드 홀은 국가보훈처의 건국훈장 추서 대상자로써 심의중이란 뜻이다.
*. 감리교회 제위의 열독을 바란다.
&. 제임스 홀 Wiliam James Hall (용감한 사나이 홀)
한국명 : 홀 忽 또는 하락 賀樂
생몰일 : 1860. 1. 16 ~ 1894. 11. 24
생애조명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으로 1885년 퀸즈대학 의학 재학중 YMCA을 활동을 했다. 뉴욕의 벨레뷰 의과대학에서 1889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감리회 운영하는 뉴욕 빈민가 의료사업 참여중 로제타를 만나 혼인하였다. 1891년 조선 선교사로 파송되어 92년 존스와 이북지역을 순행하였고, 93년 노블과 평양 및 평안도지역을 순회전도하고, 평양 서문통에 한옥 한동을 구입하여 선교거점으로 삼고 조선인 김창식과 함께 이주하였으며, 한옥에서 교회, 병원, 학교를 동시에 시작해 이는 후일 남산현 교회, 광성소=중=고등학교, 평양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처음의 선교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돈을 빼앗으려는 자들의 행패,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 평양 감사 신덕균의 홀 조사 김창식 사형시키려는 시도, 아들 셔우드 홀. 서양 아기를 보고 싶어하는 평양인들의 성화에 10명씩 조를 짜 방으로 불러들여 5분씩 보여주기 등. 홀은 이중 김창식건은 스크랜턴 의사에게 알려 영국, 미국 공사관의 개입으로 무마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양국의 혈전장이 되어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환자들을 국적을 가리지 않고 돌보았다. 이 과로가 겹쳐 당시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아내인 로제타 홀의 정성어린 간호도 소생하지 못하고 순직하여 내조선한지 4년만에 감리회 첫 순직자가 되었다.
제임스 홀의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으며, 노블 선교사 주례로 배재학당에서 추도식이 있었다.
그는 한국인과 청일전쟁시의 중일인들에겐 의료 = 평화의 화신이다.
현종서 목사 역 하락의원사적 1897년이 1994년 에이맨 출판 간행되었다.
&&. 로제타 홀 Rojeta Sherwood Hall (본인의 살을 떼다. 어찌 이럴 수가?)
한국명 : 허을 許乙
생몰일 : 1865. 9. 19 ~ 1951. 4. 5
생애조명
미국 뉴욕 출신으로 감리회의 토번 감독과 그 부인 챈들러의 의료선교에 대한 강연에 감동 받아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빈민가의 ‘감리교 여성 자선의 집’에서 남편이 될 제임스 홀을 만나 약혼하여 의료선교사가 될 것을 약속하고 1890년 25세에 내조선하여 한양 정동의 보구여관으로 왔다. 이 병원은 일찌기 스크랜턴 의사가 하워드를 통해 조선의 여성들이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이는걸 극도로 꺼려하여 여성 의사가 진료하는 여성만의 전문병원으로 설립한 세계 최초의 병원이었다.
= 천하의 슈바이쳐도 여성만의 전문 병원은 안 만들었다. 요즘 흔하다고 그 때도 흔한게 아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했다. 몇 배의 노력과 투자가 요구된다. 의사는 아무나 할 수 없는데 더구나 여성 의사여야만 하니까
로제타의 의술은 술의 경지가 맞았다. 맹장 수술을 할 때는 죽음 일보 직전에서 살아난 환자들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엇다.
로제타는 한국으로 와 2가지의 사업 기획을 하였다. 조선인은 조선인의 손에 의해 치료받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여,
1. 간호사 양성
2. 여성 의사 양성이었다. 이는 즉시 실천에 들어가 양성된 이가 조선이 최초의 서양의학 박사인 박에스더 = 김점동이다.
이 계획은 실제 실행되어 1인만의 양성이 아니라, 1920년부터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치하고 이가 경성여자의학교로 발전하고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한편, 약혼자인 제임스 홀이 91년 조선으로 와 92년 혼인하였는데, 둘은 남편이 평양으로 파송받아 헤어져 살아야 했고, 94년에야 병원을 설립하자 자신도 근무처를 평양으로 옮겼다. 같은 해 청일전쟁이 일어나 평양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밀려드는 청일 양군을 제임스가 헌신적으로 치료하다가 본인이 말라리아에 걸려 결국 소생하지 못하고 소천하였다. 남편의 소천으로 2살난 아들과 유복자를 잉태한채 본국으로 갔다가 2년후인 1897년 남편의 유업을 잇기위해 남편의 유산과 부의금 등을 한국으로 다 보내 남편의 유업을 잇는 병원 즉, 홀기념 병원을 개원하였다. 평양으로 온 로제타는 일찌기 알렌이 광무황제로부터 받은 황실명인 광혜원을 알렌이 자기 맘대로 제중원으로 개명한 것이 맘에 안들었던지 평양에 한양의 보구여관처럼 여성 전문병원 ‘광혜여원’을 설립하였고, 이 와중에 유복녀인 마가렛을 잃어 아버지가 묻힌 양화진에 묻었다.
한편, 로제타는 처녀때에 본국에서 맹인용 점자사용법을 배운적이 있어 1897년부터 조선인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이것이 최초의 맹인교육이다. 후일 박두성이 감리교회의 <훈맹정음>을 낳게했다. 이 일은 평양맹아학교가 되었고 1908년에야 맹인교육전문인 록웰에게 인계되었다. 로제타는 평양만이 아니라,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안주, 운산, 의주 등의 깊은 산골짜기까지 안다닌 곳이 없었다. 로제타의 친절하고 뛰어난 의술로 가는 곳마다 대환영을 받았고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외교라는 외교나 복음이라는 영역도 뛰어넘는 그냥 서로 웃고 즐기는 재미난 관계로까지 격상되었다.
1917년 20여 년만에 로제타는 한양의 보구여관으로 복귀하였다. 하나, 병원의 자리는 정동에 있지 않았고, 위치가 조선의 민중들의 집결처인 동대문으로 옮겨와 있었다. 이름하여 동대문부인병원으로 이화여대 부속병원과 고려대의과 대학의 모체/산실이다.
여기에서 로제타는 놀라운 의술로 조선인들을 놀람/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는 영국인 판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기술이다.
”어느 날 화상으로 다섯 손가락이 붙은 과년한 처녀가 왔다. 혹시나 혼인을 할 때가 되어 뭐라도 해보려는 심산이었는지. 로제타가 말하길 이걸 고치려면 칼로 째고 이 처녀의 엉덩이나 넓적다리 살을 떼어내어 붙어야 된다고 하자 이건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치료방법이었다. 아니 사람의 살을 떼어 붙이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부모도 처녀도 이해를 못했다. 도무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로제타는 자신의 살을 떼어내 처녀의 붙은 손가락을 떼어내고 자신의 살을 붙여 처녀를 수술하여 온전한 손가락으로 만들었다. 이를 보거나 들은 이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인근과 경향 각지의 조선인들은 동대문의 병원으로 교회로 학교로 몰려들었다.“
마침 교회는 그렇지 않아도 초대 스크랜턴과 대부인 그리고 천하의 준재 헐버트와 벙커가 담임으로 있었고, 비상한 능력의 대한인 전도자들인 김우권, 손정도, 장락도 등의 노력과 1909년 1,000여 명이 한꺼번에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건축되어 있어서 동대문 교회는 명실상부한 민족 운동의 메이져 핵심기지로 성장해 있었다. 당시 한양 시민이 20여 만인데 2,000여 명이 이상이 예배드리는 교회였다. 그 때의 감리교인 1명이란 곧, 민족지사 1명을 뜻하고 1명이 100명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구지식과 더불어 신지식까지 보유하고 있어던 점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로제타의 의술은 민족에게 이런 메시지였다.
예수라는 어떤 사람이 우릴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돌아가셨다?
이 말은 도무지 당시 조선인들은 이해를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왜 도대체 누가 나를 위해서 죽는다는거야? 근데, 그게 나하곤 또 무슨 상관이 있는것인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조선인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로제타로 말미암아 조선인들은 그 동안의 관념을 완전히 깨트리고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눈앞에 보여진 것이다. 자신의 살을 떼어 처녀의 손을 고치라리고는 도저히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하니, 조선인들은 단순히 다른 병원갈 돈은 없는데 여기선 무료로 치료를 해주니 고마웠던 차원을 벗어나게 되었다. 이 여의사가 하는 것을 보니 이들이 말하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말이 정말 현실감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지금껏 많은 독립운동 사가들을 보았는데 왜? 어찌하여 기독교인 남성들은 혹 몰라도 여성들 특히, 유독 감리교인들이 무장투쟁에 나섰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을 아직 못봤다. 가만히 살펴보라. 1905년 이전엔 우리 민족에겐 논개 이후 의열투쟁이라는 것은 없었다. 남성들이 무리로 의병할지언정 개인 의거는 여간해선 있는 일이 아니고, 더구나 자진 순절자가 유독 유학자만이 아니라, 감리교회에서 베출되는 이유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역사학계의 풀길 없는 수수께끼였다. 거기에 여성은 더 풀수 없는 미스테리이다.
그 비밀의 문은 로제타에게 있었다.
일찌기 알렌은 광혜원=제중원으로 유료양반의료를 하였고, 스크랜턴은 정동병원, 시병원, 보구여관 등 무료민중의료를 시행해 왔었으나, 의사가 그것도 여의사가 자신의 살을 떼어 남을 시술해준다는 것은 그 동안 있었단 얘기조차도 없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가만히 생각해봐라. 내 살 떼어 남 수술 해줄 수 있는가? 피라면 혹 몰라도 말이다. 그것도 100년전에. 정말 진실로 우리 민족의 동의학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외과수술은 아니지 않나.
조선인들은 로제타의 진심을 믿었다. 온 몸으로 믿었다. 온 몸으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그 분을 말이다. 로제타는 이것을 말로 하지 않고 실제 자신의 몸으로 실천해 보이므로 아~ 나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을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을 그렇지 않아도 민영환, 이준 등의 순절이나 의병들의 죽음을 불사하는 투쟁 그리고 저~ 고래의 순장 정신의 아릿한 세포속의 기억.
로제타의 홀의 우리 민족에 대한 공로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고난이 다른 나라 딴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로구나 하는걸 깨닫게 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유료양반의료를 하던 알렌을 통해선 우리 민족은 놀라운 의술을 경험했다하더라도 그 치료를 보고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든지 하는 일을 안 일어났다. 외국인을 양대인이니 하여, 월급이나 실리를 얻기위한 이들은 물론 있었다. 이 경계는 로제타로 인하여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을 배신했던 미국의 조미수호조규 배반은 로제타로 말미암아 온전히 심정적 복원이 되었다랄까?
만일, 1905년 을사늑약과 가츠라=태프트 조약에 따라 조미관계가 파탄났으므로 조미의 감리교회 간의 관계도 파탄이 났더라면 지금의 한미동맹이 가능할까?
깨진 조미 관계는 교회로 말미암아 지켜졌다.
한편, 로제타는 1920년부터 여자의학반 조직하고 1928년 경성여자의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모체가 되게 하였으며, 1921년엔 인천기독병원을 설립했다. 1922년 로제타의 회갑이었나 보다. 이 행사는 그 동안 로제타의 삶을 찬하하는 자리였던바 로제타의 은혜를 잊지못한 맹인 여성이 가르쳐준 대로 뜨개질을 하여 손수 한복을 짜서 선물하였을 때 장내는 감동의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로제타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관장하며 아들 셔우드 홀의 해주 구세병원 및 요양원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아들은 1933년 어머니를 기리는 ‘로제타기념 예배당’을 건립하였으며, 1935년 건강이 쇠하여져 선교사직을 사임하였고, 1943년 은퇴하고 안식관에 머물던중 1951년 4월 5일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가셨다.
로제타는 화장되어 사랑하는 남편과 딸 마가렛이 묻힌 양화진에 같이 있다. 로제타가 쓴 남편의 전기는 초기 한국 선교 현황과 국제정세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라 평가된다.
&&&. 셔우드 홀 Sherwood Hall (아버지와 엄마를 이어. 크리스마스 씰)
한국명 : 하락 賀樂
생몰일 : 1893. 11. 10 ~ 1991. 4. 5
생애조명
한양에서 출생한 미국인 처음 아기로 태어난 제임스와 로제타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순직한후 한국에서 성장하였다. 서양아기를 구경하고픈 평양인들의 열망이 강하여 10명씩 조를 짜 5분씩 구경하다가 문짝이 부서지는 등에 이르자 아예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가 구경시켰는데 이 때 인원이 1,500여 명이다. 홀은 조선아이들과 자라며 조선사람처럼 행동하며, 1900~08년까지 평양외국인학교에서 배우며 자랐고, 13세 되던 1906년 하디 선교사의 남산현 교회 부흥회에서 큰 감동을 받아 ”나도 저 분처럼, 아니 우리 부모님처럼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리라“ 마음을 먹게 되었다.
1911년 18세 되던 해에 본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시작하여 캐나다 토론토 의대 흉부질환과에서 폐결핵을 전공하고 23년 졸업하였고, 같은 의대 산부인과 출신 버텀리와는 22년 혼인하였으며, 스위스 로잔의 폐결핵 치료병원으로 유명한 롤리어 병원을 둘러보았다.
1926년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와 해주 구세병원에 부임하여 해주 의창학교 교장도 겸임했다. 1928년엔 어릴적부터 꿈꾸어오던 해주 결핵 요양원을 건립하고 결핵위생학교를 설립해 교육과 병행하며, 헌당식을 해주 감리사 김유순와 세브란스 의전 학감 오긍선의 축사로 하였다.
무료로 운영되던 통에 병원과 요양원의 유지비용을 감당할 수없어 1930년 아내와 함께 본국으로 가 감리교회 선교부의 소개로 미국 크리스마스 씰의 창안자인 비셀을 만나 정보를 얻고 돌아와 총독부 당국의 협조를 얻어 조선의 민중들에게 소망을 불어넣어주려는 의도로 ‘이순신과 거북선’을 도안했으나 총독부의 반대에 숭례문으로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의 크리스마스 씰 운동은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다.
1933년엔 구세요양원 안에 어머니의 업적을 기리는 로제타기념예배당을 건축했다. 1940년엔 왜경은 셔우드를 범죄자란 누명으로 3년 징역형 또는 벌금 5천엔을 선고했다. 하여 셔우드는 병원 일을 한국인 의사 문창모(건국포장 추서자)에게 맡기고 떠났다. 1963년 대한결핵협회 금메달을 받았고, 1984년 홀 내외가 한국을 방문하여 부모님 묘소를 참배하고 큰 환영을 받았으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1991년 서거하여 양화진에 그 빛몸을 묻었다.
1978년 쓴 회고록(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1984 발행)은 홀의 가문과 한국 선교업적 및 일제 침략기 의료선교와 선교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 평안을 기원합니다.
=. 연락처 010 3082 7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