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곧 복음을 행하는 자의 복(삼일절 설교)

최세창
  • 1908
  • 2022-03-03 18:01:21
<야고보서 1:22-25>

22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1. 시작하는 말

개인의 성격이나, 그 집합체인 민족성은 쉽게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독일과 달리, 온갖 죄악이 극악하게 벌어지는 전쟁을, 그것도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전범자들을 신으로 섬기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일본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3‧1 운동을 기념하는 국경일인 삼일절에, 아파트 단지에 걸려 있는 태극기가 별로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조들이 선량한 일본인들이 아닌, 일제의 총칼에 맞서 자유 독립을 외치면서 죽어 간 세계사적 사건을 잊어 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이나 겨레나 잊어버려야 좋을 것은 잊고, 잊지 말아야 좋을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겨레에게도 잊어버려야 좋을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좋을 것은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2. 도를 행하는 자와 듣기만 하는 자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좇아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천국 시민이 되었어도, 주님 안에서 성결케 하시는 성령을 좇아 복음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한 달라지지 않습니다.
도 곧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복음을 행하는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읽고 들으며 배워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나 승리나 복에 필요한 결정적인 지식이 있어도, 실행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 결정적인 지식이 있어도, 실행하지 않으면 사랑의 결실은 맺어질 수 없습니다. 퓨즈 상자의 퓨즈가 끊어져 전기가 나가서 온 집안이 캄캄해졌을 때에 퓨즈를 갈아끼우면 된다는 지식이 있어도, 실행하지 않으면 온 집안은 환해지지 않습니다. 복음의 교훈은 물론, 그 밖의 다른 교훈도 실행하지 않으면 전혀 혜택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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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24 이하를 보면, 주 예수님이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기독교인은 마땅히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명상이나 사색이 아니라, 실행함으로써 제대로 깨닫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17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인류 구원의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시기까지 복종하신 주 예수님의 행동에 의해 성취된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안 믿는 사람들과 뒤섞여 살고, 안 믿는 사람들과 함께 직장 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느냐고 합니다. 물론, 어렵고 힘들기는 하지만, 그런 선입견을 버리고 믿음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받게 될 핍박이나 조롱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실행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실행할 힘도 지혜도 없는데 말씀하실 경우에는, 더욱 실행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서 감당할 힘과 지혜도 주시고, 사람도 붙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엄마가 세 살짜리 아이에게 밥상을 들고 가라고 하고는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습니까? 교육상 시키고는 함께 들고 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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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큼 발전한 나라의 혜택을 누리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일제 치하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선조들의 행동적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선조들의 죽음을 각오한 행동적 믿음은 3‧1 운동에서 극명해졌습니다. 3‧1 운동의 주체 세력은 종교 단체이었습니다.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 모두 33명이 민족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했습니다.
본래 이 33인은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질 예정으로 배재, 이화, 경신, 정신,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보성전문 등 각 학교 학생들에게도 비밀히 연락해 두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 모여 든, 대부분이 기독교 계통인 남녀 학생들은 33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의아히 생각했습니다.
그때, 해주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의창학교 교감이며 감리교인인 정재용 선생님이 중앙감리교회에 들렀다가 얻은 독립선언서를 들고 탑대에 올라가 낭독함으로써 온 장안에 ‘대한 독립 만세’의 열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년 동안 계속해서 전국의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특히 감리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당시의 교인들은 자유롭게 하는 율법인 복음의 진리를 좇아 주권 회복과 겨레의 자유를 위해 십자가의 신앙으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이 복음의 실행인 자유 독립 만세 운동은 결코 행하기 쉬운 상황에서 벌인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총독부의 불확실한 통계에 의하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1,542회의 시위에 2,023,000명이 참가했고, 일제의 총칼에 살해된 수는 70,509명, 부상당한 수는 15,961명, 검거된 수는 46,948명입니다. 일제가 불태워 버린 교회는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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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한 금수만도 못한 일제의 살육과 만행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조들이 폭력적 저항 운동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와 자유를 위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기 위해 목숨을 걸 각오를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오늘을 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도인 하나님의 복음을 행하고도 남아야 마땅합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도 현대 사조를 따른 종교적 죄와 도덕적 죄와 법률적 죄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존속 상해와 존속 살해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이 세상에는 사랑과 진리와 정의와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이 절실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 필요하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절실합니다.
도 곧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복음을 행하는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염려와 근심, 불안과 초조, 죽음의 공포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복음에 내포된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인 사랑과 의와 진리를 행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7을 보면,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 곧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복음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갖가지 핑계를 내세워 복음의 진리를 듣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실행할 의지도 없이 알기만 하려는 사람은, 자기기만 가운데 빠져 있는 것입니다.
유익하고 좋은 지식이 있으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 사람, 특히 도인 복음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고는 그 모양을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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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에 눈곱이 낀 것을 알면, 떼어 내야 하는데 곧 잊어버리면 거울을 안 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말씀의 거울을 통해 회개하고 씻음을 받아야 할 자기의 흠과 죄를 곧 잊어버리고 마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심판의 명령을 거역하여, 아말렉 왕 아각과 좋은 양과 소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인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책망했습니다. 계속해서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울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15:22 이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3.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합니까? 은혜와 복을 받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지켜 나갑니까? 복음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복음의 말씀이 주는 은혜와 복과 천국을 소망하기는 하면서 받지 않는 모순된 태도입니다.
나라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외친 3‧1 운동은 결단코 잊어버려서는 안 될 세계사적 사건입니다. 또한, 금수와 같은 일제에 맞서서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십자가의 복음을 구현한, 행함이 있는 믿음의 표본입니다. 당시에, 믿는 사람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한 선조들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행하여 이 시대와 이 사회를 위한 믿는 사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 동영상 :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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