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說敎者.

오재영
  • 2192
  • 2022-02-24 19:49:24
그가 설교 하던 날...

“저 양반이 지금 저것도 설교라고 하고 있나, 그러니 목회가 될 리가 있나, 설교가 저 꼴이니 교회가 이 꼴이지, 아아, 미치겠네, 길기는 왜 이렇게 길어.”

수요예배 시간, 지루하게 이어지는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다 못한 전도사 한 사람이 예배당 뒷자리구석에서 중얼거린다. 그는 지금 진행하고 있는 담임목사의 설교 원고를 자기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에게 제출한다면 낙제 점수 받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은 간 곳이 없고 온통 예화 투성이의 설교 방식과 이따금 남의 말 하듯 찔러보는 본문 해석은 신학교에서 그리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우화적인 해석 방법을 따르고 있다. 더 답답한 것은, 설교준비가 덜되었는지 자신의 원고를 들여다보며 설교하기에 여념이 없는지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한심한 반응을 살피지도 못하는 것이다.

화려한 상상.
바로 그 때, 그 신학생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설교하는 한 장면을 영화처럼 그리고 있었다.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청중들이 자신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예배당에 운집해있고, 자신은 붉은 카펫이 고급스럽게 깔린 강단에 올라 눈부시도록 밝은 조명 아래서 검은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모습으로... 자신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설교를 하고, 예배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숨을 죽인 채 설교하는 자신을 주목하며 “아아, 인간의 입술에서 어찌 저런 훌륭한 설교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여기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구나.”라는 존경의 눈으로 감격하는 광경이다.

그가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중에, “자, 우리 다 함께 기도합시다.” 라는 담임목사의 음성과 함께 교인들이 모두 고개를 숙인다. 설교시간에는 고함을 쳐도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던 이들이 설교가 끝났음을 알리는 이 작은 음성은 언제나 잘 알아듣는 것 같았다. 이어 기도의 시작과 함께 이 신학생의 상상도 끝이 났다.

그가 설교하던 날.
몇 주 후 이 신학생은 뛸 듯이 기뻐하며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랑을 한다. 담임목사로부터 돌아오는 수요예배의 설교를 부탁받은 것이다. 그는 곧바로 다음날부터 그동안 자신이 상상의 나래를 펴며 줄곧 꿈꾸어 왔던 훌륭한 설교를 하기 위하여 열심히 준비를 한다. 처음에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설교를 할 요량으로 이런 저런 주석도 살피고 최신 예화집도 구해서 설교 문을 작성해 보았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바라던 만큼의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가장 저명한 설교자의 설교집중에서 자신이 가장 크게 감명을 받은 설교 한편을 기초로 설교를 작성하기로 하였다.

워낙 세계적인 분의 설교였지만, 그는 우리 상황에 맞도록 예화를 바꾸고 문장까지도 깔끔하게 다듬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훌륭한 설교 문에 걸맞도록 강단에서 보여 줄 적절한 몸동작까지 설교 원고 옆 부분에 표시까지 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설교할 때 입을 양복과 그 분위기에 맞을 것이라 생각되는 넥타이까지 골라 놓았다. 그리고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의 설교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드디어 만반의 준비를 한 그 날이 왔다. 그는 정성껏 타이핑된 설교 원고를 들고 강단에 섰다. 강단 아래에는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많은 인파는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설교하는 이 신학생을 흥분 시키기에는 충분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담당했던 아동부 어린아이들에게 설교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야릇한 흥분에 깃들이는 긴장감도 싫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긴장 가운데 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동안 담임목사는 어려워서인지 손도 못 대던 로마서의 한 구절을 본문으로 잡은 것부터가 자기를 그와 차별화 시키고 있다고 믿으면서……,

깨어진 환상.
설교를 이어가는 동안, 그는 자신이 아니라 그 위대한 설교자가 설교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영어로 된 주석에서 어렵게 읽은 원어에 대한 해설과 함께 본문 해석에 얽힌 신학적인 문제들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부분은 그 위대한 설교자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새로운 관찰이라는 사실에 스스로를 대견해 하며 더욱 열렬히 설교를 하였다. 이 세상의 철학과 교만한 사상들을 질타할 때는 어느 영향력 있는 설교자들의 몸짓을 기억하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젊은 설교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시간은 예상과 다르게 빠르게 흘러 교인 중 하나 둘, 시계를 보기 시작하는데, 자신은 아직 설교의 절반도 가지 못한 상태로 개중에는 지루한 듯이 목덜미를 만지면서 목 운동을 하는 앞자리에 앉은 교인들이 부담스러워지면서 설교의 맥(脈)을 놓치기 시작을 한다. 그는 아직도 여러 장이 남은 설교 원고를 부지런히 넘기면서, 평소보다 20여 분 늦게 설교를 마쳤다.

가까스로 설교를 마친 이 젊은 설교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는 자기가 설교한 그 날 수요예배가 평소 담임목사가 설교한 다른 때 보다 뭔가 좀 달랐다고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인들은 자신의 설교를 더 지루해 하는 것 같았다. 교인들이 모두 돌아가고 텅 빈 교회당을 걸어 나오면서 이 가련한 설교자는 혼자 중얼 거린다. “어떻게 준비한 설교인데, 이게 얼마나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 원고인데, 이 세계적인 설교에 동네적인 반응도 안 보이다니᠁ , 에이, 이 사람들은 뭘 몰라도 한참 몰라.”

설교는 說敎者다.
설교자를 생각할 때마다 설교자가 행하는 말씀사역은 커다란 저수지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거대한 저수지가 있으면, 그 저수지의 영향을 받는 그 아래의 드넓은 들판은 그 어떠한 가뭄이 와도 염려하가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언제나 때가 되어 수문만 열어주면 마른 개울마다 커다란 물길이 한걸음에 달음질하여 온 들판을 물댄 동산처럼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설교자는 영적으로 원숙해져 갈수록 설교자와 설교가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가 비록 세계적인 설교원고를 가졌다 할지라도(그리될 리도 없으나)그 설교자의 사람 됨됨이 그 설교에 따르지 못하면 그 설교는 동네적인(?)설교도 될 수가 없다.

그가 바른 말씀의 사역자로서 설교 사역에서 느끼는 결정적 변수는 우선 설교자 자신의 영적인 변화임을 깨닫게 된다. 설교자의 영적 변화와 거룩한 인격의 성숙, 모든 생활에 있어서 성화의 진전에 따라 더 높은 수준의 설교가 가능한 비결임을 깨닫게 된다. 물론 그에 따라 철저한 신학적인 지식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이해가 필요하고 설교하고자하는 본문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다른 해석자들의 학문적인 결과와 협의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그는 지성적인 면에 더욱 성숙해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지적인 면에서 진보 없는 설교는 그 수준의 진보가 더 이상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사실이 설교자들을 더욱 겸손하게 한다. 설교자에게 학문적인 진보는 단지 남다른 열심과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그러나 설교의 사역에는 인간의 심성과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영적(靈的)인 영역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을 떠난 하나님의 영역이며 성령님의 영역이다. 그러하기에 거룩한 인격과 마음을 다하여 자신의 전 삶을 걸고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처럼 설교는 곧 說敎者다.(김남준,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 인용과 각색).

글을 마치며...
얼마 전에 감독으로 연회를 섬기겠다고 하는 이와 차(茶)나누면서 물은 적이 있다. 그에게 추대가 아닌 여러 명이 경쟁을 하는 중에 만약 본인이 유력한 입장에서 마지막 2%가 부족하다 할 때. 결과를 주님 뜻으로 알고 그대로 진행할 것인지, 아니면 자리(국위원등)를 걸고 정치를 할 것인지, 봉투 몇 십장을 만들어 나눌 것인지᠁ , 그는 주님 뜻에 맡기겠다고 했고, 유력한 입장이었지만 끝내는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며 감독되는 길을 포기 했다.

감독(監督),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것이 낫다. 그러나 되고나서도 올바로 감당하지 못할 직(職)이라면 차라리 맡지 않음이 본인이나 공동체를 위해서도 유익하다. 알만 한 사람 모두 아는데, 패거리지어 거금을 건네고 당선된 그가 연회의 예배자리에서 목사는 먼저 정직(正直)해야 한다고 했다. 분명히 말하건대 그도 회개(悔改)하지 않으면 그 성직(聖職)더럽힌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성직의 권위는 자주색가운과 자리(職)에 의해 좌우되는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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