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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이주민 火田移住民
함창석
- 1831
- 2022-03-06 00:27:05
火田移住民
함창석
궁핍한 주민들이 임자 없는 산에 불 질러 밭으로 사용한 데서 유래라
불 질러 태운 풀 나무 재가 거름되므로 서속 콩팥 등을 파종하였으니
후에 거름을 주지 않으므로 몇 년 후가 되면 지력상실로 이동 했으나
토양 보존 중요 해 산림녹화 정책 시행 되며 전면 금지가 이루어졌고
산업화 이루며 신흥 도시로 이주 한 것이 수도권 지역은 아닌지 몰라
내 고향 사람들은 거의 집단으로 이주 하여 지금 안산시에 살고 있다
그 가난과 싸워야 했던 분은 공장서 일하며 자녀를 잘 기르고 가셨지
그 시절 내 고향 추억이 새로운 건 그분들의 삶이 드라마틱한 것이다
Sandol Method
국유림이나 사유림을 불문하고 농경지조성법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의로 개간하여 농경지로 사용하는 토지를 화전이라 한다. 화전(火田)과 산전(山田)으로 나누는데, 화전은 또다시 부덱이와 통상적으로 일컬어지는 화전으로 구분된다. 부덱이는 산간오지의 원시림에서 동남향을 택해, 이왕이면 침엽수보다는 활엽수, 곧 낙엽이 많은 곳에 불을 놓아 괭이만으로 종자를 뿌려 수확을 거두는 당년치기의 경작법으로 산림의 황폐가 가장 심한 형태이다. 통상 화전은 2년 이상 경작하고 지력이 약해지면 농사를 멈추고 새로운 곳에 불을 놓아 경작지를 만들고, 5~6년 뒤에 다시 지력이 회복된 휴경지로 옮겨와 경작한다. 산전은 화전이라도 고정 경작지로서 등기를 필한 것을 말한다. 화전의 발생 시기나 유래는 확실치 않은데, 문헌상으로는 두만강변의 여진족들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화전을 경작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 효종 때 산지 개간을 인정한 사실이 있으며, 이후 영조 때 화전을 육등전(六等田)이라 해서 최하급의 세금을 부과한 기록이 있다. 일제 시기와 해방 뒤의 혼란기에 화전이 급격히 늘었으나 행정 체계가 확립됨에 따라 점차 그 수가 고정되었다. 강원도의 화전은 주로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서 내륙의 화천, 춘성, 인제, 홍천, 횡성, 영월, 평창에 분포했다. 1974년 삼척군 도계읍 신리 화전마을이 민속자료 보호구로 지정되었다.(김효형 외 3인, 화전과 화전민, 답사여행의 길잡이, 한국문화유산답사회, 1994)
화전민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화전 농사를 짓는 사람, 즉 화전은 원시적 농경법으로 초복에 불을 지르고 그 자리를 갈아 농사짓는 밭을 말하고 그 화전을 가꾸는 사람을 화전민이라고 부른다고 적혀 있다. 화전민은 주로 조와 수수, 메밀, 감자, 콩 따위를 심는데 거름도 주지 않고 김매기도 하지 않으며 몇 년 동안 농사를 계속하다가 땅기운이 떨어지면 옮겨 다니며 생활한다고 한다. 화전민들은 외딴 산 밑으로 스며들어 나무를 잘라 통나무집(귀틀집)을 짓고 지붕은 억새나 굴피나무 껍질을 벗겨 덮어 마무리했다. 추운 겨울 동안은 눈이 많이 내려 산속에 갇혀 살다가 봄이 되면 다시 산불을 놓아 화전을 일궈 근근이 살아가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에 쫓긴 피난민이거나 가난에 쪼들린 농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더러는 정감록과 같은 종교에 현혹되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세속과 인연을 끊고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화전민들은 좋은 자리를 잡으면 한곳에서 대물림으로 살기도 했는데 그들은 산을 지키는 감시원(산감)들의 눈을 피해 화전밭을 일굴 자리를 미리 눈여겨보았다가 싸리나무로 만든 다래키속에 마른 쇠똥과 마른 솔방울을 함께 넣어 화전 예정지 나무 가쟁이에 다래키를 걸어 놓는다. 쇠똥에 불을 붙이면 쇠똥불이 서서히 타 들어가고 성냥골에 불을 붙이면 솔방울에 불이 붙어 다래키도 타버리고 불붙은 솔방울이 밑으로 굴러 산불이 일어나게 된다. 산불이 진화된 얼마 뒤 땅을 파서 곡식 씨앗을 묻으면 그곳이 화전이 되는 것이다. 화전민들 대부분이 깊은 산 속 독립가옥에서 외롭게 살아 가족 간의 사랑이 넘치고. 특히 부부 정이 다정하고 낯선 사람이라도 찾아주면 반가워했다. 필자가 소백산맥 이곳저곳을 취재하면서 산 깊은 마을로 찾아가면 화전민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화전민 한사람 한 사람 인생 역경을 들어 보면 대부분이 드라마 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배짱 좋은 머슴이 주인집 딸을 납치하여 화전민이 됐고 범법자로 쫓기다 들어온 사람, 과부댁과 눈 맞아 가족들을 버린 사람,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홀아비 화전민도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부지런해 험한 산길을 헤쳐 약초를 캐고 토종벌도 치고 그것을 장에 갔다 팔아 필요한 돈을 마련했고 소금을 제외한 모든 먹거리는 자급자족했다. 의복은 남자들은 군복을 염색해 입었고 여자들은 광복으로 손바느질 옷을 많이 해 입어 특별히 돈 들어갈 일이 없었다. 화전민의 역사는 아마도 농경의 시작과 맞물릴 것이고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과중한 세금에 차별 심한 신분제도의 압박으로 산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처음엔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살다가 마을을 이루고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살던 모습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화전민의 원조 격일 것이다.(충북인 뉴스)
국토의 황폐를 방지하고 산림자원을 조성하고 화전민의 생활안정을 위한 사업으로 1966년 화전정리에 관한 법률, 1975년 화전정리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실시하였다. 강원도를 비롯하여 경상도, 전라도 등 산간지역에 살았던 화전민들은 대거 산업화가 되며 공장지대가 된 안산을 비롯한 수도권지역의 공단으로 이주되게 되었다. 오늘날 경기도는 1500만을 육박하는 인구가 모여 살게 된 것이다. 안산, 부평, 부천, 시흥, 안양, 용인, 성남, 하남, 광주, 고양, 일산 등 도시집중현상이 발생하였다. 공업, 산업화정책과 산림녹화, 화전정리는 맞물려 돌아갔던 것이다.
1960년대 5.16 후 군 미필자와 감형 수들로 조직된 태기산 국토개발단원이 조성하였던 계단식 밭들은 모두 사라지고 태기분교장은 터만 남아 기념관으로 남았다. 당시 노동자 임금으로 지급되던 밀가루가 우리 고향까지 밀려와 내 어린 시절에는 온 동네가 국수를 참 많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