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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분별의 척도(고전 12:1-3)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2477
- 2022-03-14 19:43:43
바울은 이 부분을 【1】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아니하노니로 시작하고 있다.
형제들아는 1:10의 주석을 보라.
신령한 것(τών πνευματικών)은 남성으로 취급하여 ‘신령한 사람들’ 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로 볼 수 있고, 중성으로 취급하여 ‘신령한 것들’ 또는 ‘성령의 은사들’로도 볼 수 있다. 어느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할 뚜렷한 근거는 없다. 다행한 것은 어느 쪽을 택하나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에 대하여는](7:1의 주석을 보라.)은 12장부터 14장까지를 한 부분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3:16의 주석을 보라. 참조: 롬 1:13, 11:25, 살전 4:13 등)라고 한 것은, 그가 전체 문제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적 도덕관을 가졌으나 불완전했고, 구약성경에는 능숙치 못했으며, 신약성경은 아직도 완전히 기록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무식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Whedon, op. cit., p. 91).①
그들은 여러 가지의 신비로운 현상을 나타내는 우상 숭배의 배경 아래 있었으므로, 신령한 은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었다. 따라서, 바울의 간절한 소원은 “그들의 각양 은사는 다 한 성령 곧 완전히 통일을 이루신 분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명심시켜, 그들이 과거에 신봉한 다신교의 색채들을 그들의 심중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이었다(Whedon, op. cit., p. 91).②
“신령한 은사에 관한 균형 상실 때문에 빚어진 불화와 당파심으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또한 영적 전멸 상태에 이르게까지 되었다”(D. S. Metz). 바울은 바로 이 해결하기 어려운 심각한 문제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물이었다. 헤이스(Hayes)는 “바울은 이 교회와 자기가 세운 모든 교회를 광신주의와 해체되는 일로부터 구출할 수 있었고, 그 교회들로부터 세계를 이끌어 나갈 기독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③라고 논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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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현재의 교만을 깨뜨리고, 장차 있을 법한 변론을 앞지르기 위해”(D. S. Metz)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는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즉 “이교도이었을 때”(F. W. Grosheide, G. D. Fee, L. Morris)의 상태에 대해 【2】[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즉 이방인이었을 때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곧 이교도이었을 때’를 뜻하는 동시에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유대인이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는 5:10의 주석을 보라.
[말 못하는 우상]이란 우상에 대한 구약성경의 표현이었다(왕상 18:26, 29, 시 115:5, 135:16, 사 46:7, 합 2:18, 19, 지혜서 13:17-19, 바룩 6:8 등). 이 표현은 우상의 생명 없음과 우상 숭배의 헛됨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라 할 수 있다. 벤겔(J. A. Bengel)은 “너희 소경들은 그 벙어리에게로 갔고, 너희 벙어리들은 그 소경에게로 갔도다.”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고 있다.
바울은 우상 및 우상 숭배 자체는 헛것이라고 하지만, 그 배후에 작용하는 사단과 그 졸개들인 귀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그들의 이전 종교 행위를 가리켜,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하는 것이다. 로벋슨과 플루머(A. Robertson and A. Plummer)는 “지각없이, 그리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끄는 대로 이끌려 갔다.”라고 하였다.
핫지(C. Hodge)와 모리스(L. Morris)는 이 동사(아파고메노이, ἀπαγόμενοι)는 종종 ‘심판으로 끌려가는’, 또는 ‘감옥으로 끌려가는’, 또는 ‘처형받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 사용되곤 한다(참조: 막 14:44, 53, 15:16, 요 18:13, 막 27:21)고 하였다. 특히, 모리스(L. Morris)는 “이교도들은 스스로의 지력이 충분히 시인한 신들을 자유롭게 추종하는 사람들로가 아니라, 강제 당한 사람들로, 속수무책인 사람들로, 보다 좋은 것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들로 묘사된다.”라고 하였다. 실상 다른 이방인들과 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생명이 없고 말하지 못하는 많은 신들에 관해서 토론했으나, 살아 계시고 말씀하시는 분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Whedon, op. cit., p. 91).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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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교도였을 때에 끌려 들어간 황홀한 종교 경험(신비 체험)처럼, 현재에 신령한 것으로 여겨 종교적 의미나 윤리적 의미가 없는 황홀 경험에 전념하게 되는 일은 종전의 경우처럼, 무익한 결과를 초래할 뿐 아니라 교회의 혼란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점을 인식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표준에 대해,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표준에 대한 소극적 진술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이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성령이 아닌 다른 영들에 의해서 황홀한 말을 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살후 2:2, 요일 4:1).⑤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의 [저주할 자라]는 아나테마(ἀνάθεμα)이며, “히브리어로는 케렘(cherem)인데 인간의 소유나 용도에서 제외된 것,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단절된 어떤 것과 같은 개념이다”(R. C. H. Lenski). 흠정 역 성경(AV)에는 ‘저주받은’, ‘저주받은 것’, ‘빛의 왕국으로부터의 파문’ 등의 뜻으로 번역되었다. 또, 구약성경의 번역자들은 멸망을 위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지시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바쳐졌던 것은 구원될 수 없었고, 산 것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다(레 27:28, 29).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파멸에 돌려진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따라서 그 사람이나 사물이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이라는 부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 말은, 저주를 받아 파멸에 빠져야 될 어떤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사상은 신약성경의 한결같이 통일된 의미이다(참조: 16:22, 롬 9:3)”(C. Ho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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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대항한 모든 말들의 요약”(F. W. Grosheide)인 ‘예수는 저주받아라!’ 하고 외치면서, 자기가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는 위험한 사고에 빠질 수 있는 경우들이 과연 어떤 경우인가에 대해 바레트(C. K. Barrett)는 중요한 몇 가지 제안들을 소개하며 평가하고 있다.
첫째, 심문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약하기 때문에 설득을 당하여 “예수는 저주받아라.”라고 말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참조: Pliny, Epistles, x. 96: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리 강요를 받아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또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다른 신들을 내세워 그리스도를 저주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만일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런 자들은 풀어 주는 것이 나는 옳다고 생각하였다.”).⑥ 또한, 그들은 뒤이어 자신들의 말(그들을 계속해서 자유롭게 해 주었고, 그리스도인임을 비밀로 해 준 말)이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합리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것은 조리 있는 설명이긴 하나, 현재의 문맥에는 이런 설명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으며, 이것은 후대의 상황들을 전제한 설명이다.
둘째, 문제의 법정은 회당의 법정일 수 있다. 아니면 회당에서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점을 부인하는 일-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이 행해졌음을 지시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제안은 아나테마(ἀνάθεμα)가 ‘저주’라는 뜻으로 쓰인 유대교적 배경으로 뒷받침된다(이 점은 특히 Schlatter가 강조했는데, 그는 신명기 7:26, Nedarim V. 4, 또한 사도행전 18:6 등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이런 제안은 바울이 (추측컨대) 영감을 받은 말의 표준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정당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다.
셋째, 바울은 단지 ‘예수는 저주받아라’라는 말을 ‘예수는 주이시다’라는 말의 대응어로 말한 것일 수 있다. 이 두 말은 양극을 이루는 말이었고, 둘 중 어느 하나만이 참된 영감을 지시하는 말일 수 있었다. 이런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순전히 가설적이고 인위적인 가능성을 제시하려 했는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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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바울이 2절에서 상기시킨 몰아 지경의 이교 예배는 ‘예수는 저주받아라’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한 배경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여기서 바울은 이교도가 예수를 부인한 것이 (이것이 그 당시에 명백한 사실이 한) 잘못이었다고 말하는 데(비록 그가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하였긴 하지만) 관심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집회 내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적 영감을 판단할 수 있는 표준들을 제공하려고 했다.
다섯째, 다음의 알로의 제안은 옳은 것 같다. 바울은 황홀경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게 임했다고 느꼈던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을 뿌리치려 할 때, 실비아가 자신과 카산드라-에쉴루스의 아가멤논(Agamemnon)에서 아폴로를 저주한 사람-를 사로잡았던 영감을 뿌리쳤을 때, 거품을 내뿜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뿌리치려고 했던 그들의 외침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하나 보다 진전된 상황을 요한일서 4:1-3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서는 비슷한 저주가 육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간적인 삶에 대한 가현론적 부인으로 바뀌어졌다.
첫째와 둘째 내용은 바레트(C. K. Barrett)의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교회에 대한 핍박이 주로 유대인들에 의해서, 그리고 이교도들에 의해서도 행해졌다는 점을 보아 그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일차적 취지가 교회 안의 은사 문제를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일반적인 교훈으로 삼고 있음은 다음의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예수는 저주받아라’라고 선언할 경우를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유대인들이 했을 것이다. 회당의 기도자들은 규칙적으로 모든 이교도와 배교자들에 대한 저주를 포함하였다. 물론, 예수님도 그 대상이었다. 더욱이, 바울이 잘 아는 바와 같이(갈 3:13), 유대의 율법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교인들이 예배하는 이 이교적이며 범죄자인 예수께 대한 유대인들의 저주 선언을 듣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⑦.
둘째,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이 저주를 선언케 하거나, 모든 유대교 예배로부터의 출교라는 고통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행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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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바울이 이 서신을 썼던 특별한 시기에 사실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중에 가혹한 핍박의 때에 그리스도인들의 핍박자들로부터 그리스도를 저주하도록 강요당하거나, 또는 죽음을 강요당했다.
넷째, 교회 안에서도 반 미친 열광주의자들이 그와 같이 외쳤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저주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영인 마귀의 역사이다(요일 4:3).
바울은 반대의 경우에 대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주](쿠리온, κύριον)는 1:2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단순한 내적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 확신을 입으로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 고백을 들어 알게끔 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야 그 고백이 아무런 문제가 아니지만, 조롱하거나 핍박하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대중 앞에서나 재판정에서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선언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여 고백하는 것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예수님을 하나의 역사적 인물로서, 또는 도덕적 및 종교적 천재로 시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구세주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한다는 뜻이다(마 16:16, 요 1:1). 셋째로, 그것은 자신과 자신의 전 생애의 주인으로 인정하여 절대 복종하겠다는 고백의 의미를 갖는다. 넷째로, 그것은 초대 교회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요 복음의 핵심이다(8:5, 6, 행 2:36, 롬 10:9, 고후 4:5, 빌 2:11, 히 10:35, 계 3:5).
그러한 놀라운 신앙고백은 인간의 명상이나 사색 또는 감정 등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에 의해 되는 것이다. 핫지(C. Hodge)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영에 의해 교화되지 않으면, 예수님이 육체 안에 현현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진실로 믿을 수 없고,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을 때, 우리의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정확한 의미이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참조: 엡 2:8). 이와 동일한 사실이 사도 요한에 의해서도 언급되고 있다. 요일 4:2, 3에는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일 4:15에는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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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in D. S. Metz.
2) 상동.
3) 상동.
4) in D. S. Metz.
5) 참조: F. W. Grosheide, C. K. Barrett.
6) in C. K. Barrett.
7) J. A. Bengel, A. Robertson and A. Plummer, L. Morris 등은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더 많이 사용됐을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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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고린도전서(서울: 글벗사, 2001, 2판 1쇄), pp. 339-346.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들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 설교집 34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