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복음에 합당하게 살자의 성경 본문 빌 1:27-30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2680
  • 2022-03-20 01:15:23
바울은 앞에서 자신이 석방되어 빌립보 교인들과 거하면서, 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라는 개인적 확신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황제 앞에서 받을 판결은 결말나지 않은 채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로 가게 되는 것을 계기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통해 전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의 [생활하라]는 폴리튜에스테(πολιτεύεσθε)로서 ‘시민권을 행하는 것’, ‘시민으로서 처신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행 23:1). 이 말은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아주 인상 깊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이었다. 로마의 식민지에는 여러 가지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았다. 식민지 주민들의 이름은 로마 족속의 명부에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세금과 헌납금을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토지 소유권과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에는 자치권이 부여되었으므로 자체 내의 행정관과 원로원이 다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의 주민들은 로마어를 사용하고, 로마 복장을 했으며, 또한 그 식민지의 장관들은 스스로 로마의 칭호(집정관, 그 밑에서 일하는 관리는 릭토르)를 사용하면서 로마의 법과 의식을 똑같이 준수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로마의 식민지란 로마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 로마의 축소판 곧 소로마라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로마의 식민지라는 영예와는 비교될 수 없는 천국 식민지라는 영예를 부여받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천국 시민으로서(3:20) 처신하라고 강조하며(모논, μόνον) 권면하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 곧 천국 시민이 준행해야 할 법도이다.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교회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상관없이, 그들이 한결같이 그렇게 생활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바라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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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으로](ἐν ἑνὶ πνεύματι)는 ‘한 영으로’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 영에 대해 성령이라는 설①과 성령의 작용에 의한 성도나 공동체의 기질 또는 성향이라는 설(C. R. Erdman, J. H. Michael)이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②의 견해인 인간의 영으로 보아야 한다.
{이 영은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의미하며(고전 2:11, 롬 8:9),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구속받은 인간을 지시하는 것이다.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 하여(고전 6:17), 그리스도인의 내적 인간의 존재 형식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존재 형식과 같음을 보여 주고 있다”(C. H. Dodd). 이러한 존재 형식을 갖는 인간은 영으로 성령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며(롬 8:16),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고전 14:2), 영으로 기도하며(고전 14:14), 영으로 찬미한다(고전 14:15). 또한, 영이란 사고하고(롬 8:6), 인식하며(고전 2:11, 롬 8:16), 의지하고(롬 8:4-5), 판단하는 기능이 있다(고전 5:3). “영의 지배를 받는 영의 도구가 곧 마음인 것이다”(C. R. Erdman, 이상근)}(엡 4:23의 주석).
그러므로 [일심으로 ‘서서]’(스테케테, στήκετε)란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적군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군인들처럼 굳세게 서라는 뜻이다.
[한 뜻으로]는 문자적으로 ‘한 영혼(혼)으로’(프쉬케 ψυχῇ)이다. {프쉬케는 구약성경에서는 대체로 개인의 생명 원리를 지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특별하게 정서적 행위성을 의미하고, 가끔 인격적 대명사로 대치된다(H. A. A. Kennedy).
불트만(R. Bultmann)은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프쉬케(ψυχή)는 ‘생명력’ 혹은 ‘생명 자체’를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그는 “너희가 ‘일심으로’(ἐν ἑνὶ πνεύματι) 서서 ‘한 뜻으로’(μι ψυχῇ)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빌 1:27)의 ‘일심으로’(ἐν ἑνὶ πνεύματι)와 ‘한 뜻으로’(μι ψυχῇ)는 같은 의미라고 한다. 즉, 의지의 같은 태도나 같은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능적으로는 같을지 모르나 존재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바울은 프뉴마(πνεύμα)와 프쉬케(ψυχή)를 대조하여 사용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첫 아담은 산 ‘영’(프쉬케, ψυχή)이 되었다고 한 반면에, 둘째 아담은 살려 주는 ‘영’(프뉴마, πνεύμα)이 되었다고 한다. 또, 첫 아담은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흙에 속한 자인 반면에, 둘째 아담은 신령한 자요 하늘에 속한 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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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아담은 하늘에 속한 자들과 흙에 속한 자들과 같다(고전 15:45-49). 즉, 프뉴마(πνεύμα)는 구속받은 자요 성령을 좇아 신령한 삶을 사는 영적(신령한) 인간을 의미하는 반면에, 프쉬케(ψυχή)는 자연적이며 지상적인 삶을 사는 자연인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단순히 동물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 삶 곧 초자연적 삶과 대조적인 인간의 지정의에 따른 세상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그(C. Bigg)는 “베드로는 헬라 철학과 상식적인 헬라어 어법과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처럼, 인간의 총체적인 내적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다. 베드로는 결코 바울처럼 프쉬케(ψυχή)를 프뉴마(πνεύμα)나 누스(νούς)와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바울 역시 프쉬케(ψυχή)를 인간의 총체적인 내적 본성을 뜻하는 것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프쉬케(ψυχή)를 누스(νούς)와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고펠트(L. Goppelt)는 더욱 자세하게 “프쉬케(ψυχή)는 베드로전서에 비교적 자주 곧 여섯 번 나타난다. 그 말은 인간의 자아나 인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1:9, 3:20, 4:19),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중심을 의미하기도 한다(1:22, 2:11, 25). 베드로전서에서는 이 인간론적 전문 용어를 바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식으로 사용한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바울 또한 프쉬케(ψυχή)룰 자연인 곧 인간 자아라는 뜻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결국 프쉬케(ψυχή)의 용법은, 바울이 프뉴마(πνεύμα)와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경우 외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벧전 1:9의 주석). 물론, 요한 역시 다를 바 없다.
[복음(1:5의 주석을 보라.)의 신앙](πίστειτού εὐαγγελίου)은 이곳에만 나타나는 구로서, 복음에 속한 믿음(M. R. Vincent, R. C. H. Lenski) 또는 복음을 들음으로써 생긴 신앙을 뜻한다(롬 10:17).
[신앙](피스테이, πίστει)에 대해 홍현설 박사는 “신조나 신앙 고백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적 행위에 대한 신뢰와 확고 또는 심리학적 의미의 내적 신념이 아니다.”③라고 말한 다음에, “새로운 창조의 주도자이시며, 세계의 화해자이시며, 모든 정의의 근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에 결코 인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즉 신의 믿음직함(信實性)에 대한 우리의 신뢰, 이것이 바로 구원의 방편이 되는 신앙이다.”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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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K. Barth)는 “신앙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근거지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사고, 의지, 감정, 행위 등 삶 전체에 관계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가 거기에 매어달리는 한 가닥의 끈이며, 그것으로 우리가 영양을 받는 유일한 음식이다.”⑤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 곧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행위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엡 2:8, 마 16:17) 성령의 은사(고전 12:9)로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인간의 전 인격적인 응답이다.
전 인격적인 응답이란 인간의 삶, 즉 사고와 의지와 감정 및 행위의 전체가 하나님께 대해 복종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며 사는 생활이다. 이러한 관계를 맺는 “믿음의 결단은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재 은혜에 근거된 것이므로”(J. Wesley)⑥ 인간이 믿는 것은 인간의 공로일 수 없고, 반면에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얻기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방편이기도 하다(벧전 1:5).
결국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굳세게 서서, 같은 애정과 의지로 복음을 믿는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쓰인 ‘협력하다’라는 단순 동사 아틀레인(ἀθλείν)은 시합에서 경쟁하는 것을 뜻하며,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도 의미하였다”(M. R. Vincent). 따라서 협력하는 것(συναθλούντες)은 함께 연합하여 영적 대적과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한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빌립보 교회의 내분(4:1, 2)과 그에 대한 대책을 찾아볼 수가 있다. 오늘의 교회 역시 내분을 막는 가장 좋은 길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가 되어 조직이나 당파 또는 교리나 교파가 아니라,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연합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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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적의 공격에 대해서, 【28】[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대적하는 자]란 유대인(A. M. Hunter, J. A. Knight)이나 이교도⑦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자를 포함하는 것⑧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두려워하지]는 프튀로메노이(πτυρόμενοι)로서 깜짝 놀라 길길이 뛰는 말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서 듣고자 한 것은 복음을 반대하여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에 대한 대적 행위에 대해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멸망]이란 아폴레이아스(ἀπωλείας)로서 ‘영생의 상실’, ‘영원한 파멸’, ‘영원한 형벌’ 등을 의미하며(마 7:13, 롬 9:22, 벧후 2:1, 3, 요 17:12 등), 빙거는 바울 서신에만 보이는 법률 용어인 엔데익시스(ἔνδειξις)로서(롬 3:25, 26, 고후 8:24) ‘명백한 사실에 근거한 증거’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들이 복음을 반대하여 핍박한다는 그 자체가 저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을 명백한 증거인 반면에, 저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1:19의 주석을 보라.)받은 증거가 되는 것이다(1:29, 살후 1:4, 5, 막 13:9-13, 눅 6:22, 요 15:18, 요일 3:13).
[이는], 즉 방금 말한 내용(M. R. Vincent, H. A. Kent)은 바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라이트후트(J. B. Lightfoot)는 “그 당시 로마 검투사들의 싸움에서 승부가 결정됐을 때, 패자의 생사를 군중들의 신호에 따라 결정지은 사실의 비유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앞 구절(28절)의 이유(29절 초두에 호티, ὃτι가 있다.)에 대해, 【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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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1:2의 주석을 보라.)를 주신 첫째 목적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다(3:9의 주석을 보라). 그러한 의미에서 구원을 얻는 길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라고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그 둘째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목적과 안일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교인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은 무조건 고난이 기독교인의 특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 또는 욕망 때문에 겪는 고난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따르는 고난이 기독교인의 특권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고난이란 그리스도와 연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실한 증거이다(마 5:10, 요 15:19, 벧전 1:6, 7). 예수께서도 믿는 자의 고난을 복이라고 하셨고(마 5:4, 11, 12, 눅 6:22), 야고보 역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12)라고 하였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어느 장군이건 제일 곤란한 일을 하기 위해서 제일 우수한 군인을 택하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고난을 받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더욱이, 지난날에 죄인으로서 죄로 인한 고난 가운데 살던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인가!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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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를 위해 겪는 고난이란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고난이요, 바로 그 그리스도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온갖 박해와 핍박 그리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파한 바울 자신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라고 고백하였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을 싸움이란 말로 표현한 바울은, 그러한 싸움은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30】[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라고 하였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 선교 때문에 고난을 겪은 것을 보았다(행 16:19-24, 살전 2:2).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바울이 최근에 로마에서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와 같은 [싸움]은 빌립보 교인들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의 [싸움]은 아고나(ἀγώνα)로서 본래 투기장에서의 싸움을 가리켰다. 또한, 이 말은 내적 또는 외적 투쟁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인들의 싸움이란 실질적으로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다”(엡 6:12).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승리를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엡 6:10-20).⑨
헌터(A. M. Hunter)는 “프랑스 노병이 바야흐로 싸움이 시작되려고 하는 순간에 벌벌 떨고 있는 어린 신병에게, ‘오라 아들아, 그러면 너와 내가 프랑스를 위하여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바울은 효과적으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싸움은 너희와 나에게 계속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를 위하여 훌륭한 일을 하자.’라고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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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K. Barth, J. A. Knight, R. P. Martin, 尾山令仁.
2) J. Calvin, J. Wesley, M. R. Vincent, E. F. Scott, “Greijdanus”(in 박윤선), W. Hendriksen, R. C. H. Lenski,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3) 홍현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총리원, 1968), pp. 20-26.
4) Ibid., p. 130.
5) K. Barth, op. cit., p. 31.
6) 박장균, “웨슬레의 恩寵論” in 神學과 宣敎(서울신학대학, 1972), p. 73.
7) J. H. Michael, J. T. Robertson, “R. Johnstone”(in W. Hendriksen), R. C. H. Lenski, R. P. Martin.
8) M. R. Vincent, A. Barnes, W. Hendriksen, H. A. Kent, 黑崎幸吉.
9) 저자의 에베소서 6:10-20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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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서울: 글벗사, 1999, 2판 1쇄), pp. 104-112.

newrema.com(T. 426-3051)의 필자의 저서들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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