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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와 여리고성 그리고 라합
함창석
- 3038
- 2022-03-28 02:58:06
여호수아는 눈의 아들, 에브라임 지파의 일원(대상 7:20-27), 모세의 시종이며 계승자, 원래 그의 이름은 호세아였다(민 13:8). 광야 생활 동안 여호수아는 모세의 신뢰받는 ''사역자''(히. ''메솨레트'' 예. 11:28) 곧 그의 가장 신성한 임무를 증거 한 증인이었다(참조. 출 17:14). 청년(출 33:11)으로서 그는 아말렉 사람과 싸우는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관의 능력을 입증하였다(출 17:8-13). 여호수아는 모세의 군사 부관(시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였다. 그는 모세를 따라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40일 동안 그 곳에 머물렀다(24:13-18; 32:15-17). 그는 회막에서 관리자로 있으면서 모세를 도왔고(33:11), 모세의 예언 직무를 열렬히 보호하였다(민 11:26-29). 여호수아는 모세가 가나안으로 보낸 열두 정탐꾼 중의 하나였다(13:8,16). 갈렙과 함께 여호와의 약속을 굳게 신뢰함으로써 다른 점을 보였다. 다른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백성들을 격려하였으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간청을 거절하고 돌로 치려고 하였다(14:4-10). 그들의 믿음과 용기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셨다(30절; 26:65; 히 3: 17-18). 여호와의 지시대로, 모세는 여호수와를 그의 사역을 완수할 후계자로 세웠다(민 27:12-23; 신 3:28; 31:14). 여호수아는 그의 스승과 같은 동일한 지혜의 신을 충만히 받았다(34:9). 여호수아서는 분명히 그의 경력을 모세의 그것과 나란히 대비하고 있다(수 1:15,17; 3:7; 4:23; 8:32; 참조. 3:5; 5:15).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서 이스라엘은 더 강한 가나안 사람의 저항을 깨뜨림으로써 그 땅에서 확고히 설 수 있었다(6-12장; 11:23). 이러한 승리를 획득한 후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게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분배하였다(13-21장). 여호수아는 생의 마지막에 다시 온 이스라엘을 모아 놓고 견고하게 설 것을 권고하고 언약을 다시 새롭게 하도록 하였다(23:1-24:28).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었고 딤낫 세라에 있는 그의 기업에 장사되었다(24:29-30).
제사장 7명이 각자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들고 법궤 앞에서 돌게 하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는 가운데 너희가 그 성을 일곱 바퀴 돌아야 한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한 번 길게 불면 모든 백성이 큰 소리로 외치게 하라.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질 것이다. 그때 너희 모든 군대는 곧장 성 안으로 쳐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여호와의 법궤를 메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7명은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들고 법궤 앞으로 나서십시오." 그러고서 그는 백성들에게 "지금부터 여러분은 이 성을 도십시오. 무장한 선두 부대가 여호와의 법궤 앞에 서야 합니다." 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명령한 대로 7명의 제사장들이 각자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법궤는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무장한 선두 부대는 나팔을 부는 제사장들 앞에 서고 후방 부대는 법궤 뒤에서 행군했으며 나팔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수 6:4-9) 7일째 되는 날에 그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전과 같은 방법으로 성을 일곱 바퀴 돌아았는데 그들이 성을 일곱 바퀴 돈 것은 이 날밖에 없었다. 일곱 바퀴째에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는 순간 외치라는 명령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세부 사항을 지시하였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이 성과 성 안의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는 제물로 여겨 완전히 부숴 버리고 사람은 모조리 죽이십시오. 그러나 기생 라합과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만은 살려 주어야 합니다. 그녀는 우리 정찰병들을 숨겨 주었습니다.(수 6:15-17) 그래서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부는 나팔 소리를 듣고 일제히 큰 소리로 외쳤다. 그때 갑자기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백성들은 일제히 성으로 진격하여 그 성을 점령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칼로 쳐서 죽이고 또 소나 양이나 나귀와 같은 가축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때 여호수아는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두 정찰병에게 "그 기생의 집으로 들어가 너희가 약속한 대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모두 구출하라" 하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형제와 또 그녀와 함께 있는 친척을 모두 구출해 내고 그들을 이스라엘 진영 부근으로 피신시켰다.(수 6:20-23)
여리고는 요단 계곡의 사해 북서 방향 약 16km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이다. ''종려의 성읍'', ''종려나무 성''(신 34:3; 삿 1:16; 3:13; 대하 28:15)으로 불리는 성경의 여리고는 두 부분-가나안, 이스라엘시대와 하스모니아, 헤롯 성읍의 시대로 나눌 수 있는 감동적이고 중요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여리고는 요단강 근처, 모압 서쪽(예. 민 22:1; 수 13:32), 동부 베냐민의 산에 근접한(수 2:16,22), 에브라임과 베냐민의 영토를 구분하는 경계에(16:1-2), ''여리고 평지''로 언급되는 비옥한 지대에 위치한다.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북동쪽으로 28km, 요단강 서쪽으로 11km에 있다. 주위 환경은 쾌적하였으며, 고대 저술가들은 그 곳의 종려나무와 발삼 나무를 칭송하였다(참조. 근처의 오아시스, 아인 에스-술탄).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그 이름이 "향기나는 장소"를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서 서(西)셈족이 숭배한 달의 여신을 시사하고 있는 "달의 성읍"이라는 의미로 추측하기도 하였다(참조. ''야레아흐'').
여리고는 주요 동서무역로를 끼고 있었으므로 중추적인 상업 도시가 되었고, 그 전략적 환경 때문에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넌 후 그 곳을 주요 정복지로 삼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정탐꾼이 기생 라합을 만난 곳이 이곳이었고, 그 후 백성은 ''여리고 앞으로 ''기적적으로 갈라진 요단강을 건넜다(3:14-17). 6:20에 의하면, 여리고 성벽은 하나님의 궤를 멘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팔을 불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그 성을 멸하고(21절; 참조. 히11:30), 그 곳은 베냐민에게 분배되었다(수1 8:12,21). 사사 시대 동안에, 모압 사람 에그론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려고 여리고를 정복하였다(삿 3:13). 나중에 여리고가 암몬 지배 아래 들어갔을 때, 다윗은 이스라엘과 우호적 관계를 맺은 부왕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새 왕 하눈을 위로하려고 사절단을 보냈다. 그런데 하눈이 그 조객의 수염 절반을 깎아 수모를 주었으므로 사절단은 수염이 자랄 때까지 별 수 없이 여리고에 머무르게 되었다(삼하 10:1-5; 대상 19:1-5). 아합 시대에(B.C. 9세기) 그 성읍은 벧엘 사람 히엘에 의해 재건되었는데, 그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을 잃었고 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을 잃었다(왕상 16:34). 이리하여 여호수아의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졌다(수 6:26).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엘리사는 여리고에서 선지자의 생도를 만났고 그의 선생 엘리야가 곧 떠나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왕하 2:4-5). 이곳에서 그는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15-18절), 첫 번째 기적을 행하였다(19-22절). 수리아, 에브라임 전쟁 기간에(B.C. 734년경), 에브라임 지파 족장들은 여리고에 있는 유다의 사로잡힌 자들에게 휴식을 주었다(대하 28:15).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피하였을 때 이곳 여리고에서 바벨론 군사에 의해 사로잡혔다(왕하 25:5-6; 렘 39:5-6; 52:8-9).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자들이 여리고를 다시 차지하게 되었고(스 2:34), 그 거민은 예루살렘 재건을 도왔다(느 3:2). 공관 복음서는 예수께서 여리고 성 밖에서 소경을 눈 뜨게 한 세 기사를 담고 있다(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세리 삭개오를 만났고(19:1-10),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을 그 무대로 삼고 있다(10:30).
텔에스-술탄에서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한 증거와, 성벽에 혼신의 주의를 기울인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행해졌다(C.Warren, 1867; E.Sellin과 C.Watzinger, 1907-1909; J.Garstang, 1930-1936; K.M.Kenyon, 1952-1958). 여리고는 중석기 시대(Mesolithic period)에 맨 처음 점령되었고(B.C. 9000년경), B.C.8000-6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 돌벽은 여리고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시(城市)라는 전승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른 점령 시기는 중석기 시대(B.C. 4000년), 초기 청동기 시대 제 1기(B.C. 3200-2800년경), 중기 청동기 시대 제 1기(B.C. 2100-1900년경)와 제 2기(B.C. 1900-1500년경)로 추정되어 왔다. 가르스탕(Garstang)에 의하면, 두꺼운 외벽과 벽돌로 된 방어 내벽으로 이루어진 이중 성벽은 B.C. 1400년경 이스라엘 사람 목전에서 무너진 것이었다. 그러나 케년(Kenyon)은 이에 반박하여 이 유적은 사실 여호수아 훨씬 이전의 두 성벽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성읍에 대한 포괄적인 증거의 결여는 B.C. 14,13세기 또는 그 이후 청동기시대(이스라엘)의 점령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여호수아의 여리고 정복을 지지하고 있는 학자들은 계속 난감함에 처해 있다. 그러나 가능한 설명으로는 부식 작용 또는 유적지를 없앤 다른 세력 또는 그때 그 자리가 사실 그 지역에 있는 또 다른 구릉(tell)이었다고 하는 다소 불명확한 가능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 여리고는 분명히 B.C.8세기까지 점령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성벽이 없는 잔존한 유적지는 B.C.7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자리는 B.C.6세기 초엽 바벨론 침략 이후 방치되었다. B.C.2세기에 정착지가 다시 툴룰 아부 엘 알라이크(Tulul Abu el-''Alayiq)에 세워졌다. 이곳은 구약의 여리고성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와디 켈트(Wadi Qelt)의 두 제방을 따라 위치하였다. 하스모니아 왕조의 왕은 이곳을 그들의 겨울 휴양지로 정하였고, 헤롯 대왕은 ''신약의 여리고''와 그 곳의 왕궁, 지표가 낮은 정원, 영빈관, 로마식 목욕탕, 공공건물까지 포함하여 호화롭게 단장하였다. A.D. 68년경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한 점령을 여리고는 면하였다. 여리고에 대한 계속된 점령의 증거는 바르 코크바(Bar KoKhba, 132-135년)와 보르도 순례단(Bordeaux Pilgrim, 333년)시대로 추정된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동쪽으로 1.5km떨어져 있는 어떤 비쟌틴의 성읍이 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현 여리고(아랍. ''에맄하'')는 이 자리에 위치한다.(K.M. Kenyon, Diggign Up Jericho(New York:1957); Kenyon et al., "Jericho", EAEHL 2:550-575.
나팔은 한글 개역 성경에는 금속 나팔 (히. '하초체라' 양각 나팔), (히. '쇼파르', '요벨') 모두를 나팔로 번역하였다. 헬라어 역시 이 두 종류 모두를 '살핀크스'라고 칭하였다. 금속 나팔과 양각 나팔은 주로 신호용으로 사용되었다. 곧 전투 시 군사를 소집할 때(삿 3:27; 7: 19; 대하 13:12; 고전 14:8), 백성을 소집하고 진을 진행시킬 때(민 10:2), 위험이 닥치는 것을 경고할 때(느 4:18, 20; 렘 6:1; 겔 33:3-6)나팔을 불었다. 종말론적인 성경 본문에서도 나팔은 재림을 알리는 도구로 언급되었다(마 24:31; 고전 15:52; 살전 4:16). 제사 의식과 일반 의식 때에도 금속 나팔과 양각 나팔이 사용되었는데, 이때에도 역시 신호를 알리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나팔은 희년 시작을 알릴 때에(레 25:9), 나팔절 때(23:24), 통치자들의 즉위식 때 (삼하 15:10), 매월 첫날을 비롯한(시 81:3) 특별 예배의 경우에도(대상 15:28; 대하 15:14; 시 47:5; 98:6; 150:3) 나팔을 불었다. 양각 나팔이 이와 같이 제사 의식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유대교의 종교 의식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양각 나팔은 구약 시대에 악기로도 사용하였다(예. 삼하. 6:15; 대하 15:14). 예수께서는 구제한 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떠벌리는 자를 '나팔을 부는 자'라고 비유하셨다(마 6:2).
정탐군을 숨겨준 라합은 <히> '라하브'-: '넓은, 광활한'; <헬> '라아브', '라카브' 여리고성에 살던 매춘부이다. 여호수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들이 성벽 위에 있는 그녀의 집에 숨어 있었다(수 2장). 정탐꾼들의 정찰과 도피를 도와주었던 라합은, 이스라엘이 성을 점령하게 될 때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의 목숨을 그 대가로 요구하였다. 그녀는 이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아 놓았다. 여호수아는 이 약속을 지켰으며, 여리고 성이 함락되었을 때 오직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6:17, 22-25). 예수님의 족보에서 라합은 살몬의 아내이자 보아스의 어머니로 나타나 있다(마 1:5). 구약에는 살몬의 아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참조. 룻 4:20-21; 대상 2:11). 아마도 마태는 구원사 안에 포함된 이방인들의 구원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라합의 이름을(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는 오직 네 명 여인만이 나타나 있음) 기록해 놓은 것 같다. 정탐꾼들을 보호해 준 라합의 행위와 그녀가 받은 보상이, 히 11:31과 약 2:25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른 라합은 고대 근동 지방의 신화 속에 나오는 바다 괴물인데 신들에 의하여 굴복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신화들은 바벨론이나 가나안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을 알릴 수단으로 이러한 괴물들에 대해 언급하였다(욥 9:13; 26:12; 시 89:10; 사 51:9). 출애굽기 역시 하나님의 대적들이 극적으로 패배당한 사건이기 때문에, 애굽을 시 87:4과 사 30:7에서는 '라합'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