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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연재 96회 1.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21:5-8)
최세창
- 1919
- 2022-03-28 03:35:54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보라]는 1:7의 주석을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이사야 65:17의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참조: 사 43:19, 66:22)를 연상하게 한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καινὰ ποιώ πάντα)는 만물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옛 세상의 만물과 질적으로 다른 만물을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새 창조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특히 그분의 대속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이 영적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하였다.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는 방금 하신 말씀을 특별히 가리키는 동시에 본서 전체의 예언을 포함하는 것이다(M. Rist). 본서 전체, 특히 방금 하신 말씀은 신뢰할 만한 것이고 진실한 것이니 기록하라는 것이다.
[기록하라 하시고]는 중요한 내용이라서 가감되거나 변경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모두에게 알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11, 19, 2:1, 8, 3:1, 7, 14:13, 21:5).
또 들은 말씀에 대해, 요한은 【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하였다.
[이루었도다]는 게고난(γέγοναν)이며 ‘성취하다’, ‘완성하다’, ‘끝나다’ 등을 의미한다(16:17). 여기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 구원 사업과 사단을 위시한 적들에 대한 심판과 새 예루살렘이 속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 완성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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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는 1:8의 주석을 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의 [생명수 샘물]은 7:16-17의 주석을 보라.
[값없이 주리니]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복이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과 호의로 베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된 말씀에 대해, 요한은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라고 하였다.
[이기는 자]는 2:7의 주석을 보라.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의 [이것들]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생명수 샘물 등,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약속된 모든 복들을 의미한다.
[유업으로 얻으리라]는 클레로노메세이(κληρονομήσει)이며 ‘영적인 것을 얻다’, ‘칭의 또는 구원을 얻다’, ‘영생을 얻다’, ‘기업을 얻다’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얻는다는 뜻이다.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3절의 주석을 보라.)의 [아들]이 3절에는 “백성”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 즉 믿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요한의 사상은 예수님이나 마태나 바울이나 베드로나 마가나 누가 등과 다를 바 없다.
이 사상은 구약성경에도 나타나긴 하나(출 4:22, 시 68:5, 89:26, 사 9:6, 63:16, 64:8, 렘 3:4, 9, 말 2:10) 미미한 것이었는데, 예수님에게서 본격적으로 개인화 내지 신령화 되었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의 신관은 신약성경, 특히 예수님과 바울의 주류가 되었다.
메이첸(J. G. Machen)은 “하나님의 부성의 교리는 예수님과 바울이 똑같다.”①라고 하며, 케네디(H. A. A. Kennedy)는 더욱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교훈의 근본 취지인 하나님의 부성의 계시는 바울의 종교적 개념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배했다.”②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이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살전 1:1, 살후 1:2, 골 1:2, 몬 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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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의미에 대해서 바르트(K. Barth)가 자신의 「교의학 개요」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란 인간관계에서 하나님께 적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인간관계에 적용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서, 또 자신의 본성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당신의 피조물인 우리를 위한 아버지이시다.······참되고 정당한 부성은 하나님 안에 있고, 바로 이 하나님의 부성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부성이 생기는 것이다. 신적 부성은 모든 자연적 부성의 근원이다.”③
하나님 아버지의 주도적이며 자유로운 은혜에 의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양자(빌 2:15)가 될 수 있다. 양자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을 표현하는 하나의 개념이다.
고대 세계에서 가족이 양자를 삼는 것은 매우 평범한 일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양자 결연 의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양자 결연 의식은 대단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동전과 저울을 사용한 상징적인 매매 행위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아들의 친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한 번 팔았다가 다시 사고, 두 번째 팔았다가 또다시 산다. 그리고 세 번째 팔고는 다시 되사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 양아버지가 로마의 행정 장관인 집정관에게 가서 양자 결연의 건을 신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일단 양자가 되면, 양자의 과거의 모든 빚과 계약은 무효가 된다. 양자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새사람으로 간주된다. 미래의 모든 면에서도 양자는 다른 아들과 똑같은 근거를 갖는다.”④
바울은 양자의 개념을 구속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롬 8:23).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이다(엡 1:4). 이 아들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 대신에, 하나님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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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부를 수 있도록 양자의 영을 받았다(롬 8:15, 갈 4:6). 이 영은 곧 하나님의 영이며, 양자의 모든 삶을 지배한다(롬 8:14). 따라서, 케네디(H. A. A. Kennedy)는 “양자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모든 환경들, 즉 세상과 생명과 죽음과 현재적인 것들과 다가올 것들의 주인이다. 바울은 항상 이 승리적 조건들을 성령의 선물과 결합시킨다.”⑤라고 하였다. 이러한 양자의 삶은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자유로 특징지어진다(요 11:52, 롬 8:21, 고후 3:17).
양자란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로서, 그분과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롬 8:17). 이 고난은 죄악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고난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고전 4:10-13, 9:19,고후 1:5, 4:8-10, 11:23-32, 빌 1:29, 3:10, 골 1:24, 살후 1:5, 딤전 4:10, 딤후 1:8).
한 마디로 말해, 양자란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당신의 영광의 상속자로 삼으신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죄로 인해 마귀에게 끌려가던 우리가, 창조주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한 사랑의 신비가 있을 수 없으며, 이보다 더 놀라운 은혜가 있을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로서의 신관은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과 베드로와 바울이 다를 바 없고, 또한 예수님의 교훈과도 일치한다고 하면, 결국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과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님의 교훈이나, 혹은 그것에 근거된 초대 교회의 전승을 공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들의 아버지로서의 신관의 깊이는 약간 다르다.
특히, 여기서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7절과 대조적인 말씀에 대해, 요한은 【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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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는 믿음으로 이기는 자들(7절)과 대조되는 여덟 가지의 악한 자들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은 불신자들이며 여러 가지 형태의 우상 숭배를 통해 사단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두려워하는 자들](데이로이스, δειλοίς)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받는 핍박과 박해가 두려워서 믿음을 버리고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자들이다(마 8:26, 막 4:40).
[믿지 아니하는 자들](아피스토이스, ἀπίστοις)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불신자들이나, 행함이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나(약 2:17, 마 7:21-23),⑥ 입술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딛 1:16)⑦이다.
[흉악한 자들](에브데뤼그메노이스, ἐβδελυγμένοις)은 ‘가증한 자들’(마 24:15), ‘부도덕한 자들’,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더러워진 자들’, ‘우상 숭배로 인해 부정해진 자들’ 등을 가리킨다.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은 9:20-21의 주석을 보라.
[거짓말하는 자들](퓨데신, ψευδέσιν)은 진리를 떠난 거짓 사도들이나(2:2), 거짓 신자들이나(3:9), 불신과 불의와 부도덕을 조장하는 거짓말쟁이들이다. 예수님은 거짓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다(요 8:44).
이 모든 불신자들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 요한은 [유황으로 타는 못(14:10의 주석을 보라.)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2:11의 주석을 보라.)이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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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J. G. 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Michigan: Eerdmans, 1973), p. 161.
2) H. A. A. Kennedy, op. cit., p. 105.
3) K. Barth, Dogmatics in Outline, trans. by G. T. Thomson.(SCM Press Ltd, 1966), p. 43.
4) W. Barclay, Ambassador for Christ(The Saint Andrew Press, 1973), p. 170.
5) H. A. A. Kennedy, op. cit., p. 138.
6) 필자의 야고보서 2:17의 주석과 마태복음 7:21-23의 주석을 보라.
7) 필자의 디도서 1:16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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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요한계시록(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427-432.
newrema.com(T. 426-3051)의 필자의 저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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