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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혀...의 성경 본문 마 27:32-44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552
- 2022-04-05 20:29:36
마태의 기사는 【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로 시작된다.
{고대의 증언에 의하면, 십자가형이 확정된 죄수는 직접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하였다.②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달리 암시하는 사본이나 문맥상의 자료가 아무것도 없으므로, 여기서는 십자가 전체로 보아야 한다.”라고 하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십자가의 기둥은 이미 처형장의 바닥에 박혀 있고, 지고 갈 것은 횡목뿐이라고 한다.③
바클레이(W. Barclay)는 “죄수는 네 명의 병사들이 정방형으로 둘러선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명의 병사가 죄수의 죄상을 쓴 서판을 들고 행진하였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보여서 경고를 받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큰 거리와 골목을 누비며 지나갔다.”라고 설명하였다}(막 15:21의 주석).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율법의 예언을 좇아 예루살렘 성밖에서 못박히시기 위해(레 24:14) 끌려 나가셨다.{그 길은 ‘고난의 길’ (Via Dororosa)이라고 일컬어진다. 어느 지점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지워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막 15:21).④
“교부들(예: Chrysostom, In Joh. Hom. lxxxv, i)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데 사용할 재료들을 짊어지고 가는(창 22:6) 이삭에게서 십자가를 짊어진 그리스도의 한 유형을 보았다”(C. K. Barrett). 크리소스톰(Chrysostom)보다 한 이백 년 전의 사람인 “터틀리안[Tertullian: 1660-220] 이후의 많은 주경가들이 이 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산상으로 가시던 주님의 모습이, 이삭이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던 데서(창 22:6), 그 그림자가 있었다고 지적한다”(이상근).}(요 19:17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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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의 [구레네](Κυρηναίον)는 북아프리카의 중요한 다섯 도시 중 하나이며, 지중해에서 십 마일 떨어진 고원 지대로서 오늘날의 리비아(이집트 서쪽)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그 곳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음을 생각해 볼 때, 시몬(Σίμωνα)은 어떤 사람들이 추정하듯이 아프리카 흑인이 아니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임이 분명하다”(W. W. Wessel).}(막 15:21의 주석). 구레네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독자적인 회당이 있을 정도이었다(행 6:9).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이 없는 것을 보고, 백성들에 대한 ‘징발권’을 행사하여, 시몬이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좇게 하였다. 시몬의 봉사는 비록 처음에는 억지로 한 것이지만, 결국엔 자신과 가족과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참된 복이 되었다(참조: 롬 16:13).
예수님이 못박히실 장소에 대해, 마태는 【33】[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라고 하였다.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의 [골고다]는 아람어 골골타(אחלגלוג: ‘두개골’, ‘머리’)의 헬라어 음역이다(Γολγοθά: 막 15:22, 요 19:17). ‘해골’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는 크라니온(κρανίον)인데 벌게이트 역(Vulgate: Jerome의 라틴 역 성경)에서는 칼바리아(Calvaria. 참조: 칼보리, Calvary)로 번역되었다.
{그 지명은 그 언덕이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골고다(해골)의 위치에 관해서는 비아 돌로로사의 종점이며, 현재의 성안인 성묘교회(The Church of Holy Spulcher)가 있는 곳으로 믿어 왔으나(W. W. Wessel, E. Schweizer), 근대에 와서는 다메섹 문 밖에 있는 ‘골든 갈보리’(The Gordon’s Calvary)로 불리는 언덕이 보다 유력하게 지목된다.}(막 15:22의 주석).
골고다에 도착한 후의 군인들의 행동에 대해, 마태는 【34】[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라고 하였다.
[쓸개 탄 포도주]가 마가복음 15:23에는 “몰약을 탄 포도주”로 되어 있다. [쓸개]는 콜레스(χολής)이며, ‘간에서 분비되는 쓴 소화액을 일시적으로 저장‧농축하는, 얇은 막의 주머니로 된 내장’, ‘쓴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몰약은 아라비아 토산품으로 쓰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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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예수님께 마시게 하려고 한 것은 아주 쓴 물질을 탄 포도주로 고통을 경감시키는 일종의 마취제이었다. {이 인도적인 행위는 유대의 관습이었는데, 주로 예루살렘의 경건한 여인들이 자원하였다(TB Sanhedrin 43a).⑤}(막 15:23의 주석).
예수님은 그 포도주를 맛만 보시고 마시지는 않으셨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6:29)라고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한 것이며, 또한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고난을 그대로 감수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군인들에 대해, 마태는 【35】[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라고 하였다.
{십자가의 모양에는 T형, †형, X형이 있었다. 이 십자가형은 고대 아프리카, 애굽, 수리아, 파사, 헬라, 로마 등에서 행해진 보편적 사형법이었다. 중국에도 십자가형이 있었으나 못을 박지는 않고 매어 달기만 하였다. 십자가는 처음부터 조립하는 수도 있었고, 분해해서 운반하는 수도 있었다. 로마법에는 십자가의 일부, 또는 전부를 사형수가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게 되어 있었다. 십자가의 크기는 보통 9~12척이었고, 처형은 죄수를 벌거벗겨 형틀 위에 눕혀 놓고는 양손과 포개진 두 발등에 못박은 후에 세우는 방법과 처음부터 세워진 십자가에 못박는 방법이 있었다. 발등에 못을 박는 대신에 비끄러매기도 하였다.
십자가형은 키케로(Cicero: 주전 106-43. 로마의 정치가이며 철학자.)의 말대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형벌 중에 가장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형벌”이므로, 로마에서는 자국 시민에게는 행하지 않고 식민지인이나 노예들 또는 반란자나 강도 같은 극악한 죄수에게만 행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는 빨리 죽지 않았다. 7일간이나 못박힌 채 매달려 있는 죄수도 있었다고 하나, 대개는 3일 정도 매달려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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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미칠 것 같은―실제로 미쳐 버린 죄수도 있었다고 한다―극도의 고통과 주림으로 인해 탈진하여 죽고 말았다. 그 고통과 치욕이 오죽했으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천 가지의 죽음으로 죽는다.”라고 하는 말이 다 있을 정도이었다. 때로는 죄수에게 베풀어진 자비로서 큰 망치로 다리를 쳐서 속히 죽도록 하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죄수가 죽으면 매장해 주기도 했지만, 그대로 십자가에 방치하여 뭇사람에 대한 경고와 새들의 밥이 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막 15:24의 주석).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는 시편 22:18의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의 성취이다.
그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예수님과 그 십자가 곁에서 멸망이나 구원은 아랑곳없이 헌옷 나부랭이나 더 갖기 위해 제비를 뽑는 그들의 모습은 얼마나 기막힌 대조인가!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치욕과 고통은 아랑곳없이 자기 위주의 복만을 구하는 현대 교인들도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눈 군인들에 대해, 마태는 【36】[거기 앉아 지키더라]라고 하였다.
이어서 마태는 못박히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37】[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라고 하였다.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는 예수님에 대한 모욕과 희롱의 절정이다(비교: 막 15:26, 마 27:37, 요 19:19-21⑥).
그때에 집행된 또 다른 십자가형에 대해, 마태는 【38】[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라고 하였다.
[강도]는 레스타이(λῃσταὶ)이며 ‘강도들’, 또는 ‘반란자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미쉬나⑦의 법에 의하면, 하루에 한 사람밖에 처형할 수 없었지만, 로마인들에게는 집단 처형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J. Gnilka, 하권, pp. 420-421)······누가는 두 강도, 또는 두 행악자 중 한 사람은 나중에 회개하고 구원받는다고 하였다(눅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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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강도들 한가운데서 강도들과 같은 취급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보다 더 억울하고 부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섭리라는 면에서 볼 때, 강도들 한가운데서 운명하시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예로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바클레이(W. Barclay)는 “그것은 예수님의 전 생애가 최후에 이르기까지 죄인의 친구였다는 것을 상징해 준다.”라고 하였다}(막 15:27의 주석).
「아랍 소년의 복음」(Arabic Gospel of the Infancy xxiii)에는 두 강도의 이름이 디도(Titus)와 드마크스(Dumachus)로 되어 있다.⑧ 그러나 외경 빌라도의 행전(10:)에는 회개한 편이 디스마(Dismas), 다른 편이 게스다(Gestas)였다고 하고,······니고데모의 복음(Ev. Nicodemus 10:)에는 디도와 디스마라 한다.⑨ 현재로서는 그 두 사람의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다.
아무튼,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나중에 회개하였다(눅 23:39-43의 주석을 보라.).
극도의 치욕과 극도의 고통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행인들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라고 하였다.
이 구절 이하 44절까지는 사람들의 조롱을 묘사했는데, 이 묘사는 시편 22:6-8의 반영이다. 마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세 무리―지나가는 자들과 교권자들과 못박힌 강도들―의 조롱을 연속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이 못박히신 곳이 성밖이었지만, 성에서 가깝고(요 19:20), 또 길에서도 멀지 않기 때문에 [지나가는 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경멸과 거만의 표시(욥 16:4, 시 109:25)로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였다. 그들은 그 예수님이 바로 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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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경멸하며 모욕하는 그들의 말에 대해, 마태는 【40】[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라고 하였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는 26:61의 주석을 보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을 구원하고 못박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것이다(참조: 26:53). 그런 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저버리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것임을 알 영적 지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교권자들에 대해, 마태는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라고 하였다.
[대제사장들]은 2:4의 주석과 3:7의 “사두개인”의 주석을 보고, [서기관들]은 2:4의 주석을 보고, [장로들]은 15:2의 주석을 보라.
유대 교권자들의 조롱하는 소리에 대해, 마태는 【42】[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라고 하였다.
교권자들은 지도자라는 신분과 품위를 망각하고 예수님을 가리켜,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조롱하였다. 그 교권자들은 예수님이 남들을 위해 행하신 신유와 축귀 등의 기사와 이적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런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사단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9:34). 그러나 이제는 그나마도 사단의 도움이 다하여 자기 한 몸도 구원할 수 없다고 희롱하는 것이다.
교권자들의 희롱의 소리는 실상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이었다. 예수님은 자기 한 몸을 버림으로써 만민을 구원하러 오셨고, 현재 그 일을 결정적으로 수행하시는 것이다. 교권자들의 영적 맹목과 무지를 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성령 충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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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는 “저가 유대인의 왕이로다”(37절)와 같은 의미이다. 역시 교권자들의 희롱의 소리이나, 실상 예수님은 영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왕인 메시아이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40절)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라고 한 조롱은 일반적인 유대의 메시아관을 반영한 것이다. 즉, 메시아로서의 표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것이다. 정말 어이없는 메시아 참칭자라는 것이다.
계속된 교권자들의 조롱에 대해, 마태는 【43】[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라고 하였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는 시편 22:8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를 반영한 것이다. 그들의 조롱의 소리는 예언에 적중된 것이었다. 그들은 한술 더 떠서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라고 조롱하였다. 이 조롱의 소리 역시 진리이다. 예수님은 특별한 의미의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3:17의 주석을 보라).
못박힌 두 강도도 예외가 아닌 것에 대해, 마태는 【44】[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라고 하였다.
누가복음 23:26에는 군병들의 희롱도 첨가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과 저주 한가운데서 바로 그들 모두가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구원의 사랑을 성취하신 것이다(참조: 갈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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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저자의 마가복음 15:21-32의 주석과 누가복음 23:26-43의 주석과 요한복음 19:17-27의 주석을 보라.
2) “Artemidor, Oneir. 2, 56: ‘십자가에 달릴 사람은 우선 십자가를 끌고 가야 한다.’ 그 밖의 증빙 구절은 Blinzler, 360, 주 16과 Billerbeck I, 587에 나와 있다.”(in J. Gnilka, 하권, p. 416, 주 24).
3) “Blinzler, 375”(in J. Gnilka, 하권, p. 416. 주 25), W. W. Wessel, E. Schweizer, J. Gnilka, 하권, p. 416, W. L. Lane, F. C. Grant, 山口 昇.
4) 저자의 마가복음 15:21의 주석을 보라.
5) in J. Gnilka, 하권, p. 418.
6) 저자의 요한복음 19:19-21의 주석을 보라.
7) 미쉬나(미드라쉬): 모세 율법에 포함되지 않는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구전이나 관습으로 지켜 내려온 것인 ‘할라카’의 집성이며, 모세 율법 다음가는 권위를 갖는다.
8) in A. Plummer.
9)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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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713-720.
newrema.com(T. 426-3051)의 필자의 저서들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