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바울의 다메섹 선교의 행 9:19b-25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235
  • 2022-04-20 18:17:32
아나니아의 안수로 다시 보게 되고,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울은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은 후에 강건해졌다. 영과 육이 강건해진 사울에 대해, 누가는 【19b】[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라고 하였다.
[다메섹]은 9:2의 주석을 보라.
다메섹에까지 악명을 떨치던 핍박자 사울의 회심은, 교인들에게는 대단히 놀라운 소식이자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의 회심담을 들은 다메섹의 교인들이 회심한 사울을 환영하고, 며칠 동안 함께 있었다. 그들은 함께 지내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변화시키는 기적적인 능력과 사랑에 관한 대화를 하면서 서로 은혜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 사울의 복음 선교에 대해, 누가는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하였다.
메시아 사칭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체득한 사울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로 각 ‘회당’(쉬니고가이스, συναγωγαίς: 6:9의 주석을 보라.)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다. 역시 사울다운 놀라운 결단력과 실천력이 드러난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ὁ υἱὸς τού θεού)이심]은 {초대 교회에서 영화된 은유나, 죽을 운명인 인간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기원”(A. Clarke) 또는 “예수님의 신성”(R. Earle)을 강조하는 것이다. 존슨(S. E. Johnson)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또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모든 복음서들이 유대 문학과 대조적으로 메시아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라고 하였다.}(막 1:1의 주석).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성부와 성도의 관계에 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유일한 아들로서 신적 본질을 공유하는 이시다. 이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①라는 견해와 같으며, 또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②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③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엡 1:3의 주석)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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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나 속성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부터 아들로서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다.
{포시트(P. T. Forsyth)는 “하나님은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만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독생자만 있으시고, 많은 자녀들은 유일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이다.”라고 하였다.}(요일 1:2의 주석).
사울의 변화와 전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누가는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라고 하였다.
사울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라고 전파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다. 율법주의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교인들은 그를 변화시킨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감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참조: 갈 1:22-24). 그들은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9:13-14의 주석을 보라.)라고 하였다.
[잔해하던]은 포르테사스(πορθήσας)이며 ‘황폐시키다’, ‘약탈하다’, ‘파괴하다’, ‘멸절시키다’ 등을 의미한다.
[대제사장들]은 가야바와 그의 장인인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를 지시하는 것이다(4:6의 주석을 보라).
사울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잔해하기 위해 온 다메섹은, 놀랍게도 사울이 주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놀랄 뿐이다.
그 사울의 활약에 대해, 누가는 【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라고 하였다.
[힘을 더 얻어]는 에네뒤나무토(ἐνεδυναμούτο)이며 ‘더 견고해지다’, ‘더 강건해지다’ 등을 의미한다(롬 4:20, 엡 6:10). 여기서는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영력’으로 보아야 한다. 영력 곧 믿음의 힘은 복음 선교 등의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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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그리스도’(2:36의 주석을 보라.)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의 [굴복시키니라]는 쉬네퀴넨(συνέχυνεν)이며 ‘당황하게 하다’, ‘혼란하게 하다’, ‘좌절시키다’, ‘난처하게 하다’, ‘혼동하다’, ‘꺾다’ 등을 의미한다.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 즉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의 증언을 당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성령 충만함으로 인한 영력을 갖췄고, 당대의 최상급 지성인이며 공회의 유력한 회원이었던 가말리엘의 유망한 문하생으로 탁월한 율법 지식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다(빌 3:6).④ 게다가 그는 헬라 사상에도 정통하였다. 이 점은 그의 서신들에 헬라 사상이나 종교나 개념 등이 복음 전파를 위해 폭넓게 활용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 사칭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파하는 사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살의에 대해, 누가는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라고 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매]는 대체로 사울이 회심한 후에 다메섹과 다메섹 근처의 사막 지대인 아라비아에서 지낸 3 년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갈 1:17-18).⑤
세월이 갈수록 복음 선교에 더욱 열정적인 사울을 보는 다메섹의 유대인들인 헬라파 유대인들은 이론적으로나 율법으로나 당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를 [죽이기로 공모하]였다. 그들은 그 좋은 회개의 기회를 살인할 공모의 기회로 바꾸어 버렸다. 영적 맹목 상태인 그들은 자기들의 공모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이 공모한 후의 상황에 대해, 누가는 【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이라고 하였다.
[계교]는 에피블레(ἐπιβουλὴ)이며 ‘음모’, ‘책략’, ‘계획’ 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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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자신을 죽이기로 한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게 되었고, 또한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 사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⑥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고후 11:32)⑦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유대인들이 다메섹의 통치자인 아레다 왕의 방백을 매수했거나, 그에게 사울을 위험 인물로 고발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어쩌면 그 방백이나 그의 부하가 사울을 반대하는 유대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 위해 비열하게 권력자들과 손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속 들어 쓸 사울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누가는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사울의 다메섹 선교의 열매인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R. C. H. Lenski).
[광주리]는 스픠리디(σπυρίδι)이며 바구니(코피논, κοφίνων: 막 6:43)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린 일에 대해서는 사울 자신도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 11:33)라고 말하였다. 성벽의 틈새나 성벽 위에 지은 집(수 2:15)의 창문을 통해서 내려간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파견했던 이스라엘의 두 첩자(수 2:15)와 다윗도(삼상 19:12) 그러한 방법으로 도망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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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저자의 요한복음 1:1의 주석을 보라.
2) 저자의 골로새서 1:15의 주석을 보라.
3) 저자의 히브리서 1:3의 주석을 보라.
4) 저자의 빌립보서 3:6의 주석을 보라.
5) 저자의 갈라디아서 1:17-18의 주석을 보라.
6) 아레다 왕(비문에 의하면,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Harithath: S. B. iii. 530<아라비아 왕의 일반적 명칭>)은 주전 9년부터 주후 39년까지 나바테안 아랍(아라비아: 북쪽 다메섹에서 남쪽 헤그라까지 미치는 나라에 살았던 셈족에 속한 민족)의 왕”(C. K. Barett)으로서 수도 페트라에서 통치한 아레다 4세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 사건은 바울로의 생애 초기에 일어났을 것이다.
다메섹은 대 폼페이에게 정복되어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Josephus, Antiquities xiv. 29; War i 127). 거기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와 네로 황제들의 상이 새겨진 동전이 발견되었으나, 칼리굴라(37-41년)와 클라디우스(41-54년) 황제의 상이 새겨진 동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 기간 동안 다메섹이 나바테안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37년에서 39년까지 아레다의 통치를 받았음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전혀 확실치 않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동전이 없는 것은 우연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다메섹은 이중적으로 통치를 받고, 아레다는 로마의 봉신(封臣)으로 통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레다가 독자적으로 통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아레다 왕은 대제사장 야손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과 동시대인으로 언급되어 있다. “아레다 왕은 헤롯 안티파스의 장인이었다. 그러나 헤롯이 아레다 왕의 딸과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결혼했기(마 14:2) 때문에, 아레다 왕은 그 일을 빌미로 헤롯에 대해 선전포고하고 결국 헤롯을 완전히 패배시켰다”(Josephus, Antiquities xviii. 114, 116, 119 참조<막 6:28의 주석>). 이에 수리아의 총독 비텔리우스(Vitelius)는 로마의 봉신(封臣)을 공격하였다 하여, 아레다 왕을 응징하려 했으나 티베리우스 황제의 죽음으로 행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7) 저자의 고린도후서 11:32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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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사도행전(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301-305.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들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설교집 34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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