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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만에 다시 사셨다
함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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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7 04:45:12
함창석
옆구리 창에 찔려 죽음이 확인된 후
요셉의 새 무덤에 시체를 두었으나
예수님 부활하셨으니 사망권세 이겼다
Sandol Method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신 다음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그 날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었고 다음날은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아서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인들이 와서 먼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와서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고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을 직접 본 사람이 증거 하였으니 그의 증거는 참된 것이다. 그는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고 여러분이 믿도록 하려고 증거 한다. 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자를 바라볼 것이다." 그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유대인 지도자들이 두려워서 자기가 제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는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내렸다. 그리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일이 있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33킬로그램 정도 가지고 왔다. 그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료를 바르고 모시 천으로 쌌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는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는 아직 사람을 매장한 일이 없는 새 무덤 하나가 있었다. 그 날은 유대인이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인데다가 무덤도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거기에 모셨다.(요 19:30-42)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을죄를 지어 여러분이 그를 처형한 후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시체를 밤새도록 그대로 두지 말고 그 날에 그를 매장하십시오.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시체를 그대로 두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신 21:22-23) 보십시오.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을 찌른 사람들도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그분으로 인해서 슬피 울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계 1:7)
부활은 영어로는 Resurrection.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주장으로, 그리스도교의 사신의 중핵을 이루는 생각. 원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상은 그리스도교에 한정된 것은 아니며, 불교에서도 보이는데, 나아가서 『신약성서』에서도 예수만이 아니라 몇 명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예수의 부활은 그것과는 달라서,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의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오래된 증언은 바울의 『고린도 전서』 15장 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초기교회의 선교의 짧은 요약이며,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실체적인 부활의 상세한 묘사의 성립은 복음서 성립이 상당히 늦은 시대였다는 것에도 밝혀진 것처럼, 그에 후속하는 것이다. 주목할 점에 바울은 자신의 〈안에〉 계시된 예수의 부활의 업적을 다른 사도들이 체험한 부활의 예수와의 만남의 업적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는 예수 부활의 단지 실체적 이해만이 아니라, 내면에서의 〈신앙적ㆍ실존적〉 이해의 필요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십자가형에 처한 1명의 인물의 부활이라는 사상 속에는 그 무잔한 죽음과 그에 이르기까지의 예수의 생에 대한 신의 〈긍정〉이 이야기된다는 『신약성서』의 주장이 올바르다면, 거기에는 부활과 생전의 예수의 사신 사이의 유기적 관련의 문제가 먼저 제기되어야 한다.(부활, 종교학대사전, 1998)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생명을 얻어 되살아남이다. 특히, 기독교의 부활은 다시는 죽는 일 없이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요 6:39; 롬 6:9; 고전 15:12-13,42-54). 부활은 사도들의 증거와 초기교회 설교의 핵심내용이었고(행 1:22; 4:2,23; 17:18), 구원을 얻는 데 있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반드시 고백해야 할 신앙 내용이었다(롬 10: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의 양대 기둥이라 하겠다. 구약성경에는 부활 사상이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욥(욥 19:25-27), 다니엘(단 12:2-3,13), 다윗(시 16:9-10; 17:15; 71:2), 고라 자손(시 49:15), 아삽(시 73:24), 이사야(사 26:1,19), 호세아(호 6:2; 13:14) 등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부활 사상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신구약 중간기에 오면서 좀 더 분명하고 구체적인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계에는 부활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사두개파와 부활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바리새파가 있어 부활 사상이 극명하게 대립되어 있었다(마 22:23). 한편, 죽었다가 다시 생명을 얻어 일시적인 부활(다시는 썩지 않는 영광의 몸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기에 엄격히 말해서 '부활'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름. 부활의 전조로 볼 수 있다)을 경험한 자들도 있다. 사렙다 과부의 아들(왕상 17:17-24),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32-35), 엘리사의 뼈에 닿은 사체들(왕하 13:20-21), 죽은 야이로의 딸(마 9:23-25),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눅 7:11-15),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요 11:43-44), 욥바에 사는 여성도 도르가(행 9:36-40), 삼층 다락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행 20:9-1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직후 무덤에 있던 많은 성도(마 27:52-53).(가스펠서브, 부활, 교회용어사전: 교리 및 신앙, 2013)
부활(復活)은 대체로 생명체가 생명을 잃어 죽었다가 다시 생명을 얻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서브컬쳐에서도 강하게 묘사된다. 사전적으로는 제도나 법 등이 폐지되었다가 다시 효력을 발생한다는 의미도 있다.[1]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 부활에 대한 신앙이 존재한다.[2] 어떤 사람들은 부활의 실제적인 수단이 영혼이라고 믿는다.[3]
1. 부활《표준국어대사전》
2. “부활”. 《라이프성경사전》. 생명의말씀사.
3. “Gregory of Nyssa: "On the Soul and the Resurrection:" However far from each other their natural propensity and their inherent forces of repulsion urge them, and debar each from mingling with its opposite, none the less will the soul be near each by its power of recognition, and will persistently cling to the familiar atoms, until their concourse after this division again takes place in the same way, for that fresh formation of the dissolved body which will properly be, and be called, resurrection”. Ccel.org.
1978년 4월 16일은 부활주일이었다. 현천장로교회(김유식 전도사)에서 세례를 받았다. 교회에 원입이 된지 4년 4개월 만에 근무하던 학교 근처 섬기던 교회(기장교회)에서 원주 영강교회 진연섭 목사 주례로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전도사가 시무하던 현천장로교회는 영강교회 소속이었다. 나의 비번도 세례 받은 날짜를 활용할 정도이다.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요단강에서 침수하여 받으시던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했다고 한다. 나 역시 이는 내가 사랑하며 기뻐하며 마음에 들어 하며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 음성은 반백년이 지나오는 동안 늘 내게는 위로와 격려, 큰 힘이 되었다. 어려울 때나 기도할 때마다 성경 말씀 중에 생명의 양식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학습은 대관대교회(감리교회)에서 입교는 처음 원입이 되었던 봉산교회(감리교회)에서 하였다.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교회를 섬기며 직장으로 근무하던 곳에 개척을 한 지역교회를 동시에 섬겼으니 하나님의 크신 복이었다. 1977년부터 전도를 하였고 1984년 병지방교회(성도교회, 감리교회)를 창립했으며 시흥, 여주 등 개척한 교회를 협력하며 섬겼고 예배당 건축을 지원하는 등 본 교회와는 별도로 섬겼으니 감사하다. 이천남지방 대서교회(감리교회)관악찬양단을 조직해주었고 남양주지방 학생부 여름 수련 지원 등으로 섬겼으며 2014년부터 준비하였던 몽골 날래흐 산돌교회를 2017년에 창립하였다. 몽골M.T.B.C신학교 성일장학회를 설립하여 후원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부활절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성령의 열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