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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살았고, 운동력이,...)의 성경 본문 히 4:12-13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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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25 23:52:08
먼저, 그는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였다.
여기의 [말씀](로고스, λόγος)에 대해 모페트(J. Moffatt)는, “필로(Philo)는 ‘쪼개는 자’인 로고스(λόγος)에 관해 말한다(창 15:10).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필로(Philo)의 사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필로(Philo)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ὁ λόγος τού θεού)에 대해 (1) 성자 그리스도의 인격(요 1:1)이라는 설,① (2) 약속이나 복음(4:1, 2)과 같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설,② (3)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설③ 등이 있다. 이러한 견해들 중에 (2)설과 (3)설은 같은 견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성자 그리스도라는 견해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ㅡ약속, 복음, 경고 등ㅡ이라는 견해로 압축할 수 있다.
벤겔(J. A. Bengel)과 모리스(L. Morris)와 휴스(P. E. Hughes) 등은 성육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결코 검으로 언급된 적이 없으며, 다만 검을 사용하는 분으로만 나타나 있다(수 5:13에서 인용. 참조: 계 1:16, 2:12, 19:15)는 점을 들어 성자 그리스도라고 하는 견해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검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검과 같은 특성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설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집약적 구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확대 해석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과,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옛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불신하고 불순종한 결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맹세는 또한 오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맹세이기도 하다(4:7의 주석을 보라.)고 한 점을 보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성육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집약적으로 구현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다(참조: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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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ὁ λόγος τού θεού)의 특성은 아래와 같다.
[살았고](ζών)는 첫 번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 방도를 설명하는 베드로전서 1:23 후반의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와 같은 뜻이다. 거기서도 {하나님의 ‘말씀’(로구, λόγου)이란 하나님의 자기 계시 곧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기록된 말씀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고, 그 결정적이며 핵심적인 내용은 물론 그리스도의 “복음”(R. C. H. Lenski, A. T. Robertson)이다. 켈리(J. N. D. Kelly)는 “생명을 부여하거나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항상 살아 있고(창 1:3-, 신 32:47, 시 33:9, 빌 2:16), 또한 그 말씀은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에(사 40:6-8, 벧전 1:25) 항상 있는 말씀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그 말씀은 영원한 생명으로서 생명체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한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을 거듭나게(중생케) 하는(행 7:38, 요 6:63, 엡 2:1, 5, 약 1:18) 복음의 진리이다.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한 적이 있다}(벧전 1:23의 주석).
[운동력이 있어]는 두 번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낱말은 에네르게스(ἐνεργής)로서 ‘능률적인’, ‘효과 있는’, ‘효과적으로 행하는’ ‘유능한’, ‘실력 있는’ 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운동력이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깨닫게도 하고, 회개하게도 하고, 믿어 구원받게도 하고, 반면에 믿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기도 하는 것이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는 세 번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또는 사람의 말을 검에 비유한 예는 성경에 흔하다(시 57:4, 64:3, 사 49:2, 엡 6:17, 계 1:16, 19:15, 21 등).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통 검이 아니라, 양쪽에 날선 검에다 비유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터틀리안(Tertullian)과 어거스틴(Augustine)은 신약과 구약의 두 부분으로 해석하였고, 헬베우스와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것들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것들을 말씀하는 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두 가지 기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④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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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P. E. Hughes)는 “하지만, 그러한 설명들은 만족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만일 특별한 의미가 상징적인 언어에 주어졌다면-이는 어떤 문제들을 야기시킨다-하나님의 말씀은 두 날카로운 날을 가진 검과 같이 항상 저편 곧 구원이든 심판이든 간에 자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한편으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라고 하셨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검은 한편으로는 생명의 날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망의 날로 동시에 자른다(참조: 고후 2:15, 16).”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복과 구원이 되고, 반면에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화와 멸망이 되는 것이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는 네 번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표현은 양쪽에 날이 선 검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휴스(P. E. Hughes)는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 인간 구성체의 심리적 혹은 해부학적 분석을 하는 데 관심이 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내부 깊숙이 있는 인격에 하나님의 말씀이 관통하는 것에 대하여 사실적인 관점으로 묘사하는 데 있다.”라고 하였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외부는 물론, 내부를 속속들이 분해하고 분석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혼]은 프쉬케스(ψυχής)로서 ‘동물의 생명’, ‘생기’(계 8:9, 16:3), ‘인간’(마 6:25), ‘몸과 구별되는 인간의 영혼’(마 10:28), ‘애정과 의지의 자리로서의 영혼’(행 14:2, 22), ‘자아’(마 10:39), ‘인격’(롬 13:1) 등을 의미한다. {케네디(H. A. A. Kennedy)는 “구약성경에서는 대체로 개인의 생명 원리를 지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특별하게 정서적 행위성을 뜻하고, 가끔 인격적 대명사로 대치된다.”라고 하였고; 불트만(R. Bultmann)은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바울의 경우에도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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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케(ψυχή)는 ‘생명력’ 혹은 ‘생명 자체’를 의미한다고 하였고; 고펠트(L. Goppelt)는 “프쉬케(ψυχή)란 베드로전서에 비교적 자주 곧 여섯 번 나타난다. 그 말은 인간의 자아나 인간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벧전 1:9, 3:20, 4:19),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중심을 의미하기도 한다(벧전 1:22, 2:11, 25).”라고 하였다}(벧전 1:9의 주석).
[영](프뉴마토스, πνεύματος)은 ‘인간의 내적 생명’(고전 2:11, 롬 8:9)을 의미하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사는 구속받은 인간’을 지시한다. 도드(C. H. Dodd)는 “바울은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 하여(고전 6:17), 신자의 내적 인간의 존재 형식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존재 형식과 같음을 보여 주고 있다.”⑤라고 하였다. 이러한 존재 형식을 갖는 인간은 영으로 성령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고(롬 8:16),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고전 14:2), 영으로 기도하며(고전 14:14), 영으로 찬미한다(고전 14:15). 또한, 영이란 사고하고(롬 8:6), 인식하며(고전 2:11, 롬 8:16), 의지하고(롬 8:4-5), 판단하는 기능(고전 5:3)이 있다. 바로 {이 영의 지배를 받는 영의 도구가 마음인 것이다(C. R. Erdman, 이상근)}(엡 4:23의 “심령”의 주석).
그러나 영과 혼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것이며, 실상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성경에서 영과 혼은 둘 다 호흡, 생명, 생명의 원리를 의미한다. 혼은 동물적 생명으로, 영은 보다 높은 생명으로 분류되나, 사실인즉슨 후자도 동물적 생명을 의미하기도 하고(전 3:21, 계 16:3), 또 전자가 하나님께 적용되기까지 한다(10:38, 사 42:1, 암 6:5). 이처럼 두 낱말은 교대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간의 구성 요소를 몸과 혼으로 설명하는가 하면(마 6:25, 10:28), 몸과 영으로(전 10:7, 고전 5:35) 설명하기도 한다. 인간의 죽음을 혼이 떠나는 것으로 설명하는가 하면(창 35:18, 왕상 17:21, 행 15:26), 영이 떠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시 31:5, 눅 23:46, 행 7:59).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는 다섯 번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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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3:8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 [생각과 뜻]이 비롯되는 것이다.
모페트(J. Moffatt)는 “만일 [생각(엔튀메세온, ἐνθυμήσεων)과 뜻](엔노이온, ἐννοιών)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감정과 숙고 사이의 차이이지만, 그 당시의 용법으로는 두 낱말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엔노이아(ἔννοια)는 ‘개념, 생각’과 마찬가지로 ‘목적, 의도’를 의미하였다.”라고 설명하였다.
[감찰하나니]는 크리티코스(κριτικὸς)로서 ‘분리’, ‘식별’, ‘판단’, ‘심판’ 등을 의미한다.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도, 심지어 그 자신도 자신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정확하게 식별하고 판단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실체 없는 실재인 인간의 마음까지도 식별하고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에 대해 논한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하나님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3】[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의 [지으신 것](크티시스, κτίσις)은 로마서 8:39에서와 같이 ‘창조된 모든 것’이라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의 [나타나지]에 대해 미헬(Otto Michel)은 “신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오는 아파네스(ἀφανὴς: Aeschylus 이래 사용됐고, 여러 비문들과 파피루스와 LXX에 나온다.)는 ‘감추어진’, ‘은폐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상의 모든 사물은 하느님 앞에 드러나 있으므로 감추어져 있는 것이 없다. 헬레니즘 문서들은 이 주제를 끊임없이 다루고 있지만(필로, 요세푸스), 히브리서에 가장 가까운 병행구는 에티오피아 에녹서 9:5이다. ‘당신은 실로 만물을 지으셨으며, 만물을 다스리는 권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만물은 당신의 눈앞에 드러나 있으므로, 감추어져 있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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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크(Spicq)는 “히브리서 저자는 별 신경을 쓰지도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에게로 옮겨가면서 마침내 그들을 일치시킨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으며, 그 능력과 그 내용은 오직 그로부터만 나오기 때문이다.”⑥라고 하였다.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의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πρὸς ὅν ἡμίν ὁ λόγος)에 대해서는 우리가 관계하게 되는 하나님이라는 설⑦과 우리가 계산해야 할(빚을 갚아야 할) 하나님이라는 설⑧이 있다. 전자보다 후자가 뜻을 더 명료하게 하는 것 같다.
[드러나느니라]에 대해 휴스(P. E. Hughes)는 “테트라켈리스메나(τετραχηλισμένα: 완료 분사 수동태)로서 성경 헬라어에서는 이곳에서만 발견된다. 이는 트라켈로스(τράχηλος: 목)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한데, 이 문맥은 이 단어가 그 일반적 의미에 있어서 귐노스(γυμνός: 벌거벗다)와 οὐκ…ἀφανὴς(나타나지 않음이 없다)와 동의어임을 보여 준다. 이같이 이 용어의 일반적 의미는 명백하며 의미론적 주석 작업을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어떻게 동사 트라켈리제인(τραχηλίζειν)이 이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미헬(Otto Michel)은 “크리소스또무스(Chrisostomus, Homilie 7, 1)는 껍질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난 짐승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의 입장을 따르는 다른 주석가들은 매달린 상태에서 목이 젖혀진 채, 칼에 찔려 죽을 때를 기다리는 제물을 상징하고 있다. 후자의 해석이 가장 적절하다.
(이 낱말의 의미를) 헬레니즘적으로 도출하는 또 다른 관점은 레슬링 경기에서 사용하는 교묘한 공격 기술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상대방을 바닥에 메다꽂기 위해 상대의 목을 아래로 누르는 기술을 말한다(Plutarch, Anton. 33; Ps-Plat, De amat. 132C; Themistios, Orat.23). 레슬링 경기에서 쓰여진 표현에 따라 ‘못살게 굴다’(Philo, De mut. nom. 81; De vit. Mos.Ⅰ 322; Quod omn. prob. lib. 159; Josephus, Bell. Ⅳ 375)나 ‘위압하다 ’(Philo, De Cherub. 78; Quis rer. div. her. 274; De vit. Mos.Ⅰ297)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성립되었던 것 같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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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Origen, Oecumenius, Theophylact, Thomas Aquinas”(in 이상근), C. R. Erdman.
2) “Augustine, Eusebius, Dods, Vincent”(in 이상근), A. C. Purdy, C. W. Carter,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3) “Bleek”(in 이상근), H. Alford, J. Wesley, A. Barnes, W. Barclay, R. C. H. Lenski, P. E. Hughes, J. Brown, F. F. Bruce, P. Ellingworth. 비교: L. Morris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것과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해진 말씀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4) in P. E. Hughes.
5) C. H. Dodd, The Meaning of Paul for Today(London: Collins Clear Type Press, 1971), p. 60.
6) in P. E. Hughes.
7) J. Calvin, J. A. Bengel, H. Alford, J. Barbmby, A. C. Purdy.
8) “그리스 교부들”(in J. Moffatt), L. Morris, F. F. Bruce, J. Brown, P. E. Hughes, T. Hewitt, M. Henry, A. Barnes, 이상근. 참조: J. Moffatt는 전자도 포함시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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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히브리서(서울: 글벗사, 2001, 1판 1쇄), pp. 148-154.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들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설교집 35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