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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적 설교/ 예수의 믿음/로마서 3장26
장병선
- 1500
- 2022-07-04 22:15:4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또한 예수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라‘
공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
다들 그러시겠지만, 내가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어 평생 간직하며 탐구해온 질문은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였다.
기독교적인 바탕이 전혀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 소년기(중1) 처음 교회에 나가기 시작, 예수에 대하여 수없이 들었고, 책을 읽었고, 목사가 되어 설교하였으면서도, “나는 예수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고, 제대로 전하고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목회 후반기에 ‘역사적예수‘ 탐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모임인 ’예수학당‘에 들어가 예수를 찾았고,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가, 한국교회가 살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하며 찾았다.
그 결과, 얻은 결론은, 성숙한 신앙인, 성숙한 교회 공동체는 ’예수에 대한 믿음‘에서, ’예수의 믿음‘, 즉, ’예수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졌던 믿음‘으로 까지 자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유아기적 상태인 ’예수에 대한 믿음“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할 수 밖에 없다,
목회자는 끊임없이 질문하며, 궁극적 답변을 향하여 나가는 이들이어야 한다.
그러할 때에만, 미래의 비젼을 보여주고, 그 비젼을 중심으로 생동하는 생명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영적지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예수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예수의 믿음’이어야 하는가,
1.‘예수에 대한 믿음’이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토양속에 한국교회는 뿌리를 내렸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의 문화와 정서속에는 무속신앙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무속신앙의 특징은 천지신명께 정성을 다 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들이 믿었던 신이 그런 신이었다.
* 기계신(machina Deus), ‘자판기’ 신,
예로부터 우리의 어머니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장독대에 정한 물 한 사발 떠다 놓고, 천지신명께, 칠성님께, 혹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군대나 객지에 나간 자식을 위해 빌었다.
이 땅에서 기독교신자가 되는 과정은 대개 비슷하다.
먼저 믿은 집사나 권사의 전도로 처음 부흥회에 나갔다가,
”예수만 믿으면 모든 죄 사함받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부흥사의 열광적인 설교에 크게 감명을 받고 교회에 첫발을 딛게 된다. 예수님을 하나의 해결사로 이해하고 믿게 된다.
틀린 것은 아닌데, 나는 가만히 있어도 예수님이 다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은 유치한 믿음이다.
그 때부터 장독대에 정한수 떠놓고 비는 대신 새벽기도에 나가 군대나 객지에 나간 자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 나라인가, 하는 고민보다는 가족의 안전과 복에 대한 간절함, 만사형통에 대한 믿음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의지의 대상이 천지신명, 칠성님, 부처님 대신 신령한 능력을 가진 예수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러한 기복신앙이 한국교회 성도들의 바탕이 되었고, 목회자들은 무당이 하던 일을 대신하는, 양복입은 서양무당이 되었다.
새로울 것 없는 목사의 설교는 매주 반복된다. ‘믿으면 이루어진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과연 그런가, 예수에게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마력이 있는가,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인가, 일천번제 드리면 소원성취할 수 있는가,
이렇게 설교하는 것은 예수를 이용해 사기치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복을 비는 어머니의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숭고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영육이 강건해야 하고, 물질적으로 궁핍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예수님에게 빌고만 있어서는 인간의 문제, 세상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복된 길, 하나님나라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 현실문제에 대한 명확한 자각과, 하나님을 대적하는모든 어둠의 세력과 비인간적인 법과 제도의 개선을 위한 나의 능동적인 결단과 행동이 따라야 한다.
우리크라이나 전쟁은 누가 일으킨 것인가.
사람이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 그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것도 사람이다.
매일 우크라이나 병사 300명, 그 보다도 훨씬 많은 러시아 병사들이 가공할 무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생명이요, 누군가의 사랑하는 자식이요, 형이요, 오빠요, 동생이다.
우리는 좀 더 냉정해지고, 정직해야 한다. 우리가 목사이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이며 무엇을 행할 것인가?
자신도 믿지 못하면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기만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러려니..’하고 믿는 신앙은 힘이 없다.
‘그러려니’하며 하는 설교는 확신을 줄 수 없다.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가슴을 뜨겁게 할 수 없다.
공동체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을 주고,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
2. 지금 일어날 수 없는 일, 일어나지 않는 일은 예수님 당시에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지금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물이 포도주가 되는가. 믿음만 있으면 한강 물 위를 걸어서 건널 수 있는가?
그런데, 이미 복음서 저자들이 참 인간 예수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존재로 둔갑시켜 놓았다.
신약 4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집인 도마복음서를 바탕으로 저자자신들의 신앙적관점에 따라 살을 덧붙이거나 변형시켰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예수 연구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사실에 대한 기록이 복음서마다 차이가 나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강조하려 하다보니, 본래의 예수와는 다른,괴상한,도깨비같은 예수를 만들어 냈다.
* 로마황제를 신격화 하거나 김일성을 신격화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복음서들은 이와 같이 초인간적인 초능력자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 ‘예수가 가졌던 믿음’을 강조 한다.
바울 신학자들 가운데는 본문 로마서 3장26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에서 ‘예수 믿는 자’(pistis tou Christou)를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예수의 믿음‘, 즉, ’예수가 가진 믿음을 가진 자‘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NIV)’Who have faith in Jesus’ = 예수안에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
’faith’는 ‘믿음’으로 번역되지만, ‘신실성’을 뜻 하기도 한다.
예수의 믿음은 천지가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신실성에 응답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예수에 대한 믿음’에서, ‘예수께서 하나님께 가졌던 믿음’ 그 믿음이 가능케 했던, 말씀을 육화하신 ‘성육신의 삶’을 따라, 우리 또한 성육신적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알고, 믿고 따르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여러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젼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세상속에서 신실성을 가지고 책임성있게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공동체에 의하여 이루어져 가는 나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세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는 삶(히11:25)을 택하였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심정(골1:24)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오늘 주의 종으로 부름받은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다.
자식이 다 자라서도 부모 품을 떠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여
사는 자식(켕거루족)은 부모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인된 자녀가 되어야 한다.
그리함으로 성숙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되어야 한다.
본 회퍼의 말로 말씀을 마친다.
’성인된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책임성 있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