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스데반 설교.....)의 성경 본문 행 7:1-8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565
  • 2022-06-27 17:53:15
천사의 얼굴과 같은, 성령 충만한 스데반의 얼굴을 보고 충격은 받았지만, 감동적인 은혜는 받지 못한 교권자들 중 대제사장에 대해, 누가는 【1】[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라고 하였다.
[대제사장]은 4:6의 주석을 보라.
[이것이 사실이냐]의 [이것]은 6:11의 주석과 6:13-14의 주석을 보라.
스데반이 사실이라고 대답하면, 영적 의미를 모르는 유대 교권자들에 의해서 사형 선고를 받을 수도 있는 중대한 질문이다. 그런데도 성령 충만하여 천사의 얼굴과 같은 얼굴이 된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로 삼았다.
그런 스데반에 대해, 누가는 【2】[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하였다.
스데반은 위증자들이 모세의 규례 운운한 점(6:14)과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의 속뜻이 아니라, 문자적 해석에 치우치다가 율법주의에 빠져 모세를 거의 신격화하고, 율법을 절대시하는 오류를 빚은 점을 의식해서 [조상 아브라함]을 들고 나온다.
[부형들이여 들으소서]의 전자(파테레스, πατέρες)는 공회원들을, 후자(아델포이, ἀδελφοὶ)는 모든 참관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스데반은 [아브라함](3:25의 주석을 보라.)을 가리켜 [우리 조상]이라고 하여 교권자들을 비롯한 모든 참관자들과 한 조상의 후손임을 밝힌다.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의 [하란]은 메소보다미아 북부의 성읍이다. 우르파(Urfa: 고대의 에뎃사, Edessa)의 남쪽 35km 지점 유브라데 강의 지류 발릭 강(R. Balikh)에 연하는 현재의 하르란(Harran)과 동일시된다. 이 하란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동하기 전에 일시 체재한 곳이었다(창 11:31, 32, 12:4, 5, 행 7:2, 4).
[메소보다미아]는 티그리스와 유브라데 두 강 사이의 지역을 가리키며, 북쪽 부분은 산지로서 비옥하지만 남쪽의 티그리스 강 방면의 땅은 소금의 사막이다. 오순절 당시에도 주민이 있었으며(2:9), 스데반은 갈대아 우르도 메소보다미아에 포함시켰다(7:2). 고대 4대 문명의 발생지의 하나로서 메소보다미아는 문화사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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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보다미아(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는,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는 창세기 12:1-3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 15:7과 느헤미야 9:7과 여호수아 24:2-3 등에는 본문처럼 갈대아 우르(메소보다미아)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였다. 또, 요세푸스(Josephus, Ant. i. 7:1)나 필로(Philo, Abra 14:15)에는 본문처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①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아버지 데라와 함께 떠나 하란에 갔고, 거기서 데라가 죽은 후에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② 렌스키(R. C. H. Lenski)는 “산헤드린(공회)에서 그의 비평가들은 그가 오류를 옳은 것으로 말했다면, 그때 거기서 곧 발언을 막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영광의 하나님](ὁ θεὸς τής δόξης)은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시 29:3).
[영광](독세스, δόξης)은 {바울 서신에 75번 나타난다. 이 말은 관련되기는 하지만,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진 말이므로 보다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이 유익하다. 명사는 동사 도케오(δοκέω)와 관련되며, 의견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Ⅳ Macc. 5:18). 나아가서 이 말은 어떤 사람에 대한 좋은 견해 곧 ‘칭찬’, ‘찬양’, ‘명예’, ‘경의’를 뜻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흔한 영광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Kābhōdh는 ‘무게’, ‘무거움’, ‘짐’(사 22:24)이라는 기본적인 의미가 있으며, 여기서부터 ‘물질’, ‘부’, ‘존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31:1). 나중에 ‘빛남’, ‘광휘’, ‘광채’, ‘훌륭함’의 요소가 물질의 의미에 덧붙여졌다. 이와 같이 그 말은 여호와의 임재에 관한 찬란한 물질적 명백성을 지시하는 데 사용되었다(출 16:7, 사 6:1-5).
바울은 그 말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1) 피조물 또는 그에 속한 것에 부여된 ‘찬양’이나 ‘영예’이며, 그 반대말은 ‘욕됨’(고후 6:8) 또는 ‘부끄러움’(빌 3:19)이다. (2)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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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는 ‘숭배’나 ‘경의’(롬 3:7, 23, 4:20, 11:36, 고전 10:31 등)이다. (3) 어떤 사람에게 명예나 영예를 돌리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의 영광을 높이는 덕이 있는 사람이다(고전 11:7, 15, 고후 8:23, 살전 2:20). (4) ‘외적인 빛남’, ‘광채’, ‘찬란함’, ‘광휘’이다(고전 15:40, 41). (5) 하나님께서 빛나는 구름에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롬 9:4). (6) 하나님(롬 1:23, 고후 4:6) 또는 그리스도의 명백한 탁월성, 절대적 완전, 왕적 존엄이나 장엄이다(고후 3:18, 4:4, 딛 2:13, 살후 1:9). (7)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롬 6:4)이다. (8) 하나님과 접촉하거나 접촉해 온 자들을 둘러싼 빛이다(고후 3:7). (9) 그리스도께서 이미 들어가셨고, 또한 신자가 들어갈 복된 나라나 장소이다(롬 8:18, 딤전 3:16). (10) 인간 혹은 사물의 탁월함이다(고전 15:43, 고후 3:10, 엡 1:6, 14, 18, 빌 3:21, 4:19)}(빌 1:11의 주석).
이어서 스데반은 【3】[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지역에서 우상들을 숭배하던 아버지 데라(수 24:2)와 살았던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 그에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과 사람들을 떠나라는 것이다. 이 지시는 그러한 지역과 사람들과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스데반은 【4】[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라고 하였다.
연대상으로 어려운 문제를 내포한 구절이다. 창세기를 보면, 데라가 70세에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창 11:26), 데라가 하란에서 죽은 때는 205세이었고(창 11:32), 데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났을 때는 75세이었다(창 11:32-12:1, 4). 그렇다면, 데라는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에 60년을 더 산 셈이 되므로 모순이 된다. 필로(Philo, De migr. Abr. § 177)도 본문과 같이 기록하였다③.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시도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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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마리아 사본(Samaritan Pentateuch)의 창세기 11:32에는 데라가 죽은 때가 205세가 아니라 145세로 되어 있다.④ 이 견해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가 죽자 하란을 떠난 것이 된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본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R. C. H. Lenski).
(2)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것은 아버지 데라가 실제로 죽었을 때가 아니라, 우상 숭배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을 때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할 근거가 없다.
(3) 벵겔(J. A. Bengel)은 “데라가 하란에 살고 있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외인으로서 가나안에 거주하면서 어느 정도 아버지의 가정을 소유했다. 그러나 아버지 데라가 죽었을 때에 가나안에서만 거주하기 시작했다.”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근거가 없는 상상에 불과하다.
(4) 유대의 경건주의자들에게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식이 떠나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므로, 죽은 후에 떠난 것으로 전해져 왔다(Meyer).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이 사실을 알면서 왜곡했을 리가 없다는 점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5) 창세기 11:26에 보면, 데라가 70세에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먼저 언급된 것은 그의 막대한 중요성을 나타낸 것이고, 처음 태어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나홀은 리브가의 할아버지이었고, 하란은 롯의 아버지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은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손녀인 리브가와 결혼하였다. 그렇다면, 나홀이 아브라함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데라가 70세에 낳은 것은 하란, 또는 나홀이고, 아브라함을 낳은 때는 130세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데라가 205세에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것이 된다. 이 견해는 다수의 학자들⑥이 지지하는 것인데 가장 그럴 듯하다.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현재 이스라엘이 거하는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셨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스데반은 【5】[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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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셨지만, 그 땅에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셨다. 창세기 23:1 이하의 기사는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장사지낼 겸 매장지로 삼기 위해 은 사백 세겔을 주고 매입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아브라함과 그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창 12:7, 17:8). 따라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유업과 자손을 얻어야 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예언에 대해, 스데반은 【6】[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나그네로서 40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할 것이라는 창세기 15:13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12:40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 삼십 년이라”(칠십인역)로 되어 있어 문제가 된다. 요세푸스(Josephus)는 400년(Ant. ii, 9:1)과 430년(Ibid., ii, 15:2)이라는 두 가지 기록을 하고 있다⑦. 갈라디아서 3:17에는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때부터 모세가 율법을 받은 때까지 430년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400년이란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때부터 애굽에 이주하기까지의 기간, 또는 애굽의 종살이를 시작하기 전까지의 기간인 30년을 빼고, 순전히 애굽의 종살이를 한 기간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계속된 예언에 대해, 스데반은 【7】[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이 구절의 전반은 창세기 15:14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고, 후반은 출애굽기 3:12을 인용한 것이다.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는 이스라엘을 종으로 부린 애굽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다. 이 재앙은 애굽으로 하여금 참 구원자 하나님을 깨닫고 회개하고 믿어 구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이며 채찍이었다(출 7:5, 12, 17, 9:6, 14, 15-16, 20, 29-30, 10:1-2, 7, 16-17,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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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의 심판을 내린 후에,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나와서 호렙산(출 3:12)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라트류수신, λατρεύσουσίν)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하나의 언약을 하신 것에 대해, 스데반은 【8】[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라고 하였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5절)을 하신 하나님께서 그 땅을 물려받을 자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 [할례의 언약]은 창세기 17:10을 인용한 것이다.
[할례]는 페리토메스(περιτομής)이며, {고대의 애굽과 앗수르와 바빌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셈족 사이에 널리 행해진 포경 수술과 같은 것이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할례는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증거요 선민의 표시로서, 난 지 팔 일 만에 행한 종교 의식이었으며(창 17:10-14), 이스라엘의 종들도 할례를 받았다. 또한, 외국인 거주자는 반드시 할례를 받은 후에야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다(출 12:48-49).
할례란 (1) 육체적 이유, 즉 질병 예방과 결혼 준비를 위한 것, (2) 히브리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희생의 한 형태, (3)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의 표징이었다(창 17:11)}(엡 2:11의 주석).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에 대한 경우처럼, 율법의 요구 중 하나인 할례에 대해서도 그 의식(형식)을 부당하게 신뢰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유대교의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게헨나(Gehenna) 문 옆에 앉아서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책임져 준다고 한다(Gen R. xlviii). 일반적으로는 오직 할례받은 어린이들만이 내세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할례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례를 통하여 중생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세례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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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유대인은 사람들을 할례자와 무할례자라는 두 부류로 나눔으로써, 사실상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로 분류하고 있었던 것이다”(E. F. Harrison). 이 점에 대해 “메나켐 랍비(Rabbi Menachem)는 자신의 「모세 오경 주석」에서 ‘할례를 받은 자는 아무도 지옥을 볼 자가 없다.’라고 말하였고, 또 메드라쉬 틸림(Medrash Tillim)은 자신의 주석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여 말씀하시기를 할례받은 자는 아무도 지옥에 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였다”(Hodge).⑧}(롬 2:25의 주석).
그러나 바울은 문자적 의미의 할례를 영광으로 알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의 할례 의식을 비판하여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엡 2:11), 또는 “손 할례당”(빌 3:2)이라고 부른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구약성경 자체도 문자적 의미와 대조하여 도덕적 또는 영적 의미에서 마음(신 10:16, 30:6, 렘 4:4, 레 26:41)과 입술(출 6:12, 30)과 귀(렘 6:10)의 할례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는 할례를 율법과 관련지어 율법의 실행 여부에 의해 할례가 유익하게도 되고, 무할례가 되기도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할례자 또는 무할례당이란 유대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경멸적인 호칭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바로 그들이 무할례자라고 공박하는 것이다.
바울은 참된 할례에 대해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 2:11.⑨ 비교: 롬 2:29, “마음의 할례”)라고 하며, 또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⑩라고 설명하고 있다.
[언약]은 디아테켄(διαθήκην)이며 ‘증거’, ‘약속’, ‘유언’, ‘계약’, ‘언약’ 등을 의미한다. 모든 하나님의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우신 주권과 복종의 관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새 언약(신약)의 예표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할례의 언약을 좇아 이삭을 낳아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다. 그와 같이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아 할례를 행하였다. 열 두 조상, 즉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이다(창 35: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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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in 이상근.
2) R. Earle, R. C. H. Lenski, I. H. Marshall, J. R. W. Stott, 이상근.
3) in E. Haenchen.
4) 참조: R. C. H. Lenski, 이상근.
5) in 이상근.
6) R. C. H. Lenski, R. Earle, “Hackett, Wordsworth, Alexander”(in 이상근), 이상근.
7) in 이상근.
8) in 김선운.
9) 저자의 골로새서 2:11의 주석을 보라.
10) 저자의 빌립보서 3:3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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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사도행전(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230-237.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설교집 35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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