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하나님의 사랑의...)의 성경 본문 롬 5:6-11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290
  • 2022-07-22 06:24:32
5:1-5에서 칭의의 결과인 화평과 은혜와 소망 그리고 성취를 보증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논한 바울은, 이제 칭의의 근거인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자세하게 논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하였다.
[아직]의 원문 에티 가르(ἔτι γὰρ)는 א, A, C, Dgr, 81, 104, 1241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B 사본에는 에이 게(εἴ γε: ‘만일 적어도’ 또는 ‘정말로’)로 되어 있고; Db, G 사본에는 에이스 티 가르(εἰς τί γὰρ: 왜냐하면 누가)로 되어 있다.①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연약]은 아스테논(ἀσθενών)으로서 ‘나약한’, ‘병약한’, ‘도움받을 수 없는’, ‘죽어 가는’, ‘소망이 없는’ 등을 뜻한다. 여기서는 ‘인간의 죄성’ 또는 ‘인간의 한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클라케(A. Clarke)는 “그 약함은 악을 대항하기에도 무력하고, 또한 선을 행하기에도 무력하다.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서 자신을 구해 낼 힘이 전혀 없다.”라고 설명하였다. 산데이와 헤들람(W. Sanday & A. C. Headlam은 “우리 스스로는 어떠한 의도 이루지 못하는”이라는 다소 전문적인 의미로 이해하였다.
그 때에도 인간들에게는 양심 또는 율법이 있었지만, 오히려 인간의 나약성을 더욱 부각시켰을 뿐이다. 양심적인 행위나 율법 행위로 의에 이르려고 하면 할수록 그 만큼 더 자신의 무력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대해 하리손(E. F. Harrison)은 “수세기 동안 시행된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이르기에는 나약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었다. 더 이상 시험은 필요하지 않았다. 곧 때가 찬 것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약대로]는 카타 카이론(κατὰ καιρὸν)으로서 직역하면 “때를 따라”이다. 때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긴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기간보다도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시간을 강조하는 말이다”(E. F. Har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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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기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중(엡 1:4, 창 3:15-, 사 7:14, 8:3, 11:1-, 42:1-, 53:2-)에 특별히 역사 속에 개입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때를 말하는 것이다(갈 4:4,② 엡 1:10). 즉, “그리스도께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신 그 세계사의 순간의 적합성을 말한 것이다”(W. Sanday & A. C. Headlam). 그리스도 예수의 출현과 죽음은 연약한 죄인들에 대한 갑작스런 동정심의 발로나 성의 없는 무계획적 우연사가 아니라, 영원한 구원 계획에 맞춰 때를 따라 이뤄진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기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사랑받을 자격 유무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하는 것이다.
[경건치 않은 자](아세본, ἀσεβών)는 1:18의 주석을 보라.
[위하여]는 휘페르(ὑπὲρ)로서 ‘대신하여’와 ‘위하여’라는 두 가지 뜻이 다 포함되는 것이다(Trench).③
[죽으셨도다]는 3:25의 주석을 보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얼마나 원대하고도 특수한 하나님의 사랑인가에 대해, 【7】그런데(원문에 가르, γὰρ가 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그러나(원문에는 γὰρ가 있다.)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설명하고 있다.
“7절 전반은 적절한 유추가 아니다. 또한, 7절 후반에서 7절 전반의 유추를 수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별로 솜씨가 좋지 않다”(E. Ksemann).
이 구절의 경우에 [의인]과 [선인]을 (1) 동의어로 이해하는 설(T. K. Abbott, H. A. W. Meyer, Lipsius),④ (2) 전자는 남성으로, 후자는 중성으로 이해하는 설(Godet),⑤ (3) 전자는 형용사격으로, 후자는 명사로 이해하는 설, 즉 의롭고 선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설(Moffatt, Murray),⑥ (4) 둘 다 남성으로 보아 구별하여 이해하는 설⑦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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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가 신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보아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인 (4)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산데이와 헤들람(W. Sanday & A. C. Headlam)은 “의인이 자신의 매인 조문을 지키는데 비해, 선인은 더 따스하고 더 친절하여 흔쾌히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도록 감동을 주는 어떤 것이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의인은 공명정대하여 실제로 배척당하지는 않지만 호감을 얻지는 못한다. 그 반면에, 선인은 의로움이 부족하지 않으면서도 친절하고 자비로워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한다.”⑧라고 설명하였다. 웨슬리(J. Wesley)도 “의인은 자기 의무를 준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이다. 선한 사람은 매우 거룩하며, 사랑과 동정심과 친절함과 온유한 마음이 충만하고, 천진난만한 기품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유사한 설명을 하였다. 행동과 관련하여, 올스하우젠(Olshausen)은 “의인이란 요구된 모든 것을 행하고, 선인은 남이 요청할 수 있는 그 이상을 행한다. 전자는 존경을, 후자는 사랑을 모은다.”라고 설명하였다.⑨ 특히, 벤겔(J. A. Bengel)은 “모든 선인은 의롭다. 그러나 모든 의인이 선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이 구절에서 의도하는 참 목표는 의인과 선인의 구별이 아니라, 다음 구절의 내용이다. 【8】그러나(원문에는 데, δὲ가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즉 의인도 아니며 선인도 아니라 죄의 값으로 죽음과 멸망이 마땅한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으심은 인간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특이한 사랑인 것이다(요 3:16).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⑩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사랑]의 원어(τὴν ἑαυτού ἀγάτην)의 뜻은 ‘자기 자신의 사랑’으로 강조형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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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의 신비로운 일체성을 보게 된다(요 10:30).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란 하나님의 일시적이며 즉흥적인 동정심의 발로가 아니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신 하나님의 사랑(엡 1:4)⑪의 결정적 성취임을 알 수 있다.
[확증하셨느니라]는 3:5의 “드러나게 하면”의 주석을 보라.
요한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⑫라고 하였다.
바울은 앞 구절을 받아,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운, οὖν)은 바로 앞에서 말한 것을 받는 동시에 논리적 진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은 은혜인 칭의(과거)와 다가올 [진노하심](오르게스, ὀργής: 1:18의 주석을 보라.)에서 구원받을 최종적이며 완전한 구원(미래)을 구별하는 것이다. 전자는 과거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간이 살리심을 받은 것이고(엡 2:1),⑬ 후자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 기업을 얻는 것이다(고전 15:44, 50).⑭ “전자는 구원의 시작이고, 후자는 구원의 완성이다”(Hodge).⑮ 그리고 후자는 전자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다. 특히, 더욱은 폴로……말론(πολλῷ…μάλλον)으로서 ‘더욱 많이’ 또는 ‘훨씬 더’를 뜻한다. 이는 미래에 완전한 구원을 받을 것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울은 9절을 반복하여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9절의 반복이지만 부분적으로 다른 술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결론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하고 있다”(E. Kse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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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데이와 헤들람(W. Sanday & A. C. Headlam)은 “앞 구절과 이 구절은 칭의와 성화(성결)의 영역 구별을 위해 인용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문장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6절)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절)와 더불어 사상적 진보를 보여 주고 있다. 즉, 연약하니까 죄인이 된 것이고, 죄인이니까 원수가 된 것이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에크트로이 온테스, ἐχθροὶ ὄντες), 즉 ‘우리가 미워하는 자나 적대하는 자이었을 때에’에 대해서 (1) 능동적으로 보아 인간이 하나님을 적대한 것이라고 하는 설,⑯ (2) 피동적으로 보아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미움을 받은 것, 즉 하나님의 거룩하신 적개심이라고 하는 설,⑰ (3) (1)설과 (2)설을 종합한 것이라고 하는 설(W. Sanday & A. C. Headlam, C. E. B. Cranfield, 黑崎幸吉) 등이 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으므로(골 1:21, 창 3:7, 10),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진노 또는 하나님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 관계가 된 원인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의 죄이고, 궁극적인 원인은 사단이라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상호 적대 관계가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의 죄를 속함으로써 인간과 하나님의 적대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적대 관계를 해소시켜 화목한 관계로 바꾸었다(엡 2:16).
[화목되었은즉]은 피동형인 카텔라게멘(κατηλλάγεμεν)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한 화해란(골 1:22)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에 의한 것이며, 인간은 다만 화해되어질 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화해 사건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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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사건이란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첫 번째 단계인 칭의에 이은 두 번째 단계이자 보증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즉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살으심]은 1:4의 주석을 보라.
바울은 칭의와 화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련짓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완전한 구원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짓고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1) 과거의 성취인 칭의(롬 8:24, 엡 2:28), (2) 현재 구원받고 있는 성화(고전 15:2, 빌 2:12), (3) 미래에 성취될 완전한 구원으로 구분된다.
그와 관련하여, 케제만(E. Ksemann)은 “부활한 주의 생명력이 공동체를 포괄하여 유지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양자는 4:25에서처럼 구별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구원 사건의 상이한 측면, 즉 종말론적인 일회적 사건과 영속적인 사건을 각각 지시한다. 우리를 위하여 죽은 그리스도는 이제부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살며, 그가 과거의 악한 세력을 멸하였듯이 미래의 위협들을 분쇄할 것이다 그는 그의 인격에 있어서 더 이상 취소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우리를 위함’ 바로 그 자체이며, 그러므로 운명의 전환점(12-21절)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현재의 구원이 미래의 완전한 구원의 근거임을 말한 바울은, 그 구원이 현재의 즐거움의 원인이 되는 사실에 대해, 【11】[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하였다.
바울은 [이뿐 아니라](οὐ μόνον δέ, ἀλλὰ καί)를 통해 점층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10절에 대한 비교가 아니라(Lietzmann의 견해는 다르다), 이 단락을 이끌었던 자랑(καύχησις)이라는 처음의 주제에로 다시금 우리를 이끄는 말로서 매우 수사학적이다”(E. Ksemann).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의 [즐거워하느니라]는 현재 분사인 카위코메노이(καυχώμενοι)로서 ‘즐거워하며 자랑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 말은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된 상태에서 누리는 자랑스러운 즐거움을 의미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칭의, 하나님에 의해 주도된 화해, 그리고 미래의 완전한 구원인 영생을 누릴 것에 대한 확신 등에서 비롯된 영적 기쁨이요 자랑이다. 다시 말하면, 이 영적 기쁨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영원한 미래에 걸쳐 누리는 자랑스런 즐거움이다. 바울 자신은 8:2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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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in K. Aland, et al. ed..
2) 저자의 갈라디아서 4:4의 주석을 보라.
3) in 이상근.
4) in W. Sanday & A. C. Headlam.
5) in 이상근.
6) in 김선운.
7) “Philippi, Hodge”(in 김선운), “Lightfoot”(in E. F. Harrison), “Stuart, Gifford, Vaughan, Liddon”(in W. Sanday & A. C. Headlam), R. C. H. Lenski, F. J. Dake, M. Henry, H. Alford, J. A. Bengel, J. Wesley, A. Barnes, W. Sanday & A. C. Headlam, J. Barmby, E. F. Harrison, 泉田 昭, 이상근, 김선운, 조선출, 박윤선.
8) in E. F. Harrison.
9) in J. A. Bengel.
10) W. Sanday & A. C. Headlam: B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א, A, C, K, P, D, E, F, G, L 사본 등에는 있다.
11) 저자의 에베소서 1:4의 주석을 보라.
12) 저자의 요한일서 4:10의 주석을 보라.
13) 저자의 에베소서 2:1의 주석을 보라.
14) 저자의 고린도전서 15:44, 50의 주석을 보라.
15) in 김선운.
16) “Oltramare”(in 이상근), “Lightfoot” (in 김선운), A. Clarke, 泉田 昭.
17) “Godet, Vincent”(in 이상근), “Hodge, H. A. W. Meyer”(in 김선운), H. Alford,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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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로마서(서울: 글벗사, 2000, 2판 1쇄), pp. 229-236.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설교집 35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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