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은혜로 받은 구원 (엡2:1-10).
오재영
- 1715
- 2022-08-12 07:24:51
신앙 생활도 설교하는 목사를 포함하여 평신도들의 위치에서 섬김에 따라 여러 분야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본인이 은혜 안에서 깨달은 수준에 따라 자신이 만난 예수를 수시로 보완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른 신앙 생활에 올바른 교리도 중요합니다.
두 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에 관한 부분과 우리 자신에 관한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고 우리는 또 이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를 비롯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이들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사6장. 렘17:9) 다윗도 시편 19편 12절에서 고백합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가장 큰 불행은 사람들마다 각자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잘 모릅니다.
지금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무엇이 필요 한지를 모르고, 위치와 방향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어떠한 소유와 수고를 하고 있든지 우선 거듭남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고,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영원과는 관계가 없다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영적 상태를 지적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4-5절).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두 번에 걸쳐 우리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5절에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4-5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는 대가로(독생자를 죽이신)그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최근에 마르틴루터의 갈라디아 강해를 통하여 그토록 어려운 종교개혁의 역사를 어떻게 이루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1장 4절의 말씀“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음에 내어줌으로써 죄인 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비롯한 자신의 서신을 통하여 여러 부분으로 이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펴보는 사람마다 매우 겸손해지며 거듭남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담대 함과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거듭나지 못한 이들의 열 가지 상태.
1.자기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입니다(엡2:1-3 ).
본문의 죽음은 활동하는 육체나 도덕, 윤리적으로 생명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허물과 죄 가운데 ‘행하며’ 이 세상 풍조를 ‘따릅니다’(2절). 사막의 신기루를 따르듯 육체의 ‘욕심’을 따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삽니다(3절).이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도 못하며, 맛보지도 못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2.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절). 오늘 거듭나지 못한 이들의 문제를 말씀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거듭나지 않았다면, 거듭나지 못한 내가 문제입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대방이 근본 문제가 아니고, 부모가 나의 문제가 아니고, 나를 대적하는 적(敵)이 나의 근본 문제가 아니라 바로 거듭나지 못하고 주님 안에서 새롭게 창조 되지 못한 내(我)자아가 문제입니다. 나의 외적으로 부딪치는 다른 이들의 행동이나 환경이 아니라, 살면서 만나는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나의 본성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거듭나지 못하고 중생하지 못한 본성은 육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욕심이 많고, 다른 이들을 문제로 느끼도록 하는데 아주 뛰어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거듭나기 전의 우리를 “진노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망나니 자녀를 둔 부모의 탄식이 자녀를 향하듯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탄식과 진노가 우리를 향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매우 반항적이고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위엄에 전혀 무감각합니다. 이들의 가장 큰 비극은 오늘도 여전히 창조하시고 섭리 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3. 어둠을 사랑하며 빛을 미워합니다(요3:19-2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영적 빛이 비칠 때, 사람들은 저항합니다. 반대로 영적 어둠이 에워쌀 때는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거듭나지 않은 마음에서는 사랑과 미움이 활발히 움직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을 미워하고 미워해야 할 대상을 사랑합니다. 모두가 진리를 모르는 거듭나지 못한 이들의 비극입니다.
4.마음이 돌처럼 단단합니다(겔 36:26; 엡4:1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70년 만에 귀환 시키실 때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에스겔 36장26절). “내가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18절에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단순한 무지(無知)가 아닙니다. 더 깊은 곳에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즉,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돌처럼 굳고 거역하는 성향이 주님의 말씀보다는 사단에 의하여 이끌리는 것입니다.
5.하나님께 복종하지 못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로마서 8장7-8절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과 “육신에 있는”이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는 그 다음 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거듭났고 성령이 있는 이들과, 거듭나지 못했고 성령이 없고 육신만 있는 이들을 대비시킵니다.
6.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엡 4:18; 고전 2:14).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바울은 이러한 우리의 죽은 상태와 굳은 마음이 우리가 못하는 일에 대해 무엇을 암시하는지 또 한 번 보여줍니다. “육에 속한 사람(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가장 큰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일들을 어리석게 본다는 것입니다. 까닭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7.그리스도께 나오지 못하고 주님으로 영접하지도 못합니다(요6:44,65;고전12:3).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의 말씀은 무대의 배우나 교회의 위선자처럼 입으로‘예수는 주!’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도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예수는 주!’라고 하자 못한다는 것입니다. 죽었으며, 지각이 어두우며, 돌처럼 단단하며, 거역하는 마음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상태에서는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입니다!’ 라고 고백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이 과정을 세 차례나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예수님께 나오지 못합니다. 아버지께서 이러한 이끄심으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관계로 인도할 때, 이것을 거듭남이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요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6:37,44,65). 이끄심(drawing).하여 주심(granting).주심(giving) 같은 놀라운 역사는 한사람이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들이 없으면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거듭날 때, 새로운 선호(選好)와 새로운 능력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 2장 4-5절을 다시 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이 말씀에 반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론적이고 비 인격적인 반응이며, 다른 하나는 인격적이며 절박하고 절실한 반응입니다. 전자(前者)는 멀찍이 서서 말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말도 안 돼!” 후자(後者)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 내게 말씀하셨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8. 죄의 종입니다.(롬 6:17).
2장 4-5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 살리셨”다는 말씀을 바울은 우리에게 거듭남의 기적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거듭나지 못한 이에게는 먼저 영적 생명이 창조 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지 못하고 맛보지를 못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바울처럼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8)고 고백하지를 못합니다.
존 뉴튼은 알았습니다. 그가 찬송가(305장)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죄의 종에서 해방되었음을 축하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지난 날 우리는 운명에 매여 죄를 너무 사랑해서 죄를 떠나지도 못했고 죄를 죽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 새 생명을 주셔서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새 본성을 주셨습니다. 그때문에 바울은 이 놀라운 해방에 대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9. 사탄의 종입니다(엡 2:1-2; 딤후2:24-25).
이것은 영적 죽음에 관한 무서운 사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사탄에게 아무 반응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과 완벽하게 죽이 맞아 행동을 합니다. 바울이 본문 1-2절에서 죽은 우리 상태를 어떤 식으로 묘사하는지 보면 압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오늘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순종하며”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거듭나지 못한 이들은 사탄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들이 거짓의 아비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만큼 역설적으로 거짓의 아비와 죽이 잘 맞는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사탄에게 속박된 본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은 디모데후서 2장 24-2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사람들을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방법에 관해 사도 바울께서 사역자들에게 주시는 권고입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바울은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거듭날 때 일어납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사탄의 올무에서 해방시키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죄의 더러움과 위험을 보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는 생명을 일깨우십니다.
이러한 진리가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순간에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이 어둠 속에서 목에 걸린 흑단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불이 켜집니다. 그 순간, 자신이 만지작거리던 게 브로치가 아니라 바퀴벌레라는 걸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던져 버립니다. 바로 이렇게 사람들은 사탄에게서 해방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거듭남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까지, 우리는 거짓 아비에게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나 진리를 깨닫기까지 여전히 어둠속에서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진행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빛의 세계로 부르시는데도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바퀴벌레와 보송보송한 독거미를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엉뚱한 생각에만 빠져 있습니다.
10.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롬7:18).
이성에 의지하여 자신은 실제로 선한 일을 많이 할 수도 있고, 마음의 결정에 따라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할 수도 있다는 허황된 사실을 신념으로 삼고 살아가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인정하기가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섭리 하시는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은혜를 의지하고 그분의 영광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따르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무너지고 만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인간(목숨, 뜻, 마음, 뇌, 눈, 손)과 인간이 만든 사회적 구조물(결혼, 가족, 정부, 기업)은 모두 선합니다. 하나님이 이것들을 선하게 지으셨고 세우시며 지금도 섭리 가운데 유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마22:37).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을 그분의 은혜를 의지하여 사용하며, 그분의 가치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라고 명하십니다(벧전 4:11).
그러함에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은 채, 그분의 가치를 나타내려는 목적 없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불신앙의 도구로 삼는 이들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을 파괴하는 이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18절에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말할 때 “곧 내 육신에”라고 덧붙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거듭난 후, 비로소 그의 속에는 선한 것이 자리했습니다. 믿음이 선하고, 성령으로 인한 새로운 영적 본성이 선하고, 자라나는 거룩함이 선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기 전, 거듭나지 못한 바울 속에는 결과적으로 선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상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열 가지 상태입니다.
1.자기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엡2:1-3). 2.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 3.어둠을 사랑하며 빛을 미워하고(요 3:19-20). 4.마음이 돌처럼 단단하고(겔 36:26; 엡4:18). 5.무엇보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못하고 그분을 기쁘게도 못하며(롬 8:7-8). 6.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엡 4:18; 고전 2:14). 7.그리스도께 나오지 못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지도 못합니다(요6:44, 65;고전12:3).8.죄의 종이요.(롬 6:17). 9.사탄의 종이기에(엡 2:1-2; 딤후 2:24-25). 10.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롬 7:18).
오늘 우리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구원의 대상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나기 전, 우리도 사도 바울이 2장 12절에서 사용한 표현대로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독생자의 십자가의 피(血)로 구원 받았다면 어찌 살아야 할 것 인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거듭난 이들 답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혼돈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 입니다. (존 파이퍼 우리는 왜 거듭나야하는가?P.6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