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로고스(ὁ λόγος: ‘말씀’으로 번역됨), 예수 보살?

최세창
  • 1986
  • 2022-08-10 22:31:27
요한복음은 【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되었다.
[태초에]는 엔 아르케(ἐν ἀρχῇ)①로서 “창세기 1:1의 서두를 상기시키고, 말씀과 하나님 사이의 동등을 암시한다”(W. F. Howard).
여기서의 의미에 대해서는 시간과 공간의 시초라는 설②과 초시간적인 영원한 태초③라는 설이 있는데,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④ 이 점은 아르케(ἀρχή)의 의미를 보면 분명해진다. 아르케(ἀρχή)는 {시간이나 공간 또는 연속의 ‘처음’, ‘통치’, ‘탁월’, ‘수위’(首位), ‘주권’, ‘근본’ 등을 의미한다(골 1:18, 벧후 3:4, 계 3:14, 21:6, 22:13). 특히, 이 낱말은 “기원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처음’을 뜻한다. 즉, 무엇인가가 발생하는 근원이고,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이다”(W. Barclay).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 즉 창조 행위와 새 피조물인 교회의 아르케이다. “그리스도는 권위와 능력의 근원이시며, 우주의 질서를 세우시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계획된 모든 것을 시작하신다”(A. Barnes)}(골 1:8의 주석).
불트만(R. Bultmann)은 “태초에(ἐν ἀρχῇ)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세계와 시간을 넘어선 존재와 만남을 의미한다는 것이 사실이다.”⑤라고 하였다. 이 설명에 대해 바레트(C. K. Barrett)는 “세계와 시간 너머에 있는 존재가 예수 안에서 알려졌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말씀이 계시니라](ἦν ὁ λόγος: 로고스가 있었다.)의 [말씀] 곧 로고스(λόγος)에 대해 레이놀즈(H. R. Reynolds)는 “이성 또는 지고하신 내재의 하나님 사상과 이야기 또는 말이라는 이중 의미가 있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로고스(λόγος)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로고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을 나타내기 위해 스토아 철학에서 즐겨 쓰는 말이다. 둘째, 로고스는 지성 또는 이성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헬라어이다. 셋째, 로고스는 말씀을 의미하는 헬라어이다}(벧전 2:2의 주석). 바레트(C. K. Barrett)는 “그 말 자체는 범신론적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보다 초기의 스토아학파는 로고스 외에 다른 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로고스는 합리적 원칙으로서 그에 따라 우주가 존재했으며, 다양한 정도로 ‘종자 로고스’(σπερματικοὶ λόγοι)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합리적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형성해야 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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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Philo)는 {신은 세계 창조자이나 초월자이므로 로고스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고 질서를 확립했다고 한다. 이 로고스에 대해 ① 세계를 창조하려는 신의 신의성으로 아직 신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로고스, ② 이렇게 내재하는 순수 관념으로 세계를 창조한 로고스로 이데의 총체, ③ 창조된 세계를 보존하는 세계 법칙으로서의 로고스로 이해한다}(롬 4:17의 주석).
물론, 여기서는 영원부터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1:14, 요일 1:1, 히 4:12)⑥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로고스 곧 말씀으로 표현한 것은 그분이 만물,⑦ 특히 새 생명의 창조자이시고(약 1:18, 고후 5:17), 성부 하나님의 뜻이자 계시(히 1:2-3)이시기 때문이다. 오리겐(Origen)은 그분이 성부의 비밀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라⑧고 하였고, 칼빈(J. Calvin)은 그분이 성부의 영원하신 뜻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반즈(A. Barnes)는 “그분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공표하고 명령을 발하시는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이다(히 1:1-3).”라고 하였다.
[계시니라]는 ‘존재하다’(ἔστιν)의 미완료 과거형인 엔(ἦν)이며 ‘존재해 오셨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태초에 태어나셨다’(ἐν ἀρχῇ ἐγένετο)가 아니라, ‘태초에 존재해 오셨다’(ἐν ἀρχῇ ἦν)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의 [함께]는 전치사 “프로스(πρὸς)로서 ‘~을 향한 방향’, ‘~의 맞은편에’, ‘~의 곁에 서 있는’을 의미한다”(H. J. S. Blaney).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그러한 의미로 볼 수 없다. 바레트(C. K. Barrett)는 “목적격과 함께 쓰인 ‘함께’(πρὸς)는 고전 그리스어의 ‘~면전에서’를 뜻할 수는 없는데 신약성서의 그리스어에서 이 말의 의미는 확실하다(막 6:3. 참조: 잠 8:30).”라고 하였다. 이 전치사는 단순한 정적인 공존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거나 바라보며”(Abbott)⑨ 부단한 교제를 하는 동적인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다(17:5, 막 9:19, 14:49, 눅 9:41).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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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에 대해 칼빈(J. Calvin)은 성부와 성자의 위격을 구별함으로써 삼위일체의 교리적 기반을 마련한다고 하였다. 요한복음 17:5에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말씀 곧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표현이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우열 관계나 상하 관계로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도 요한은,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καὶ θεὸς ἦν ὁ λόγος)라고 밝히고 있다. 바레트(C. K. Barrett)는 “관사가 없는 ‘하느님’(θεὸς)은 서술적이며, 말씀의 본질을 서술한다. 관사가 없다는 사실은 말씀이 곧 하느님이시지만 말씀만이 유일하게 신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만일 [관사가 있는] ‘하느님’(ὁ θεὸς)이라는 말이 씌어졌다면 그것은 삼위의 두 번째 인격[위격] 외에는 어떠한 신적인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을 역으로, 즉 ‘하나님은 곧 말씀이시다’라고 읽을 수는 없다”(H. J. S. Blaney)라고 하는 점이다. “말씀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누구이신가를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M. R. Vincent).⑪
반즈(A. Barnes)는 “제 이위가 똑같은 명칭 곧 하나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과 똑같은 속성을 가지며, 똑같은 일을 수행하시며, 제 일위와 똑같은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똑같고,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다.”라고 하였다(참조: 1:18, 14:9-10, 17:5).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고린도후서 4:4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와 빌립보서 2:6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와 골로새서 1:15의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와 히브리서 1:3의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등이 있다.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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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C. K. Barrett: 이와 비슷하게 토라의 존재도 ‘태초’에까지 소급된다. 참조: 창세기 대미드라쉬 1, 2에 “토라 없는 태초”(reshith)는 없다고 하였고, Pesahim 54a에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일곱 가지, 즉 토라, 회개, 에덴동산, 게헨나, 영광의 보좌, 성전, 메시아라는 이름이 창조되었다.”라고 하였다(이러한 탈무드 인용문들에서는 잠언 8:22이 토라의 선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인용되었다).
2) J. Wesley, A. M. Hunter, W. Hendriksen, H. J. S. Blaney, “Temple”(in L. Morris), R. V. G. Tasker, E. G. Dobson, D. A. Carson, L. Morris, 박윤선, 이상근.
3) J. Calvin, D. J. Guthrie, A. Barnes, A. Clarke, M. C. Tenney, R. C. H. Lenski, E. F. Harrison, “R. Bultmann”(C. K. Barrett), H. R. Reynolds, C. K. Barrett, R. E. Brown, 黑崎幸吉.
4) 저자의 요한일서 1:1의 주석을 보라.
5) in C. K. Barrett.
6) 저자의 요한일서 1:1의 주석과 히브리서 4:12의 주석을 보라.
7) A. Barnes: 그것은 갈대아어의 구약성경에서 사용되었다. 예를 들자면, 사 45:12의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와 같은 말씀이다. 이 구절은 갈대아어로는 “내가 나의 말을 통하여 만들었도다”라고 되어 있다. 사 48:13의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라는 말씀은 갈대아어로 “나의 말을 통하여 나는 땅을 정하였도다”가 된다. 그 밖의 여러 곳에서도 이와 같은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8) in 이상근.
9) in C. K. Barrett.
10) 참조: “Godet, Dods, Westcott, Zahn”(in 이상근), 黑崎幸吉.
11) in H. J. S. Blaney.
12) 저자의 고린도후서 4:4의 주석과 빌립보서 2:6의 주석과 골로새서 1:15의 주석과 히브리서 1:3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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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요한복음(서울: 글벗사, 2006, 1판 2쇄), pp. 56-59.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설교집 35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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