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들이나 미륵불과 근본적으로 다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최세창
  • 1811
  • 2022-08-17 18:49:39
【고전 1:7】[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은사]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로서 {바울 서신에 16회 그리고 베드로전서 4:10에만 사용되었을 뿐이고, 그 외에 고전어나 칠십인역(LXX)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낱말은 카리스(χάρις: 은혜)의 파생어이며, 따라서 그것은 특히 사도 교회에서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은 모든 영적 은혜와 능력을 포함하는 은혜의 선물 또는 값없이 주는 선물을 의미한다”(R. Earle, p. 382).}(딤전 4:14의 주석).
여기서는 구원의 은사(롬 5:15, 6:23)①와 어떤 특별한 은총 및 자비(7:7, 고후 1:11) 그리고 신유와 같은 기적적인 특수한 은사들(12:9)②과 일반적인 은사(롬 11:29) 및 도덕적 은사(“Lightfoot,”③ D. S. Metz)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벤겔(J. A. Bengel)은 “참 그리스도인인지 거짓 그리스도인인지에 대한 시험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느냐 두려워하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나타나심]은 아포칼뤼프시스(ἀποκάλυψις)로서 ‘쓴 것을 벗기다’, 또는 ‘벌거벗기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주님의 재림이란 모든 것을 벌거벗겨 완전히 드러내 보이는 사건이라는 것이다(고전 1:7, 살후 1:7, 벧전 1:7, 13, 4:13).
아포칼뤼프시스(ἀποκάλυψις) 외에도 재림을 나타내는 말들이 있다.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술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15:23, 마 24:3, 27, 37, 39, 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요일 2:28, 벧후 1:16, 3:4). 이 말의 통속적인 뜻은 누군가가 거기에 있다거나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 전문적인 용어로 군대에 의해 나라가 침략 당하는 것에도 사용되었다. 또, 특별히 왕이나 행정 장관이 나라 안에 있는 어떤 곳을 방문하는 일에도 사용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었다. 그러므로 이 말이 예수께 대해 사용되었을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 곧 파루시아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상에의 침입과 백성의 궁극적인 복종과 예찬을 받기 위한 왕의 내림을 의미한다(W. Barclay).
에피파네이아(ἐπιφάνεια: 살후 2:8, 딤전 6:14, 딤후 4:1, 8, 딛 2:13)는 신이 예배드리는 자에게 현현하는 것에 쓰였고, 또 황제의 즉위식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이 그리스도께 적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나타나시는 것, 즉 하나님을 기다리는 신자들에게나 하나님을 반역하거나 모독하는 불신자들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의미한다(W. Barclay).
신약성경의 재림 사상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극비에 속한 문제로(마 24:36, 막 13:12, 행 1:7), 밤에 도둑이 들어오는 것처럼 예기치 않을 때에 임하신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순간에는 번개가 번쩍이는 것처럼 모두가 알게끔 오신다(마 24:27, 37, 39, 살전 5:2, 벧후 3:10).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림과는 달리, 위엄과 영광 그리고 대 격변의 사건이며(살전 4:16), 성도들이 함께 강림한다(15:23, 살전 3:13). 또한, 재림 사건은 마지막 심판(롬 1:8, 2:2-10, 3:6)과 모든 것의 완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마지막 심판은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있다. 전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되었으므로, 영원한 형벌의 심판으로부터 면제될 뿐 아니라(롬 5:9-11) 완전한 영광의 생명을 얻는다(15:53). 반면에, 후자는 지금 여기서의 모든 삶이 그 자신에게 진노를 쌓는 것이므로, 마지막 형벌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롬 2:5).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는 어두운 비밀들이 밝혀지고, 마음의 뜻과 동기까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4:5). 마지막 심판은 불신자들에게는 갑작스런 파멸이며 진노요 저주이다(살전 1:10, 5:3, 9, 살후 2:10-12). 이 형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모든 것이 완성되는 때이다. 그 날에 하나님의 모든 대적들은 파멸하게 된다(고전 15:24, 살후 2:8).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 실질적인 힘을 상실한 죽음은 맨 나중에 멸망하게 될 것이다(고전 15:24-28).
그 반면에, 성도들은 신령한 몸(골 3:4, 롬 8:23, 빌 3:21, 15:42-44)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감으로써, 죄로 인한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롬 8:18-21). 그리고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며, 만물을 지배한 그리스도도 아버지께 복종하게 된다(15:24-28).
고린도 교인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 즉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날이나, 기독교인에게는 완전한 구원의 날이며 영원한 천국 소망이 실현되는 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1)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며(벧전 4:7), 주님을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마 24:36-51, 벧전 4:7, 살전 3:13, 5:23, 롬 13:11-14). (2) 인간적인 생각으로 재림이 아무리 지연되는 것 같더라도 실망하거나 망각해서는 안 되는데(벧후 3:4), 이는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대하여 인간과 같은 관념을 갖지 않으시기(벧후 3:8) 때문이다. (3) 그 날에 우리는 사랑의 친교 중에 발견되도록 해야 한다(벧전 4:8-9, 16:14, 22). (4) 그 날을 위해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요일 2:28).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신앙의 올바른 자세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모든 일과 의무를 주님 안에서 더욱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A. Robertson and A. Plummer.
2) “Olshausen, Hofmann, Thomas”(in 이상근), N. Hillyer.
3) in D. S. Metz.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출처: 최세창, 고린도전서(서울: 글벗사, 2001, 2판 1쇄), pp. 60-63.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설교집 35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첨부파일

이전 장병선 2022-08-17 "예수는 보살" 비유한 신학대 교수..감리회, 이단성 없다고 결론
다음 이현석 2022-08-17 이대위- 신라 스님 두분이 당나라에 가면서 벌어진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