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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
엄재규
- 1696
- 2022-09-08 17:16:36
초림 예수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들도 이미 역사가 되었으나, 교회 안에서 조차도 이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이가 거의 없다. [마27:24 빌라도가 (중략)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 Ⓐ 유대 백성들 (예수를 매단 십자가를 앞에서 한 목소리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 하나님 (성경 말씀들에서): “이리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달면, 너희와 자손들이 그 핏 값으로 2000년 간 나라없는 백성으로서 이방인이 되어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녀야 하는데, 괜챤느냐?"
Ⓒ 유대 백성들: “개념치마시고. 그 핏 값을 우리와 자손에게 돌리세요.”
Ⓓ 하나님: “너희 후손이 한 600만 명쯤 번제물이 되어 죽어야 하는데, 괜챤느냐"
Ⓔ 유대 백성들: “개념치마시고. 그 핏 값을 우리와 자손에게 돌리세요.”
☞ 예수를 십자가에 단 유대인들의 죄는 나중에 큰 화근을 부르게 되는데, 그들은 주후 70년 경 나라를 잃고 2000년 세월을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민족들 사이에 흩어져 이방인으로 괄시와 멸시 가운데 살아야 했고, 최종에는 나치당 히틀러는 600만 명의 유대인을 번제물로 죽였다. 그러고 나서야 주후 1948년에 이스라엘은 나라가 회복된다.
☞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과 백성들은 어리석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선견자 혹은 선지자를 배출했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대제사장은 성경을 옆구리에 늘 끼고 다니고, 서기관들은 토라를 줄줄 암송한다고 알려졌으나, 정작 거기에 기록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더 하나님의 말씀들을 간구했다면, 구약의 곳곳에 기록된 [그들에 대한 ❶ 디아스포라로 여러 나라들과 민족들 가운데 흩으시고 ⇒ ❷ 홀로코스트로 번제물이 되고 ⇒ ❸ 시오니즘으로 모으셔서 나라를 되찾는 건국]을 이해를 했을 터이나 이런 점이 아쉽다. 사실 그들은 눈뜬 소경들에 불과했다. 이는 교회 시대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성경 전체와 요한계시록에 있는 재림과 심판에 대한 예언과 그 성취에 대해 알지 못한다.
1. 디아스포라
[신4:27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지칭한다. 후에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 또는 그 거주지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2. 홀로코스트
[신28:65 그 여러 민족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이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네 마음을 떨게 하고 눈을 쇠하게 하고 정신을 산란하게 하시리니]
☞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성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שואה), Sho'ah, Shoa라고도 표기됨)는 1940년대부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되었다. 많은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보다 쇼아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독일 나치당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표현으로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독일 히틀러는 로마 카톨릭교도이며, 유대인을 없애려는 정치적 이해가 일치했다.
3. 시오니즘
[신30: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 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앞서 16∼17세기에는 수많은 ‘메시아’들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지원하였다. 이러한 시오니즘에 대해 정치적 성향을 부여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T.헤르츨이었다. 그의 유토피아적인 정치소설 《유대인 국가》(1896)와 《오래 된 새로운 땅》(1903)은 시오니즘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897년 헤르츨은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를 소집하여 바젤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시오니스트회의는 1901년까지 5차례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인 시오니즘이 재주창되었고, 그 주도 역할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시온주의자들로서 C.A.바이츠만과 N.소콜로는 1917년 11월 2일,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을 얻어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뒤이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였고, 그들의 문화생활과 헤브라이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33년에는 23만 8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 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따라서 시오니즘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1929년과 1936~1939년에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은 아랍의 요구와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히틀러주의가 대두되고 그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유대인들도 도피처로서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 특히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에는 미국과 협의하였으나, 후에는 국제연합에 일임하였다. 1947년 10월 27일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1948~1949년에는 아랍이스라엘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많은 부분을 아랍으로부터 획득하였다. -문서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