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랑의 계명을...)의 성경 본문 요이 1:4-6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255
  • 2022-10-03 22:37:39
요한은 수신인들에게 권면하기에 앞서 그들의 좋은 점을 들어 기분 좋은 칭찬을 한다. 【4】[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너의 자녀 중에]의 [너]는 교회를 의미하고(1:1의 “택하심을 입은 부녀”의 주석을 보라.), [자녀]들(테크논, τέκνων)은 교인들을 의미하는 것이다(1:1의 주석을 보라).
[아버지] 하나님과 구원받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2:14의 주석을 보라.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받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받은바 새 계명인 사랑(요일 2:8-)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의 [진리에 행하는 자](περιπατούντας ἐν ἀληθείᾳ)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한 자로서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 안에서 행동하는 자라는 뜻이다.
[행하는]은 페리파툰타스(περιπατούντας)로서 문자적으로는 ‘걷다’, ‘거닐다’의 뜻이나, 은유적으로 사용되어 윤리·도덕적 의미의 ‘습관적인 행동’ 또는 ‘생활양식’을 의미하는 말이다(요일 1:6, 7, 2:6, 11, 막 7:5, 요 8:12, 행 21:21, 고전 3:3, 7:17, 고후 4:2, 5:7, 엡 2:2, 4:1, 빌 3:17, 18, 골 1:10, 2:6, 살전 2:12, 4:12, 살후 3:6, 11).
[심히 기쁘도다](ἐχάρην λίαν)는 원문에는 첫머리에 있는 서신체 부정 과거형인데, 요한이 모든 교인들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하는 교인들을 보고 대단히 기뻐한다는 뜻이다(요일 1:4의 “기쁨”의 주석을 보라). 목회자로서의 요한 사도의 기쁨은 교인들이 주님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인들은 목회자의 기쁨이 되는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목회자가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요한은 【5】[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부녀](퀴리아, κυρία)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1절의 주석을 보라).
[이제]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 눈(καὶ νύν)은 “바로 앞의 일반적인 진술에 대한 상술, 즉 진리에 행하는 구체적인 방도를 소개하는 것이다”(R. E. Brown). 그렇기는 하나, 과거로부터 현재로 전환되는 의미를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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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의 [구하노니]는 에로토(ἐρωτώ)로서 ‘구하다’, ‘요청하다’, ‘기도하다’ 등을 의미하는데, 특이한 점은 주로 “동등한 입장에서 간곡하게 구하는 경우”(A. E. Brooke, R. E. Brown)에 사용되는 말이다.
[서로]는 직접적으로는 수신인들 상호간을 의미하고, 간접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랑하자](아가포멘, ἀγαπώμεν)는 요한일서 2:5의 주석을 보라.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는 요한일서 2:7의 주석을 보라.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요한이 사랑의 계명을 받아들인 사람들 사이에 모든 교인들은 물론, 그 자신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은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6】[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앞의 [계명]은 복수이고(엔톨라스, ἐντολὰς: 뜻의 일부인 다양한 명령들이나 한정적 교훈들), 뒤의 [계명]은 단수(엔톨레, ἐντολή)로 되어 있으나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단수는 총괄적인 표현이다(참조: 요한일서 3:23-24의 주석).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리스도교의 전승을 통해 들은 바이다.
[그 가운데서 행하라]의 [그 가운데서]가 ‘사랑 안에서’를 의미하는 것인지 ‘계명 안에서’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어느 쪽을 취하나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구태여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한다면, 논리로 보나 요한과 요한 서신들의 핵심 사상을 보아 ‘사랑 안에서’를 택해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행하는 교인들의 모든 행동과 생활의 원리와 동기와 목적 그리고 범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삶이란 인간 자아가 아니라, 내주하신 성령을 좇아 행할 때에 가능한 것이다(갈 5:16, 18, 25. 참조: 요일 3:24).

필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다수의 논문들/ 설교집 35권/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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