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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의 징조인 인간의 성향
최세창
- 4013
- 2022-10-23 17:00:29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1. 시작하는 말
이단자들은 말세가 임박했으므로, 부패한 기존 교회를 떠나 그들을 믿고 따라야만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하곤 했습니다. 이단자들에게 미혹된 무수한 일반인들과 교인들과 지성인들과 유력한 자들의 단 하나밖에 없는 인생이 망가지고, 가정이 풍비박산되고, 멸망하곤 했습니다. 심히 안타까운 것은, 성경을 조금만 제대로 알았어도 당할 리 없는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말세가 임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강림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말세란 주님의 강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고, 종말이란 재림주의 최후 심판으로 이 세상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입니다. 이 시대는 종말이 더욱 임박한 말세입니다. 말세의 징조인 인간의 성향이 있는데, 모두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2. 말세의 또 다른 징조인 인간의 성향
성령 충만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고통하는”의 헬라어 칼레포이(χαλεποί)는 ‘괴로운’, ‘위험한’, ‘무서운’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말세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기적 자기애란 타락한 인간의 근본 자세로 자아 극대 실현을 도모하거나, 온갖 죄악을 초래하는 죄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매사에 자기 본위이고, 자기 위주이며, 자기중심이므로 하나님은 물론 남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남들을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자기 우상화’, ‘자기 신격화’의 망상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 이하를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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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 사람들은 돈을 사랑합니다. 디모데전서 6:10을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여자가 두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양념으로 제초제를 넣어 살해하고, 친정어머니와 딸에게까지 제초제를 먹여 살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체포됐습니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보험회사에서 10억 원이나 되는 돈을 받아서, 흥청망청 쓰다가 결국 체포된 것입니다. 살인과 죄악의 낙을 즐기던 그 여자는, 멈출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죄악은 물론, 살인도 반복하면 길들여지다가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후에, 생긴 대로 하는 언행은 멈춰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잘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를 잘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주요 섭리자요 구원자요 심판자요 생사화복과 흥망성쇠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대신에, 돈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바람에 믿음의 도를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그런 어리석은 지성인들과 출세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만큼이나 위력을 떨치는 것이 재물임을 밝히셨습니다. 마태복음 6:24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돈이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긍하며”의 헬라어 알라조네스(ἀλαζόνες)는 ‘사칭하다’, ‘허풍떨다’, ‘실상과는 맞지 않게 과장하여 자랑하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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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하며”의 헬라어 휘페레파노이(ὑπερήφανοι)는, 자기의 경제력이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뽐내느라 남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한다는 뜻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만능자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에 대해 항상 경멸적인 태도를 드러냅니다. 야고보서 4:6을 보면,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훼방하며”의 헬라어 블라스페모이(βλάσφημοι)는, 주 하나님께 대해 불경한 말을 하는 것과 남을 비방하거나 모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며”는 종말이 더 가까워진 이 말세에 매우 두드러진 현상입니다. 십계명에는 물론, 성경 곳곳에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자녀도 임의로 부모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부자관계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고, 부모에 대한 거역도 하나님께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다소 문제가 있어도,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도 자녀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감사치 아니하며”는 부모의 은혜는 물론, 하나님과 남들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사는 없고, 항상 불평과 원망 속에 사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거룩하지 아니하며”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의무를 개의치 않는 불경건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정하며”의 헬라어 아스토르고이(ἄστοργοι)는 ‘자연적인 애정이 없는 자’를 의미합니다. ‘부자애’, ‘부부애’, ‘형제애’, ‘인류애’ 등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시대란 사람들이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서, 기본적인 혈연의 정마저 고갈되고 마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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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의 헬라어 아스폰도이(ἄσπονδοι)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인간이 매우 혹독하고 잔인하고 융화할 수 없어 미워하던 나머지, 자기와 언쟁했던 상대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간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어, 한번 체결한 협정이나 계약을 파기한다든가 무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 원통함을 풀지 않으면 화병까지 “안녕하슈?” 하며 찾아옵니다. 원통한 일을 당한 것도 속상한데, 원통이 무슨 귀빈이라고 붙잡고 삽니까? 원통함을 풀어 버리세요. 문득 떠오르면 떠오르게 두고,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쓸 가치가 있는 문제와 신경 써서 좋은 일이 좀 많습니까?
“참소하며”의 헬라어 디아볼로이(διάβολοι)는 마귀의 전매특허를 따르는 것으로, 남과 남의 말을 헐뜯어 없는 잘못이나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서 고자질하는 것입니다. 참소는 자신의 인격을 암살하는 악독이고, 남의 인격을 모독하는 악독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며”는 감정이나 욕정이나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파멸일 수밖에 없습니다. ‘묻지마 폭행’, ‘묻지 마 살인’ 같은 것입니다. 이성이나 동성에 대한 욕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나우며”는 감수성도 동정심도 없이, 잔인하게 횡포를 부리는 것입니다. 민간인을 참수하는 IS대원 같은 악랄한 만행입니다. 전범자들의 특성입니다.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것이나 선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천한 것과 죄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선한 사람과 선한 것을 싫어하거나 미워합니다.
“배반하여 팔며”는 가룟 유다와 같은 짓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조급하며”는 지혜롭게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감정과 정욕, 충동과 욕망에 휩쓸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충분한 생각 없이 하는 말과 행동은, 자신과 남들에게 상처와 피해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말하거나 행동하기 직전에 잠시만 주님을 생각한다면, 많은 상처와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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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하며”는 선하거나 좋은 것들이 없는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는 것이고, 과대망상을 하는 것입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는, 자기애와 통하는 것으로 죄악의 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의 삼대 사랑은 자기 사랑, 재물 사랑, 쾌락 사랑입니다.
끝으로, 바울 사도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라고 했습니다.
“경건”의 헬라어 유세베이아스(εὐσεβείας)는 하나님을 숭상하고, 인간을 존경하고, 자신을 귀히 여기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경건의 겉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가르치고 충고해도, 계속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경건의 형식은 갖췄지만, 그 능력은 부인하는 교인 아닌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참 경건은 형식과 능력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3.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성향은 어떻습니까? 말세의 징조인 인간의 성향은 이기적인 자기애입니다. 자기애란 매사에 자기 본위요 자기 위주요 자기 중심이므로 남들은 물론, 하나님까지도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 징조는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돈이란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도구로 사용될 때에 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애와 돈 사랑은 말씀드린 온갖 죄악 성향의 근원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성령을 좇아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필자의 설교 동영상: 유튜브)
설교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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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