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罪).

오재영
  • 4175
  • 2022-10-14 02:08:26
구도자의 정체성과 방향을 잃어버린 시대에...

4세기 이집트의 사막 수도사 에바그리우스(345-399)는 수도사들이 수도생활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여덟 가지 죄를 구별하여 ‘8가지 악한 사상’ 이라는 목록을 만들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여덟 가지 악과 싸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후 그의 제자 요한 카시아누스(360-435)가 이것을 서방 교회에 전했고, 6세기의 교황 그레고리우스(540-604)가 이를 수도원에서 일반 교회로 가져왔다. 이 가르침은 수도사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 이후 교회는 이것을 규칙적으로 신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교회 공의회는 이를 공식 교리 중 하나로 만들었다. 특히 4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7대죄에 관한 설교 지침과 참회 방법을 담은 문서를 만들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내용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이후 7대죄 교리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는데 기여했다. 중세 후반부터 이 교리는 차츰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소설, 시, 그림, 조각 등 문화와 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7대죄 교리의 영향력은 종교개혁 이후로 교회 전통 안에서 빠른 속도로 약화되었다.

그에 따라 개신교회는 성경적 근거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이것을 공식 교리로 채택하지 않았는데, 그런 결정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경계심도 한 요인이 되었다. 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현대로 접어들면서 사회는 점점 탈종교화· 세속화 되었고 종교적 교리와 가르침의 영향력도 약해졌다. 그에 따라 죄에 대한 의식 역시 더욱 줄어들었다. 이러한 시대· 문화적 변화에 따라 7대죄의 교리적· 윤리적 중요성과 가치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기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사회에서는 아직도 대죄 교리가 나름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고, 이를 주제로 한 소설이나 영화 등 예술 작품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특이하게도 개신교 목사와 신학자들이 이에 대한 설교와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물론 이 주제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이나 악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에 시대와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흉악한 범죄나 통상적인 악들은, 근원을 파고들면 대체로 이 일곱 가지 죄악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와 아퀴나스는 이 죄들을 ‘대죄’라고 불렀던 것이다.

대죄의 의미.

7대죄라는 의미의 ‘capital’은 라틴어 ‘카푸트’에서 왔으며 ‘머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머리’는 크게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이나 동물의 몸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의 머리다. 둘째, 머리는 생명의 근원에 해당하는 핵심 부분이기에 어떤 것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있다. 셋째, 대장 혹은 통치자를 의미한다. 대죄를 수식하는 ‘머리’라는 말에는 이 세 가지 의미가 모두 적용될 수 있지만, 두 번째 의미가 가장 적절하다. 즉 ‘머리가 되는 죄’라는 말은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라는 의미다.

한국 천주교회는 7대죄를 공식적으로 ‘칠죄종’(七罪宗)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한자어 ‘종’은 근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현재 영어권에서 더 흔히 사용되는 ‘seven deadly sins’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7대죄를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라고 부를 수도 있다. ‘대죄’라는 용어는 교부들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다른 죄들에 비해 죄책이 훨씬 큰 죄들이 있음을 시사하는 구절들이 나온다.(요일 5:16).요한은 본문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 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라 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와 아울러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히브리서와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음행, 우상숭배, 간음, 남색, 탐욕, 술 취함, 모욕, 같은 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로 지목된다. 즉 다른 죄들에 비해 그 성격이나 형벌이 훨씬 심각한 죄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대 죄’라는 명칭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대죄의 개념이 비성경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초대교회의 일부 교부들은 이런 구절들에 나타나는 심각한 죄들을 신학적으로 발전시켜 대죄라는 이름을 붙였고, 심각한 죄책이 따르는 죄에 관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 키푸리아누스와 같은 교부들은 실제로 ‘대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특히 3세기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을 반박하는 글에서 ‘일곱 대죄’의 구체적 목록으로 “우상숭배, 망령되이 일컬음, 살인, 간음, 음행, 사기, 거짓 증거”를 명시하기도 했다. 그가 이것들을 대죄로 본 이유는 이 죄들이 십계명의 각 계명을 거스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이 정리한 대죄 목록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초기 수도사들이 만든 여덟 개 목록이 그레고리우스 이후 일곱 개로 확정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와 아퀴나스는 왜 이처럼 대죄를 7이라는 숫자에 맞추려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기독교 전통에서 지닌 특별한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7이라는 숫자는 전체, 혹은 완성을 가리키는 완전수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초기에는 여덟 가지의 大罪 목록이 6세기 말에 이르러, 베네딕트 수도회 수도사요 탁월한 성경 강해者였던 그레고리우스는 카시아누스가 전해 준 여덟 가지 대죄 목록 중 ‘교만’을 따로 분리하여 목록을 일곱 개로 줄였다. 그 이유는 교만을 다른 일곱 대죄의 뿌리가 되는 죄로 간주했기에 아예 다른 범주로 취급하고, 나태를 우울 에 포함시키고 시기의 죄를 추가 했다. 이처럼 기독교 전통이 우리에게 전해 준 ‘일곱 가지 대죄’는 교만, 허영, 시기, 탐욕, 탐식, 분노, 정욕, 나태다.

성격에 따른 7대죄 분류.

7대죄를 다룬 여러 학자들은 대죄를 그 성격에 따라 몇 가지 범주로 분류했는데, 이런 분석 틀을 통해 들여다보면 각 죄의 성격을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육체적 죄와 영적인 죄” 에바그리우스, 카시아누스, 그레고리우스, 아퀴나스는 대죄를 크게 육체적 죄와 영적인 죄로 분류했다. 그레고리우스는 탐식과 정욕을 육체적 죄로, 나머지 다섯 개를 영적인 죄로 간주했고, 아퀴나스는 나태가 성격상 양쪽 모두에 속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카시아누스는 육체적 죄를 모든 죄의 기본으로 보면서 육체적 죄를 우선적으로 배치했다. 반면 그레고리우스와 아퀴나스는, 죄는 본질상 하나님을 벗어나려는 영적인 태도에서 시작되어 육체적 죄로 발전하기에 영적인 죄가 우선이며, 죄에 대한 책임과 형벌도 영적인 죄가 훨씬 무겁다고 보았다.

왜곡된 사랑, 불충분한 사랑, 과도한 사랑,

단테는 대죄를 그릇된 세 유형의 사랑으로 분류했다. 첫째, 교만과 시기와 분노는 ‘왜곡된 사랑’의 죄다. 이것은 가치 있는 대상을 그릇된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와 피해를 입히는 것을 개의치 않는 태도, 즉 잘못된 방식의 자기 사랑이다. 둘째, 나태는 ‘불충분한 사랑’의 죄다. 이 죄는 마땅히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대상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즉 결여된 사랑이다. 셋째, 탐욕과 탐식과 정욕은 ‘과도한 사랑’의 죄다. 이것은 합당한 대상을 ‘너무 지나치게 사랑해서 정작 더 사랑할 가치를 지닌 대상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죄’다.

차가운 마음의 죄, 뜨거운 마음의 죄.

20세기 영국 소설가이자 단테 연구가인 도로시 세이어즈 는 정욕, 분노, 탐식을 ‘뜨거운 마음의 죄’로, 탐욕, 시기, 나태, 교만을 ‘차가운 마음의 죄’로 분류했다. 앞의 것은 일반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로서 상대적으로 불명예스러운 죄인 반면, 뒤의 것은 종교적이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당당한 성격의 죄다. 그런데 예수님은 뜨거운 마음의 죄보다는 차가운 마음의 죄에 속한 것들을 더 신랄하게 꾸짖고 정죄하셨다. 그러나 세이어즈의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과는 반대로 뜨거운 마음의 죄를 더 심한 죄로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 당시 차가운 마음의 죄를 품었던 대표적 인물들은 자기 의에 가득 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으며, 그들은 뜨거운 마음의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심하게 경멸했다. 오늘 날에도 그런 경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세이어즈의 이러한 분류는 정욕과 교만을 각각 처음과 마지막에 배치한 점에서 그레고리우스와 유사하다. 그는 덜 치명적인 육체의 죄인 정욕을 먼저 두고, 더 치명적인 차가운 마음의 죄들을 뒤에 차례로 배치해 가면서 교만을 가장 나중에 다루었다. 왜냐하면 뜨거운 마음의 죄는 최소한 공동체 생활을 무너뜨리지는 않지만, 차가운 마음의 죄는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균열시키는 더욱 파괴적인 죄로 여겼기 때문이다.

7대죄와 현대 교회.

그런데 수도원 전통과 중세교회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해 내려온 이 7대 교리를, 오늘날 우리가 다시금 기억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을까? 이를 통해 현대 교회가 실제로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개신교회가 최근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들을 살펴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첫째, 7대 교리는 영성 훈련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영적 삶이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본래 지음 받은 모습으로 회복되어 가는 삶이기에, 깊은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죄의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후반 이후 신학계와 교회 내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는데, 이때 개신교로서는 낯설었던 ‘영성’ ‘영성 형성’ 등과 같은 신조어들이 대거 출현했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책들이 출판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기독교 전통 안에 있는 영성관련 사상과 인물들을 연구하는 작업들이 활발해졌고, 그 가운데 동방교회 신학과 수도원 전통의 영성 훈련 방법, 특히 초기 사막 수도사 안토니우스, 에바그리우스, 카시아누스와 같은 동방 수도사들의 사상과 수도 훈련 지침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가 심도 있게 다룬 일곱 가지 대죄에 관한 가르침이 재발견되면서, 이 주제가 영성 훈련과 관련하여 지니는 본질적 함의에 관심이 고조되었다.

둘째, 대죄를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하는 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에 걸출한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그간 윤리학계의 주된 흐름이었던 행동결정을 위한 규범을 강조하는 경향에 대항하여 덕과 성품, 인격을 강조하는 윤리사상의 가치를 역설했고, 1980년대 전후에는 인문학과 신학 분야에도 덕과 성품,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상적 흐름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개신교 신학자들도 그동안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전유물처럼 간주되던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덕 윤리를 주목하게 되었고, 아울러 일곱 가지 대죄와 이에 대응하는 덕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교회적· 신학적 흐름이 보여 주는 것은, 죄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변화와 성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는 죄에 대한 의식이나 논의가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다. 그리스도인조차 ‘죄’나 ‘죄인’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고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는 실정이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전 사회에 탈종교화와 세속화가 일어나면서 종교적 교리와 가르침의 영향력이 점점 약화되었고, 특히나 죄에 대한 의식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20세기 미국 정신분석학계의 탁월한 학자 칼 메닝거는 그의 책 ⌜도대체 죄가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죄라는 단어가 세속화된 미국 사회에서 급속히 사라졌고, 그 결과 죄나 악과 같은 도덕적·신학적 용어는 아예 법률적·심리학적 용어로 대체되어 버렸다고 분석했다.

죄라는 말은 이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사용되는 특수 용어로 축소된 것이다. 그러므로 메닝거는 현대 사회의 각종 악과 고통에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죄에 대한 각성과 논의가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죄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양상과 결과를 매일 체감하고 있다. 전쟁과 폭력, 지역 간·계층 간의 갈등, 소외, 음란물의 범람 등 갖가지 악이 만연해 있고, 이로 인해 사회에 정의와 평화가 사라지고 있다. 이런 것들은 누가 뭐라 해도 죄의 결과다. 일컫는 말을 바꾼다 하더라도 그 실재는 바뀌지 않는다. 이런 죄의 문제를 직면하여 다루고 해결하지 않으면 개인의 삶과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교회는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파괴 하고 온갖 사회적 갈등과 불의를 일으키는 중심 실체임을 폭로하고, 죄에 대항하는 교회의 오래된 지혜를 새롭게 증거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7대죄의 가르침은 오늘날 교회가 다시 돌아보아야 할 중요한 주제들을 담고 있다. 이 7대죄 문제는 모든 문화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주제이면서도, 문화적·종교적 시각에 따라 각 죄의 성격과 극복 방법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나는 여러 가지 학문적 시각과 분석을 참고했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교부들과 주요 신학자들의 사상을 따라 대죄를 분석 했다. 이제 이 죄들이 구체적인 일상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공동체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고, 이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안과 실제적인 지침을 모색해 보도록 하자.

(신원하저,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P15-30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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