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을 부인당한 안중근 의사의 10. 26

민관기
  • 1361
  • 2022-10-26 08:40:40
도마 안중근 의사는 민족의 최고 영웅중 하나이시다.

안도마는 진사 안태훈의 아들로 황해도 해주에서 1879년 출생하였다.
황해의 동학도들이 의롭지 못한 난동이 하였는지 안진사는 동학도들을 진압/축출하였고
이 과정에서 얻은 양곡 수 천석이 있었고, 이를 안진사가 차지/사용하였는데, 이 양곡은 사실 동학도들이 정부의 양곡을 약탈한 것이었다 한다.
= 이 때 동학 접주활동읗 하던 백범 김구는 안진사 댁에 우거하며 생명을 보존하였고, 안도마와는 절친이 되었다.

하니, 정부는 안진사가 사용한 양곡을 내놓으라하였고, 안지사는 이미 동학군 진압때의 의군들의 식량으로 이미 다 소비하여 양곡을 다시 내놓을 처지가 안되었다.
생각다 못한 안진사는 힘이 있다 판단되는 황해의 빌렘 신부를 찾아가 신자가 되기를 자청/영세/신자가 되었다.
하여, 독실한 신자화되어 갔다나 하고 전한다. 전 가문이...

어느 날 안도마는 민족의식이 틔어 한양의 종현(명동)성당의 대교구장 뫼텔을 찾아가 말했다.
= 안도마 : 우리민족을 위해 프랑스의 저명한 선비들을 초대하여 대학을 설립하여 주십시오!
= 뫼 텔 : 평싱도들이 많이 배우면 신앙 떨어져!

이러길 세번.
안의사는 결심했다. 내가 천주교 신앙은 유지하지만, 프랑스와는 절연하리라! 그리곤, 프랑스 말 배우기를 중단하였다. 그리곤, 왕년의 친구였던 김구와 만나 황해도 재령에 보강학교를 스스로 세워 후일 의열단의 나석주 의사를 양성해낸다.
=이 때 백범은 감리교인이 되어 있었으며, 안의사에게 헐버트/전덕기 목사에 대해 소개/증언하였고, 상동교회와 YMCA의 청년민족교육에 대해 설명하엿다. 사실, 이를 모방하여 재령의 보강학교가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즈음 1905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민족경영을 위해 일련의 교육 및 재정 사업을 하던 안도마는 직접 투쟁을 위해 광무황제와 탁사 최병헌 목사의 뜻에 따라 이거한 만주/연해주 의병진과 합류한다.

두 번째 감리교인을 만난다. 바로, 우덕순과 정순만이었다. 우장로나 정순만이나 둘다 상동교회의 스크랜턴과 대부인 그리고 헐버트 그리고 전덕기 목사 등을 통해 민족운동을 시작하게 되어 신민회의 제1, 2차 산개투쟁 결의에 의해 연해주로 이거해 민족운동을 수행중이었다.

이들은 해조신문의 발행, 권업회 활동, 성명회 활동 등으로 연해주 의병운동의 근거지/사상활동과 직접 전투를 실행하며 국권회복의 날을 준비하던중 "이토오가 1909년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들은 결사하여 단지동맹을 맺고 결의를 다지며 민족과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안의사는 하얼빈역.
우장로는 채가구역.
두군데중에 하나 또는 두군데 다 이토오는 열차에서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토오는 하얼빈역에 내려 황해도의 명사수 안의사의 권총 3발에 1026 처단되었다. 안의사는 코레아 우레~(러시아 말로 만세~)를 외쳤고, 채가구역에서도 처단을 성공하였단 소식을 전해들은 우장로도 만세를 열창하였다. 두 의사는 러시아 당국에 피체되었고, 신상은 왜적들에게 인도되었다.

대련형무소에 수감된 안의사는 사형을 언도받았고, 1910년 사형이 집행되어 달리 갈곳도 없어 온곳으로 다시 돌아가셨다. 사형집행 전 안공근,등 안의사 형제는 천주교 사제의 종부성사를 받게하려 대주고 뫼텔을 11차례 방문하여 요청했으나, 살인자의 종부성사는 거부되었다. 그리고 천주교회는 이렇게 결정했다.

"살인자 안중근 천주교 제명"

도마 안중근은 천주교회로 부터 3번의 배신을 당했던 것이다.
1) 절대 필요하니 들어줄줄 알았던 대학 설립에 대한 3번의 청을 뫼텔 반대로 민족의 무지 방치와 우매화로 비개화 상태의 천주교 방치 = 이러니 20여 만의 천주교회 신자중 독립유공자 서훈자는 불과 10여 명도 안된다.
단, 1명의 강제신사참배 거부자도 없었던 천주교의 전국 모든 사제들은 1919년엔 이렇게 자랑스러이 보고한다. "우리 성소에서는 지난 3월 소요시 참여한 신자들이 없었음을 보고합니다".
2) 천주교인의 당연한 권리이자 사제의 의무인 종부성사 11차례 거절
3) 살인자 제명.
= 어찌보면 15번인가?

그리고, 세월은 흘러 1985년이 되었다.
명동성당의 지하 창고를 정리하던중 일기장이 한 권 발견되었다. 뫼텔의 일기였다.
번역해보니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 내가 거부한 종부성사를 안중근의 고향 사제인 빌렘이 해주었다. 하여, 나는 그 빌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명을 거역한 너는 지금 당장 사제를 그만두고 본국으로 송환될래? 아니면, 우리천주교 신자들의 고백성사 내용을 나에게 보고할래? 하니 차마 하나님과의 약속인 사제활동을 접을 수는 없던 빌렘은 교인들의 고백성사를 뫼텔에게 정리해 보고하엿고, 뫼텔은 이를 차곡 차곡 모아 총독부의 아카시 정무총감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대한 댓가로 명동성당 입구를 넓히는 인가를 받았다고 기록된 내용의 일기였다."
이 밀고의 결과로 민족은 안악사건, 신민회사건, 테라우지암살모의사건, 105사건, 무관학교 설립 모금사건 등으로 서울, 황해, 평양, 평남의 기독교 민족운동 세력은 제1, 2차 산개투쟁 졀의에 따른 망명인사들을 제외한 국내 민족운동세력은 거의 다 일망타진되어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 번역된 뫼텔 일기를 접해 사실을 안 천주교 지도부는 고민에 빠졌고, 자신들이 배신했던 안의사의 복권을 결정하고, 이 사실을 지금은 하늘사람이 된 김수환 추기경이 경위는 밝히지 않은채 발표하였다.


하여, 안중근 의사는 1910년 제명당한지 75년만에 복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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