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수, 세례 요한...)의 성경 본문 요 4:1-4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242
  • 2022-10-20 18:56:08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위에서 오시는 분’과 ‘땅에서 난 자’로 대조하고는 그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고 한 데 이어서, 여기서는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통행하신 것을 말한다.
그는 이 부분을【1】[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로 시작한다.
[예수님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밥티제이, βαπτίζει: 1:25과 3:22의 주석을 보라.) 것이 세례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은 당시의 가장 중대한 소식인데 먼저 민간인들에게 퍼져 나갔고, 나중에는 유대의 교권자들인 [바리새인들](1:24의 주석을 보라.)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주께서❶ 아셨다.
[주]는 퀴리오스(κύριος)로서 구약성경에서는 노예에 대한 주인을 뜻하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명예와 존엄 그리고 하나님을 표현하거나 특수한 이름인 야웨(Yahweh)를 대신하는 칭호이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고전 12:3, 고후 1:2, 빌 2:11).
이 칭호는 본서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바울 서신들에는 자주 나타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라는 바울의 고백은 {당시의 헬라적 동방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처럼, 예배자들이 주님의 ‘노예’라는 생각을 보충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며, 따라서 주님이란 칭호를 기독교 예배에 적용시키는 일이 광대하게 조장되었다(Deissman)}(고후 1:3의 주석).
여기에 언급된 세례를 준 자에 대해서는 【2】[(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라고 밝히고 있다.
바레트(C. K. Barrett)는 “1절과 3절 사이의 연결을 방해하는 이 구절은 아마도 예수와 세례 요한 사이를 구별하는 데 열성적이었던 한 폅집자에 의해 삽입된 것 같다. 예레미아스도 그렇게 본다. 다드는 3:22을 기술한 복음서 저자가 이 구절을 썼을 리는 없다고 주장한다.”라고 하는데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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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그분의 추종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A. Barnes)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Plummer)❷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메시아를 영접할 준비를 위한 세례자가 아니라, 구원의 약속을 따라 오신 메시아이시다.
세례 요한의 성공적인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1:25) 교권자들은 같은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보다 더 광범위한 예수님의 성공적인 활동 역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람이란 생긴 대로 놀게 마련이다. 환경이나 조건 또는 상황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들 하나, 실은 그러한 것들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속 생김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어떤 자리에 앉든 어떤 문제를 만나든 간에 사람이란 자기 속 생긴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대 교권자들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종교가 잘못 받아들여지게 되면, 본능적 이기성과 그보다 더 심각한 종교적 이기성이 결합되는 중대한 인격적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그 때문에 사회적 문제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교지의 이동에 대해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4】[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제1차 갈릴리행(1:43의 주석을 보라.)과 대조해서 두 번째 가시는 길을 설명하는 것이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 (1:43의 주석을 보라.)로 가]신 것은 박해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유대 교권자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시기 위한 것 같다. 실상, “갈릴리는 유대보다 바리새인들의 영향력이 훨씬 덜 미치는 곳이었다”(A. Barnes).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는 요세푸스에 의해 확인된다. Ant. XX, 118에 “축제 때 거룩한 도시로 갈 때면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서 여행하는 것이 갈릴래아[갈릴리] 사람들의 관습이었다.”❸라고 기록되었고, Vita, 269에는 “사마리아는 이제 로마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으며, 빨리 여행하기 위해서는 갈릴래아에서 사흘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는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여행로를 택할 ‘수밖에’(에데이, ἔδει) 없었다.”❹라고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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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간의 깊은 증오심 때문에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는 많은 유대인들은 동쪽으로 요단강을 건너 북쪽으로 베뢰아를 지난 다음에 다시 요단강을 건너 갈릴리로 갔다”(J. H. Mayfield).
[사마리아](Σαμαρείας)라는 이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서 그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붙인 것이다(왕상 16:24). 이 이름은 그 도시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 전체에 적용되었고, 때로는 북 왕국을 가리키기도 하였다(겔 16:46).
사마리아는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게 정복되었는데(왕하 17:6, 18:10),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왕하 17:24-). 이주민들은 전에 그 땅을 소유했던 이스라엘인들의 종교를 얼마간 보존하였다. 그러나 그 땅에는 적지 않은 이스라엘인들이 그대로 머물러 살고 있었다. “그 당시에 거의 모든 사마리아인들은 자녀들을 이주한 이방인들과 결혼시켰다. 그런 식으로 그들이 죄를 범한 것은 유대인들이 용서할 수 없는 범죄이었다. 그들은 종족적 순수성을 상실하였다. 엄한 유대 집안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아들이나 딸이 이방인과 결혼하면, 그 아들이나 딸의 장례식을 행한다. 그런 자녀는 정통 유대교의 관점으로는 죽은 것이다······그들은 상실된 열 지파이었다. 이주한 이방인들과 혼사를 맺은 그들은 유대인들이라고 불릴 자격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W. Barclay: 4:9의 주석).
그러나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했고, 거주민들이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사마리아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사마리아는 정치적 독립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유다와 하나로 통합되어 동일한 로마의 행정관 밑에 있었다”(C. K. Barrett). “그 주민들은 극도로 혼혈화되어 있었고, 그들의 종교는 유대교로부터 변형된 혼합주의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예배 중심지는 그리심 산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소수의 사마리아인들이 이스라엘에 생존하고 있다”(E. A. B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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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해당 성구가 있으므로 저자의 이름만 밝혔음.
1) C. K. Barrett는 “P66, P75, B, ω, sin, sah와 몇몇 라틴 사본들의 독법이다. א, D, Θ, λ, it vg, cur, pesh, hl, boh는 ‘예수’(<ὁ> Ἰησούς)라고 읽는다. 후자의 독법은 확실히 옛 것이며, 아마도 이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2) in 이상근.
3) C. K. Barrett: Bel. Ⅱ, 232를 참조하라. 동일한 구절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유다인들의 평판이 좋지 않았음을 보여 줄 것이다.
4) in C. K. Barrett.

출처: 최세창, 요한복음(서울: 글벗사, 2006, 1판 2쇄), pp. 173-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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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5권/ 기타 다수
#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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