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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연회원 및 정동제일교회에 드리는 글입니다.
민관기
- 1923
- 2022-10-20 03:18:01
제목 : 탁사 최병헌 목사의 국가유공자화에 대하여
부제 : 탁사 최병헌 빛이 되다.
형식 : 필자가 탁사가 되어 말하다.
변화 : 비교종교학자에서 민족신학 정신의 아버지
생몰일 : 1858. 1. 26~1927. 5. 13
1. 나는 충북 제천출신이다. 1888년경 과거를 보았다 낙방*한 후 감리교회 선교사 존스를 만나 어학 선생이 된 후 1893년 세례를 받고 전도사가 되었다. 1902년 목사안수*를 받고 1914년까지 상동교회와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14년부터 서울과 인천지역의 감리교회 지도자인 감리사로 활동하다 21년 은퇴하고 1922년부터는 감신에서 교수를 1927년까지 하다 하늘빛이 되었다.
또한, 독립협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단체 활동과 신학월보, 성서번역, 죄도리, 성산명경, 만종일련, 신학세계 그리고 (서강교회)서강여학교 및 양로원 설립했고, 최초의 도서관도 설립하였다. 그리고 나의 집에선 손기정 선수가 함께 살았다.
*. 과거 낙방 : 당시의 과거는 반드시 실력으로 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안타깝습니다. 허나,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일줄이야.. 부정부패가 많아서... 아펜젤러를 비롯하여 선교사들에게 이 나라 이 민족을 이런 방향으로 도와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게 했기에....
*. 목사 안수 : 나는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07년 나의 고향 제천에 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안 믿어진다고? 그냥 믿기 바란다. 나 아니면 할 자가 없으니 말이오. 이는 정미의병전쟁으로 인한 왜적들에 방화당한 제천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소.
2. 나를 3단계로 구분해 볼 테니 잘 살펴 보시오.
개종 전엔 존스의 어학교 교사를 했고, 아펜젤러와 활동시에도 배재의 한문교사를 맡았는데 이는 내가 세례를 받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배려심은 참 고맙다.
*. 1902년과 14년까지 개교회 담임목회(상동, 정동제일교회)
*. 14년 이 후 감리사 시절(서울, 인천)
*. 22년부터 감신 교수 시절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나는 감리회 선교사들인 존스, 아펜젤러, 스크랜튼, 헐버트와 노블, 하디가 주요 파트너였다.
1) 존스 : 먼저 존스는 나의 어학 제자로 나를 예수께로 처음 인도한 분으로 우리 조국의 해외 독립운동 기지중 제일 안정된 미주 기지를 만들어지게 안내해준 최고의 공로자이다.
*. 하와이 노동이민으로 대한인 7,200여 명 이민시 현순, 홍승하 목사와 여전도사 파견/지도케 하여 결국 그들이 미주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자라났다. 자신의 교인들을 내보냈다고 욕 무척 먹었다.
2) 아펜젤러 : 아펜젤러는 내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성서번역작업을 함께 하므로써 대한인들이 언어생활과 문자생활을 완전히 통일시키는데 최고의 공로자라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아펜젤러는 배재안에 삼문출판사를 세워 한글 보급이 각종 문서를 통해 급속하게 이루어지게 하여 국민의 민도는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상승하였다. 민지의 폭발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이 민족운동의 기초 자양분이었고 아펜젤러는 본인의 나라처럼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 나라로 만들고 싶은 야망이 있었기에 독립신문에 민주공화정과 입헌군주제 그리고 절대군주제의 차이를 보도하므로 민주공화정 대통령제를 대한인들의 마음에 심기 시작했다.
이 일에 그런 열성을 다하던 아펜젤러는 1902년 불의로 사고로 순직했다.
나는 그가 담임하던 정동제일교회로 전임하여 왔다.
*. 언어와 문자생활의 일치화가 가져오는 현상
*. 민주공화정은
-. 독립신문 보도 후(1887년)
-. 신민회의 강령으로(1907년)
-. 상해 임정 정체로(1919년)
-. 대한민국 정체(1948년)로 결정되는 경로를 거쳐 60년 만에 지금 우리에게 이다.
3) 스크랜턴 : 나는 상동교회에 시무하던 때에 스크랜턴* 선교사와 활동을 하였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스크랜튼 선교사는 실로 놀라운 능력을 가진이 이다. 알렌이 자신의 자금으로 병원을 운영하지 않고 국가에서 국왕이 주는 자금으로 병원을 유료양반의료로 운영하는데, 반해 스크랜튼은 자신의 자금으로 무료민중의료를 시행했다. 더구나 민중중의 민중인 여성과 어린아이만을 위한 전용병원인 보구여관을 운영하였으며, 아펜젤러의 사후엔 서울과 지방의 선교사업을 총괄하고, 아현과 동대문, 평양, 원산에 까지 감리교회 의사를 파견하여 대한인들을 돌보고, 배재와 이화를 돌보고 감리교회 목회자 양성 사업인 신학회 책임, 성서번역 작업과 출판으로 대한인의 민지 발굴에 열성을 다하였다.
*. 스크랜턴 : 스크랜톤, 스크랜턴, 스크랜튼 등을 이리저리 바꾸어서 사용했다.
*. 사실 그런데 선교사나 목회자들이 몇 안되는 시절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모두 다가 아주 가깝게 지냈다. 이 교회, 저 교회, 내 교회 니 교회라는 개념이 하나도 없었다.
= 다만, 의사였었기에 즉, 환자들을 실제로 돌보아야 했기에 시간상으로 너무 부족하여 실제론 직책만 맡았고 실무는 거의 타인(노블)이 하는 편이었다.
스크랜튼 선교사의 우리 민족에 특기할 공적은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근거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곳은 상동의 시장터로 대한의 민중들이 수다하여 전덕기와 같은 형제를 민족운동가로 키우더니 그곳에 수 천 수 만의 대한인들이 모여들게 하고(교회, 병원, 학교, 기관 등인 상동청년학원, 공옥학교, 협성부인학원, 시병원, 신민회, YMCA와 국외로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이회영 일가, 미국 한미항공학교=노백린,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박용만, 연해주 권업회-성명회=정순만, 미주민족기지=이승만 등) 그 곳에 민족의 핵심 인자들을 숨겨 양성하는 그야말로 귀신도 모르게 왜정을 속이는 방법으로 민족운동을 촉진시켰다. 어떤 이유*로 스크랜튼은 상동교회를 사임하면서도 상동교회의 담임자가 전덕기 목사가 되게 하여 민족운동의 더 큰 진전을 도왔다.
*. 어떤 이유 : 친왜 감독 해리스가 한국인을 돕는다고 못살게 굴고 구박하여
공적 사항의 기초를 정리하면
(1) 10년 늦게 들어온 조국의 형제교단 남감리회에 온정을 베풀어
-. 자신의 남전도인 김흥순, 스크랜튼 대부인의 여전도인 백헬렌 보내주기
-. 선교지로 현 한국은행 자리 알선
-. 원산 포함 강원도 전체, 개성/해주의 선교지 양보
-. 북/남감리교회와 모든 사업에서 협력(신학교의 구성과 운영 등)
(2) 양대인과 대한인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데 의료만한 것이 없다. 교육도 중요하지만 당장 아픈 이들을 치료하므로 얻은 대한인들의 호의는 대단한 것이었고, 심지어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은 왜인들은 조선인들을 절대 치료하여 주지 않으나, 양이들이 대한인을 무료로 치료*하여 준다는 정보를 접하고,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었다가 척양은 빼고 척왜의 기치만 든 것에서 스크랜튼의 공은 절대적이다. 곧, 한미민간동맹의 굳건한 기초를 제공했다. 이 감리교회의 민간동맹이 한미군사동맹의 맹아이자 기초이며 근간이 한미군사동맹화(6.25와 UN군 등)된 것이다.
결론은 우리가 감리교회 한미민간동맹의 사실 자체를 잊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냥 선교사가 복음전해주었으니 고마운 줄로만 알았던 과오이다. 너무 단순화해서 탈이었다.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 스크랜튼의 시병원과 동대문부인병원에 대한 정보이다.
= 1905년 이 후 대한인은 1945년까지 공식적인 외교권을 가지고 외교권을 행사하진 못했다.
물론, 외교권을 잃었음과 왜적들의 지배권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3) 어머니와 힘을 합하고 교인들이 합세*하여 달성이 교회 즉 구 상동교회를 건축하였다. 전덕기는 이를 바탕으로 교인을 2,300여 명까지 늘렸고, 대한민국 건국의 핵심 인사 거의 모두를 이곳을 통해 양성할 수 있게 하였다.
*. 교인들 합세 : 교인들이 가난한중에도 얼마씩 헌금하였다는 기록이 구 교회를 철거하던 때에 머릿돌에서 발굴되었다.
= 의료로 한미간의 간극 획기적으로 줄여 개화문명을 촉진시켰으며, 인재양성에 절대 공로가 있다.
4) 헐버트 : 헐버트는 상동교회 시절 그가 협성부인학원의 교수와 YMCA 설립과 초대 이사장을 하여 대한의 청년들의 웅지를 펼칠 기지를 건설하였다. 나와 전덕기 목사가 이에 협력하였다. 그리곤 동대문 교회의 담임으로 전임하여 가니 그 곳 또한 설립은 스크랜튼, 운영은 헐버트로 감리교회 선교 종합 타운이 완성되었다. 황제의 특사로 활동한 건 다 아는 바이고, 우리 민족의 승전 후인 1949년 승전일을 기념해 국빈으로 방문하였다가 서거하셨다.
*. 건국훈장 독립장과 금관문화훈장(사민필지 집필 출판 공로)을 동시에 추서받은 유일한 인사이다.
5) 하디 : 하디는 우리 민족의 빛=양심=영성운동을 이끈 이로 1907년부터 감신의 교수로 일하기 시작하였고 나는 목회직을 은퇴하고 22년부터 교수로 활동했다. 교장은 하디가 하였다.
나와 하디는 정말 열심히 감리교회 목사들을 민족운동가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각종 교과서나 학생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조달하여 애쓴 결과 감신을 졸업한 학생들은 한결같이 민족을 위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고 주님 나라건설에 매진하는 목회자로 성장하였다.
*. 지도자의 지도자를 양성한 지도자이다.
-. 원초 : 하나님
-. 초대 : 무스(남감리회 연회장으로 하디의 영성운동 및 모든 활동을 돕고 지도하였다)
-. 2대 : 하디
-. 3대 : 감리회 목회자
-. 4대 : 목회자 지도받는 평신도 지도자
-. 5대 : 평신도 지도자 지도받는 평신도.
[반면, 북감리회 감독 해리스는 이등박문과 짜고 스크랜튼과 전덕기 등의 민족운동을 방해하고 박해하여, 스크랜튼과 노블의 탄핵을 받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무스와 해리스는 정반대이다]
6) 노블 : 노블은 나를 상동과 정동의 담임목사로 서울과 인천지역 교회를 관할하는 감리사로 또한 감신의 교수로 임명하여 내가 민족을 위한 그러한 활동을 하도록 판단한 영걸이다.
사람의 능력을 정말 잘 구분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또한, 제암리 학살 사건을 교인 노경태로부터 입수하고 스코필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하고, 본인은 하세가와(총독이라 불렸다)란 놈에게 강력 항의하여 제암리의 주민들을 구호하게 하였고, 목회자들의 목회와 생활 전반을 책임졌다. 장로교처럼 네비우스 정책이라 하여 교인들에게 헌금은 받아가며 돈 아낄려고 자신의 일을 떠넘기지 않았다. 그는 텃밭을 사주어 목회자 가족들이 일구어 부족한 식량을 대신하게 했다.
= 그 땅 어디 갔는지 모른다.
하여, 난 감리교회에 온 선교사들을 통해 대한민국에 써진 재정의 총액이 얼마인가를 추적하고픈 욕망이 있다.
이 여섯 분이 내가 주요하게 관계하며 활동한 선교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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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문제가 있다 한다. 설명하겟다.
사회활동(선유사)과 3.1혁명 민족대표 미참여에 대해 기술한다.
1. 선유사 :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른 특이한 이력이 하나 있다. 선유사이다. 황제는 나를 의병을 선유하라는 선유사로 임명했는데 이것은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 가서 이젠 의병활동을 그만두게 하라는 역할이었다. 허나, 황제의 그러한 뜻은 왜적들의 뜻에 따른 것이었지 황제의 뜻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의병들에게 가서 해산을 권유하지 않고, 의병이 있는 곳으로 가 지금은 의병을 만나지는 않고, 먼저 우리가 가진 것이 약하나 싸우되 후손들은 배우고 갖추어서 싸워야 되지 않겠느냐는 애국계몽 연설이 주요 역할이었다. 실제로 의병들은 전력이 너무 열세여서 연해주와 만주로 이주하여 후일을 도모하였으며, 황제와 내 뜻은 일정하게 관철되었다. 나의 이 활동은 민족역량을 보존한 것이며, 이는 후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 그리고 독립군과 광복군의 자양분으로 작용하였다.
언제나 지혜롭게 민족은 대처하여야 한다는 관점을 내가 심어주었다.
*. 의병은 최신 주력 무기가 화승총인데 왜적들은 개털림 기관총이다. 이 기관총 2정인가에 동학농민군은 왜적 3명 죽이고 3만이 학살당했다. 다시는 이래선 안된다 나는 이거 못하게 막은 거다.
*. 난 의병을 만난적이 없다. 실제 의병의 해산이 목적이 아니었고 애국계몽이 목적이며 의병들은 내 뜻을 따라주었다. 특히, 의암 유인석이나 운강 이강년 그리고 도마 안중근과 감리교회 장로 우덕순 등이다.
*. 광무/순종황제는 공개적으론 나와 같은 개화인을 선유사를 파견하면서도 밀서를 의병진에 보냈다.
의암 유인석에겐 정남대도독의 직책으로 운강 이강년에겐 도체찰사 즉 계엄사령관의 직책을 내림으로 의병을 독려하였다. 한 마디로 니들 맘대로 의병 모집하여 싸우라 하였다.
이는, 광무의 뜻은 의병의 해산이 실제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허나, 실제는 실제로 의병들은 장소만 바뀌었다 뿐으로 당장의 전투만 국내에서 연해주, 만주로 이거된 것뿐이다.
의병 = 독립군 = 광복군으로의 국내에서 국외로의 전환의 계기.
어차피 사실, 1913년 국내의 의병은 초토화작전으로 전멸되었다. 몇 명(아주 소수)은 남아 싸웠다 한다.
국내, 국외로 갔든 안갔든 왜적에 대한 의지가 변한건 아니므로 황제와 나와 의병진의 뜻은 일체화되어 민족을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위정척사 유림 의병진의 개화화와 감리교회와 다시금 개화된 의병진과 연합 그리고 대종교와의 결진도 이루어졌다.
광무황제는 독립운동 선상에서 의병에 대한 투트랙 전략을 구사했다. 애국민족계몽이 국가 전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하에 감리교회를 주력군 삼아 교회, 의료, 교육을 극적인 활성화를 도모해나가며 진행을 시킴은 당연하다. 기초 역량을 도모하며 전쟁을 진행해 나가는 전략인 것이다.
하나. 하나의 트랙은 왜적들이 황제를 겁박하므로 명목상 보라고 그래 내가 의병을 말리라고 선유사로 일본을 기만키위해 보낸다.
하나. 또 하나는 해산이라니? 하시며. 의암 유인석에게 정남 대도독의 밀지를 내려 죽을 힘을 다해 싸우라하셔서 의암은 국내에서 국외인 연해주로 이거해가며 온 힘을 다해 나라에 충성을 하였다. 또한, 운강 이강년에겐 도체찰사 즉 계엄사령관의 밀지를 내려 [의병의 모집에 필요한 인장과 군수자원을 운강 마음대로 알아서 집행하라 명하셨다] 이에 운강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왕산 허위와 더불어 8도 의진을 조직하여 대일전을 선포하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며 동대문 인근까지 진출하는 등의 왜적에 대항해 빛아비들과 혁명 전쟁을 치르다 왕산 허위와도 같이 피체되어 1909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민족의 누이 유관순보다 11년 앞서 서거하시므로 민족의 아버지가 되셨다.
그리곤, 후일 황제는 감리교인 우당 이회영 권사와 해석 손정도 목사와 더불어 이제까지 누구에게 독립운동 할 것을 명령/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독립전쟁의 수행자가 되시려 베이징에 내탕금으로 동궁을 마련하였다.
나는 황제와 한 담을 사이에 두고 있던 정동제일교회의 목사이고, 황제는 노블의 교인이 되어 변복후 예배에 참석했으며, 나와 노블 감리사 그리고 황제는 사실 한 통속으로 민족의 미래 전략을 짜는 사이임에랴~ 여기에 나는 황제로부터 왜적들의 눈속임을 위한 선유사로 갔으며 기실 황제의 뜻을 담아 의병 이거 독려 사명을 수행하였다.
결론 : 나의 선유사 활동은 황제의 명으로 의병진의 소멸을 막아 더욱 가열찬 의병전을 수행케 하기 위한 위장 전술의 일환으로 실행된 것이다.
&. 위장 선유활동, 의병 이거 독려 그리고 애국계몽 강연
1) 위장 선유활동 : 기만전술
구호 – 살아서 싸우자, 배우면서 싸우자, 의병패전과 동학학살에서 배우자,
우리 민족은 의를 위한 거짓과 위장, 은/엄폐를 밥먹듯이 하여 왔다. 적에겐 절대 정직하지 않다. 을지문덕의 적진 침투 항복 전략, 청야전술, 매복 그리고 이순신이나 권율도 적진을 교란하고 속이는 전략은 항상 기본 사항이다. 피체시엔 모진 고문에도 확실한 증거를 들켰을 때만 내가 다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아무 상관없다하여 독립운동은 보안/비밀이 필수이므로 같은 지역, 종교,가문, 학연 등 평소 내가 책임지고 보호해야하거나 혹은 피해를 할 수 없이 끼친다해도 용서가 될 이들과 운동을 하는 것이다. 타지역, 타종교, 타이념, 타가문과 함께하는 연합운동은 극히 한정적인 영역에서 진행되었다.
흔히, 3.1 혁명에 감+불+장+천도가 연합했으니 이런 일이 일상적일거라 생각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이들은 혁명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아주 잠시 같이 했을뿐 출옥후엔 타종교끼린 대면도 안했다, 그 이유는 적들의 감시가 심해서이기도 하도, 사실 타종교들 끼리 딱히 할 것도 별로 없다. 하여, 죽을 때까지 타종교는 안 만났다. 또한, 1927년의 신간회와 근우회가 죄우합작으로 건설되었으나 어떤 차이와 다툼으로 3년여 만에 해산돤 경험 그리고 감/장로회의 대한애국부인회를 공동조직했더니 어떤 회원이 왜경에게 들킬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오자 스스로 먼저 조직을 발고한 끔찍한 사태가 일어나 조직이 일망타진된 사례로 보면 타종교, 타이념, 타지역, 타가문과는 함부로 연합운동을 할 일은 아니나, 상하이 임정과 의열단, 그리고 북/서로군정서, 도쿄학생단, 간도와 만주 무장단체 등은 연합과 단결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 3.1 혁명 민족대표 – 선언식후 자수하여 피체되니 투항인가? 옥쇄투쟁인가? 민족은 그 대표들의 뜻대로 최후의 일인, 일각까지 싸우며 민족정통정부를 끝내 수립해 냈으며,
+. 85년 연세대 연합집회시 민투학련 의장 정태근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일부러 전경진을 향해 달려나가 체포되었을 시도 집회의 대중들은 연합시위 역사상 제일 강력한 투쟁으로 지도부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이를 보면 지도부가 일부러 피체되는 것은 대중들을 더욱 가열차게 투쟁전선으로 이끌어 내려는 결단의 일환으로 그리하는 것이지 3.1 혁명 민족대표들이 무섭고 뭐가 어째서 자수하고, 피체된 것이 아니고, 더욱 결연히 투쟁하게 하고자 하는 뜻이 있으므로 이를 가리켜 옥쇄투쟁이라 한다. 옥쇄의 대상은 지도부와 같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감옥에서 바라다 보이는 십자가, 하늘 그 자체가 옥쇄투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별히
몽양 여운형을 비롯 민족이 왜를 기만하므로 민족에 승리를 안긴 몇 가지를 소개하여 탁사의 위장 선유의 근거와 논리를 더욱 강화하고자 한다.
내용은 지금의 서울연회와 최용신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다 위장과 위선으로 가득찬 민족 승리의 찬란한 역사였음을 기록한다.
=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강력한 위장 기만 전술은 경찰서 바로 앞에 잡화상을 차리고 연락소로 이용한 것이며, 가족들도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시는지 아무도 눈치를 못챘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가 있다.
$. 탁사를 배움 = 집단 기만전술의 최고봉
탁사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 시기 전 민족중 제일 고통이 심햇던 감리교인들의 본향이다. 그 때의 감리교회의 민족적 지위와 위상은
대한제국의 황실과 감리교회 선교 본부가 민족운동의 총본산이며 핵심 정무기관이었다.
이 글의 내용은 여운형과 감리교회 그리고 신사참배에 담긴 비밀 이야기이다.
우린 보통 항왜 성전기중 태평양 전쟁기 즉 황국신민화 정책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는 신사참배 요구에 굴종하고 창씨개명같은 거나 하며, 민족의 요구엔 교회와 민족이 무능하게 대처하였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아는게 아는게 아니다.
*. 일제 강점기는 그들의 입장에 쓰는 용어로 인정하지 않는다. 점령을 당한 것이 아니라 침략을 받은 후 우리는 적들이 항복하고 철수할 때까지 싸웟다는 관점이다. 하여, 항왜 성전기이다.
정말 그럴까?
그렇게 무능하게 준비도 없이 훼절하고만 살았는데, 왜적의 항복후 건국 준비가 그렇게 신속하게 될 수가 있었을까?에 대한 물음을 하면 그 답은 찾아질 수 있다.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이고 충분치 못한 자료이지만 민족세력의 핵심인 감리교회는 국내 부분에서 이렇게 대처햇다.
1. 일단, 우리 속으론 긴밀히 강력히 준비 대처하지만 왜적의 요구엔 최대한 느리게 대처한다는 것이 기본 방략이다. 이는 신사참배에 대한 정책을 왜적이 관철해나가는 과정에서 서울에 선교사령부를 가지고 있던 감리교회가 평양이라는 외곽의 장로교회보다 늦게 굴복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서울의 치안 등은 지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압박이 훨씬 심했는데도 늦게 굴복했다.
*. 지방인 장로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압박은 지방이기에 훨씬 약했다.
*. 우린 선교와 민족운동의 주요 핵심 정무기관이 다 서울에 있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 국내에서 제일 중요한 정무 핵심기관 이 서울에 있던 감리교회 본부와 감신과 연세 배재 이화 배화 태화* 등 그리고 교회들인데, 여기서는 민족운동의 핵심 구국간성들이 활동하거나 양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타격을 받지 않게 보호하려는 민족의 눈물겨운 노력. 민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왜 중요한가는 이 학교와 교회에서 배출한 독립운동가를 보면 안다.
*. 서울에 있던 감신, 연희, 세브란스, 배재, 이화, 배화, 태화, YM 출신과 기반으로 활동하여 건국훈장 추서받은 유공자의 수가 200여 명 되는 것이 그 확실한 증거이다.
2. 서울 한 복판에 있는 배재학당은 끝내 학내에 황국신민 서사석을 설치하지 않았다.
왜는 배재에 요구했다. 황국신민 서사를 이렇게 저렇게 외우며 그 표지석을 교내에 설치하라 요구하였는데, 말로 일단 승락한 후 1년 안 하다가. 왜 안 하냐 따지면 아네. 여기에 할겁니다하고 1년 안 하다가. 왜 안 하는거요 닥달하면. 아네. 이제 돌 사왔습니다. 1년 안 하다가. 아니 이런 당신들 모하는거야 윽박지르면 아네. 석공을 구했으니 이제 곧 완성됩니다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천하의 만만디 속임수다. 하나, 동방요배나 황국식민서사 암송은 도무지 피할 수 없어했다.
3. 1941년 감신대에서 항왜 성전기 마지막 학생운동 사건인 "황국신민화 교육 반대 삐라사건"이 발생해 교장과 학감 그리고 학생 등 10여 명이 투옥되었다. 홍현설, 변홍규, 정일형 등의 교장/교수와 유증서, 라사행 등의 학생들이었고 투옥된 이들은 80여 일간 모진 고생을 했으며 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학생들중 내가 했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는 했을 테지만.
4. 감신 재학중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제적?(강제휴학?)으로 학교를 그만둔 최용신* 전도사가 안산에 와서 민족계몽운동을 하다가 서거하자 민족은 전면적인 장례투쟁에 돌입했다.
1) 한 처녀의 죽음을 유례가 없이 중앙 일간지에 여러 차례 부고와 추도문, 기고문 등이 발표된다.
2) 대한민국 최초 사실상의 여성 민족장인 사회장으로 치러진다. 한 2~300여 명의 농촌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을뿐인데, 그 시골에 1,500여 명이 넘는 장례 인파가 몰려들었다.
3) 동아일보가 소설을 공모하여 감리교회 심명섭 목사의 동생 심훈이 상록수를 발표한다. 이 소설이 사실과 다르게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고 샘골교인들의 불만이 있따르자 연세신학 출신이자 무교회주의자인 김교신이 제자 유달영에게 최용신 소(평)전을 집필/발간케 했다.
소설 상록수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출판 사상 최고의 부수인 1억권이 발행되었으며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최용신 소(평)전"은 항왜기 최고의 다독 도서로 꼽힌다. 총 2,000여 권이 발간되었는데, 1권당 200여 명이 이상이 돌려보았다 전한다. 이 평전으로 민족은 식민지파쇼광포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민족은 "한 처녀도 이렇게 힘들게 버티며 살았는데 우리도 조금만 더 버티자"는 정신이 살아나 민족은 마침내 왜적을 이겨낼 정신적 힘을 얻었다.
4) 이 때 이 장례투쟁을 주도하여 꾸민 이는 염석주이다. 염지사는 여운형과 매우 친밀한 동지로 그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재직할 시 최용신에 대한 각종 기사가 신문에 게제되도록 도모한 이이다. 염지사는 최전도사의 상록학원 이사장으로 최전도사의 운동을 도왔다.
5) 장례 한 번 치르는데 민족의 노고가 어마어마했다.
*. 왜적들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사람 죽어 장례 치른다는데 뭐 별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최전도사는 샘골교회를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교회의 교사/전도사였다.
나열하면 동쪽으론 둔대교회, 반월교회, 야목교회엿고, 남서쪽으론 수암교회, 군자교회, 성광교회, 선부교회* 등이다. 지금 걸으라치면 엄청 멀다. 한 1~3시간 거리다. 허니 입도 짧아 먹는 것도 부실한 최전도사가 각기병과 장중첩증에 걸려 서거했던것은 아닐까?
*. 위의 모든 교회들은 해방 이전에는 담임전도사는 없는 순회감리사/샘골교회 담임목사/선교사/전도사가 순회하는 구역들이었다. 그렇게 해방 이전 2~30 여명 정도 유지만 되던 작은 교회들은 지금은 다하여 목회자만 지금껏 50여 명 배출하는 교회가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이 후로도 샘골교회는 교회=알낳기를 계속하여 지금의 반월중앙교회, 본오교회, 부암교회라는 자식 교회를 두엇고, 반월교회는 영광교회, 성안산형제들교회 등 5교회를 낳았으며, 반월중앙교회는 만족교회 등 10개 교회를 낳았으니 이들은 손자 교회들 격이다.
또한, 야목교회는 마지막 의거 사건인 부민관폭파사건의 주모자 조문기 의사를 배출했다. 조문기는 희대의 악마, 민족 반역 살인자인 박춘금이 1945년 8월 9일 동아분격대회를 열고 8월 12일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살생명부 2만명을 작성해놓고 실행하려는 계획을 파탄낸 교회의 장한 청년이다. 지금 서울시의회 앞에 보면 조그만 표지석이 잇다. [부민관 폭파 의거터]라고. 박춘금*은 왜적들이 도왜할 시 적들과 함께 도왜했다. 국내엔 도저히 있어선 안 될 반역자였기에..
*. 그 흉악한 왜군위안소를 운영했던 배정자조차도 도왜하지는 않았다.
*. 하나의 예로 들면 상동교회(스크랜튼과 대부인) - 무지내교회(스크랜튼 대부인과 아펜젤러) - 샘골교회(최용신)* - 반월중앙교회 - 만족교회의 5대 교회가 형성되엇고 얼마후면 6대교회가 탄생한다.
*. 최용신 : 탁사와 같은 양명학 계열 중농학파 이익의 제자의 맥을 잇고 있다. 최용신도 왜경을 속여가며 민족교육을 시키는데엔 이골이 난 전도사이자 교육자였다.
5. 여기가 메인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몽양 여운형은
양평 출신으로 배재에서 수학하고, 상동교회에서 민족운동을 전덕기 목사로 부터 전수받고 강릉에 초당의숙을 열고 강릉중앙교회의 의숭학원에서 같이 교사하다가, 경술왜란으로 왜적이 초당의숙과 의숭학원에 천황연호 사용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단군연호와 서력을 사용하다가 학교를 폐교 당하고 쫒겨나 본격적인 민족운동의 길을 걷기위해 만주에 상동교회 신민회 인사들의 결의로 이회영 선생 등이 세운 신흥무관학교 즉 독립군 장교양성기관을 순방하고, 독립운동가의 집결처인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상하이 임정 참여 등의 해외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국내로 기획피체*를 통한 침투하여 국내 민족운동의 진영을 총괄 지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 국내로 침투하기 위해 일부러 피체되어 주었다. 침투/피체/투옥/석방후 국내의 유명 지도인사가 되어 국내지도진영에 자연스레 합류했다.
이는 임정 지사*들의 국내 기획 침투 전략의 일환이었는데, 도대체 뭘 믿고 뭘 기반으로 국내운동을 지도하려 했을까?
*.임정지사 : 임정지사들의 대부분이 상동교회 중심의 신민회인들인데, 특이한 것은 목사중 임정 처음부터 마지막 환국하기 끝까지 동행햇던 이는 감리회 목사 이상만이 유일하다. 이상만은 당진의 면천교회 목사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상하이에 나타났고, 임정의 국무위원(국무령제하 장관)으로 목사로 끝까지 활동하였기에 임정의 종교성은 100% 감리교회이다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 다른 목사 즉 손정도, 현순, 김병조 등은 당분간 머물렀던 목사들이다.
몽양의 조직 밑천이 본디 교회이다.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과 민족운동을 시작한 몽양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감리교회 출신으로 장로교회 전도사라는 직책을 얻어 장로교회를 민족운동 전선에 묵어두고자 하는 프락션 활동을 하였다. 두터운 인맥과 담력의 배경.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린 일반적으로 항왜 성전 말기에 몽양이 건국을 준비하기 위하여 노동자, 농민, 지식인, 학생 들을 기반으로 비밀결사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고 알고 잇다. 맞다. 틀림없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린 그 같이 햇던 이들의 실체적 존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이들 이었는가에 대해선 인지를 못하고 있었다.
1927년을 기억하자.
좌우 합작 민족운동 기관이었던 신간회와 여성 기관으로 근우회가 창립되었던 시기에 조직은 삽시간에 수 만의 조직원과 수 백개의 지역 조직을 갖추게 되엇다. 도대체 어떻게? 사무실은 YMCA 사무실과 조직원 그리고 YWCA 조직원 등 각 지역의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은 그 실 구성원이 교인들 이었었는데, 그 신간회 근우회가 3년 여만에 해체된 적이 있었다.
*. YMCA 전국 전 지회가 전부 신간회지회로 동시 전환한다.
이 기억을 1940년대의 건국동맹에 대입시켜보자.
신간회와 근우회는 공개 반합법조직이어서 활동이나 면모 인사들이 드러나 잇지만, 건국동맹은 미공개 비합법조직의 특성상 전혀 드러나지 않게 조직 작업이 이루어졌다.
현상적으로보면 해방을 얼마 앞두고 왜적들이 자신들의 항복후 퇴각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몽양을 찾아 상의하였다는 것이 뭘 말하며, 민족의 승전후 임정이 입국하기도 전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20여 일만에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조직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었던것은 순전히 몽양이 가지고 잇던 민족역량중 감리교회와 장로교인들 특히 감리교회의 역량이었던 것이다.
*. 전국의 학생 조직, 기독교 조직(이 속에 노동자, 농민, 지식인이 있다) 등은 건국동맹에 비밀 조직원으로 5만여 명이 굴복하고 항복한 모습으로 합류한다.
*. 물론, 당연히 감리교단 지도부나 YMCA 지도부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가 없게 말이다.
*. 신간회 근우회시엔 전국에 수 백개의 지회와 수 만이 순식간에 조직되나 건국동맹시엔 비밀이니까 하나도 안 보이는 것일 뿐.
*. 상하이 임정의 연통제 조직도 물려받았다.
*. 동선은 이미 몽양이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등의 인맥과 경로를 통해 장악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조직을 손바닥 위에 있는것처럼 지도했다.
겉으론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단 지도부 였었으나, 속까지 왜적에게 굴복한건 아니었으며,
이건 민족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교회의 위장 항복이었다.
교회의 역량과 YMCA를 중심으로 포진해잇던 교회 역량은 신간회 당시와 똑같이 조직 역량을 한꺼번에 폭발시킬 수 있었고, 건국을 위한 준비는 그렇게 되었다. 폭발은 했으나 왜는 아무런 조짐도 알아 차릴 수가 없었다.
*. 이 위장 항복을 하고 강제 동방요배나 신사참배 그리고 황국신민 서사를 왜놈들 앞에서 외울때 얼마나 서럽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팟겠는가?
왜적들은 우리 민족을 정신 고문한 것이다. 우린 민족을 위해 기꺼이 당해 주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왜놈들 가랭이 밑이라도 기었다.
*. 그런데 신사참배에 굴복 절대 못한다고 끝까지 맞서 싸우다 서거하신 분들은 그 분들 대로의 공적이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분들 덕에 비밀조직이나 위장항복이 안 들킬 수 있었다. 진짜 항복한것처럼 보였으니.
*. 이것도 모르고 해방후 재건파 복흥파로 갈라져 감리교회는 싸웟다. 전 민족이.. 나는 니가 해가며...
이 말은 몽양의 비밀 조직 작업이 그만큼 치밀했다는 일 증거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쫒아다니면서 그게 아니었다고 해명할 수도 없으니 본디 비밀운동의 실상이 그러하다. 천하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활동한다.
*. 천하의 몽양도 위장용으로 동방요배햇다.
*. 이 정신 수탈/고문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의제이다. 신사는 전국에 야외의 정식 시설만 2,200여 개가 설치되었고, 모든 종교시설의 안에도 조그만 시설이 설치되었었다 한다. 우리가 위장 항복과 강제 신사참배였다는 결정적 증거가 있다. 2,200여 개의 신사는 왜적의 항복일인 1945년 8월 15과 16~17일 단 3일만에 전국에서 단 한개도 남기지 않고 부서졋다. 누가 부셨겠는가? 교인들이 다 부쉇다. 그만큼 교인들은 괴로웟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성환의 감리교회에 신사의 기초석이 뒤곁에 남아있다. 다크 유적의 복원.
*. 어떻게 이 정신 고문 수탈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중지를 모아야.
여기엔.
감리교회 목사인 심훈의 형 심명섭 목사와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의사엿으며 송도고보와 배화여고 교사 그리고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자이자 종교교회 교인이며, 1930년 북.남감리교회의 합동인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역사적 선언이나 교리적 선언 등을 웰치 감독과 김종우 목사 등과 같이 초안한 "이만규"가 있었다.
이들은 여운형과 해방후 건준을 조직하여 좌우를 망라한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착수하였고 이것의 결과가 인민공화국이다.
이만규는 인민공화국의 보건부장과 문교부장을 역임했다.
이 건준이나 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므로 국내에 뭐 별게 있었겠느냐?는 인식을 순식간에 바꾸는 어떤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 혁명적 사건이었다.
*. 뭐 별거 없었는줄 알았는데 갑자기 건준이 나오더니 공화국 정부가 나왔어? 이것이 혁명아니면 뭘까?
*. 오랜 기간 준비되어왔던 것들의 외화였던 것이다.
사실,
여운형이나 이만규는 정말로 빼어난 역량을 갖춘 이들 이엇다.
천황연호 부정하고 단군연호 사용하다 쫒겨나는 일이나, 장로교회를 민족운동 전선에 못빠져 나가도록 프락션이 된다든지 하는건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감리교인이면서 장로교인이기도 장로교인척이기도 하며 둘 다를 감당한 것이다.
이만규.
해방 정국=미군정기를 뒤흔들엇던 사건중 하나인 서울대의 국립 대학화 반대투쟁(국대안)의 선봉장이다.
추진 주체가 미군정인데 이에 맞서 정면으로 맞서 싸웟다.
이렇게 간파된 주장은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곧, 감리교회를 비롯한 민족운동 진영은 왜적들이 아무도 눈치 못채게 건국을 실질적으로 준비했다.'
하여, 민족이 왜적들의 굴종 요구에 제대로 된 반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신사참배나하고 그랬던 무기력하기 짝이 없고 무능햇던 우리 교단 지도부였다 폄하하는 것은 실상이 아니다.
헌데, 현상을 보면 교회나 YMCA 등의 단체를 보면 굴복하여 아무것도 안 하는 것같이 보이고 신사나 참배하니 굴복했구나!라고 확신을 하게하는 것 자체가 전략이었다. 굴복 안 한것 같이 보이게 하면 들통나니. 하여, 해방후 극심한 혼선이 있었다.
[감리교인이 건국동맹의 주요 비밀기간요원이었다.]
결론.
목적을 위해서 다 속이는 거였다.
*.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교육계 그리고 청년계 학생계를 총 망라하며 임정의 국내 조직 역량의 총집결체인 건국동맹은 그렇게 조직되고 활동하였다. 그 핵심이 여운형과 이만규이다.
이 조직은 하나님만 알게 움직인 민족의 "다크 템플러 곧, 어둠의 사제"들이었다.
곧, 탁사는 몽양 이상으로 황제와 함께 왜적들을 기만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