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차이나는 두 사람의 14가지 사례/11월13일주/강단초록/선교사복지주.

박영규
  • 1391
  • 2022-11-11 04: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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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차이나는 두 사람의 14가지 사례.
성경-마태복음 24:41, 누가복음 17장34절.

오늘은 성경을 근거로 해서 차이나는 두 사람의 사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1.가인과 아벨(창4:1-8)
가인과 아벨은 인류 최초의 조상 아담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농사지은 것으로 구별 없이 드렸으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예배자를 찾으십니다(요4:23-24)

2.두 아담(롬5:12-21)
첫째 아담은 선악과를 따서 먹음으로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실낙원과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담 예수님을 통해서 인류의 죄와 사망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 낙원인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3.사라와 하갈(창21:8-21)
사라는 아브라함의 본처로 이삭을 낳아 메시야의 계보를 이었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후처로 이스마엘을 낳아 사라를 멸시하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자 사라의 요구로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5.이삭과 이스마엘(창21장-22장)
이삭은 족보상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며 아브라함이 BC1872년 경 이삭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인 모리아 산에서 희생제물로 드리다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로 메시야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을 언약(covenant)하셨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엘을 바쳤다고 주장을 하고 있으나 성경적이 아닙니다.

6.에서와 야곱(창27장-33장)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입니다. 큰 아들 에서는 장자 권을 소홀히 여기고 에서의 자손 에돔은 사해 바다 동남쪽에 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장자 권을 사모해서 장자 권과 축복을 받고 에서가 장자 권과 축복권을 빼앗긴 것을 알고 후회하며 야곱을 해치려 하자 어머니 리브가의 권유로 어머니 친정인 외가 외삼촌집으로 피신을 해서 외삼촌의 딸 레아와 라헬과 여종들과 결혼을 해서 12아들과 딸을 낳고 20여 년간 외삼촌이며 장인 라반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다가

하나님의 구별 된 축복을 받고 외삼촌 집을 떠나 가다가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종들의 보고를 듣고 두렵고 답답하여 에서의 손에서 건져주시고 내가(하나님) 반드시 은혜를 베푸신다는 언약을 이뤄달라고 언약을 되새기며 형 에서에게 줄 가축 예물을 준비하고 얍복 강가에서 어떤 사람과(천사) 씨름을 하다가 매달리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주셔서 이스라엘이 후에 국호가 되었습니다.

7.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창39장)
요셉이 꿈과 채색옷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사 이집트로 팔려가 바로 왕의 시위 대장 보디발의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해서 유혹을 물리치고 피했지만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8.요셉이 옥중에서 만난 두 관원(창40장)
요셉이 옥중에서 만난 두 관원이 꿈을 꾸었는데 요셉의 해몽대로 한 사람은 바로 왕의 술을 빚는 관원(신하)으로 복직이 되었고 광주리의 떡을 새가 쪼아먹는 꿈을 꾼 신하는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9.모세와 바로
모세는 이집트에서 400년-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을 시켰고 이집트 왕 파라오는(바로 왕)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고 학대하며 노역을 시켰습니다(출3장, 출5:4)

10.나오미의 두 며느리
오르바[Orpah]는‘목’,‘목덜미’란 뜻이며 오르바는 모압 출신으로, 흉년을 피해 유다 땅에서 모압으로 갔던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아들인 기룐과 결혼한 여자(룻 1:1-4). 그녀의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가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오르바는 울다가 친정으로 갔습니다.

한편 나오미의 다른 며느리 룻은 그 시어머니와 함께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룻 1:1, 14; 4:9-10) 출처-라이프성경사전
룻은 홀 시모와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와 어머니를 잘 모시며 시어머니 나오미가 부탁한 대로 실행해서 보아스의 결혼 승낙을 받아 다윗의 증조모,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마1:5)

11.에스더와 와스디
파사(페르샤)왕 아하수에로의 왕비 와스디는 교만하여 폐위당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유대인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이 되었는데 하만의 계략으로 왕의 어명을 받아 유대인들이 몰살당할 뻔했는데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유다인 65,000 여명이 살게 되었습니다.

12.매를 가는 두 여자와/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는데
본문 성경에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태복음 24:41) 영어성경-Two women will be grinding with a hand mill one wi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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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눅17:34)
[KJV] I tell you, in that night there shall be two men in one be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shall be left.

둘이 맷돌을 돌리고 있는데 한 여자는 데려가고 한 여자는 버림을 받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끝인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는지 예수님도 천사들도 모르며 하나님께서만 아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버림받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족 모두 성도님들 모두 구원받아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영생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예수님 십자가 좌우편의 강도
누가복음23:39-43절을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편의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14.선조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선조는 1552년에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왕족 시절에는 하성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제13대 임금인 명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명종의 왕비인 인순 왕후의 추천을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선조는 처음에는 나라를 바르게 이끌기 위해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유학을 장려했다. 이때 기묘사화로 물러났던 많은 사림들이 중앙 정치로 돌아왔다. 그러나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 등의 붕당으로 나뉘면서 당쟁이 심해졌다. 어지러운 정치는 나라의 힘을 점차 약하게 만들었고,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졌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권력을 잡자, 선조는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보내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에 다녀온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자, 선조와 조선 조정은 대책을 세우지도 못한 채 1592년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일본군이 침략한 지 보름 만에 한양으로 진격하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쳤다. 백성들은 도성을 버린 임금을 원망했으며, 전쟁의 과정에서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이 불타기도 했다. 다행히 의병의 활약과 이순신, 권율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승리, 명나라의 지원군 등에 힘입어 임진왜란은 수습되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과 서인이 당쟁을 이어가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선조는 전쟁을 막지 못한 무능한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608년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선조는 임진왜란을 막지 못해 무능하다고 비판받는 조선의 임금(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2015. 2. 10.김한종, 최혜경, 박승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출생-본관은 덕수이씨(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方震)의 딸인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씨(海州 吳氏)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다.

무과급제와 함경도 근무
1572년(선조 5) 훈련원(訓鍊院) 별과(別科)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하였다. 그래서 30세가 넘은 1576년(선조 9)에야 식년시(式年試) 무과(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1583년(선조16)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상을 마치고 1586년(선조 19)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로 다시 관직에 나서, 곧바로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만호(萬戶)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녹둔도(鹿屯島)의 둔전(屯田)을 관리하다가 여진족의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으면서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당시 이순신의 병력 증원 요청을 병사 이일(李鎰)이 무시해서 벌어진 일이었으나, 이순신은 패전의 책임으로 장형(杖刑)을 당한 뒤에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전라도 수군절도사
1589년(선조 22)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助防將)과 선전관(宣傳官)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으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임진왜란과 해전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玉浦)와 합포(合浦)에서 왜선 30여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옥포해전), 다음날에도 적진포(赤珍浦)에서 1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적진포해전). 이 전투들에서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종2품 가선대부(家善大夫)로 승진했다.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泗川)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사천해전). 이 전투에서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7월 10일(음력 6월 2일)에는 당포(唐浦)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당포해전), 7월 13일(음력 6월 5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唐項浦)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다(제1차 당항포해전). 이러한 잇따른 승리로 이순신은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왜군의 전라도 남해 진출을 막다
이순신에게 잇따라 패배한 왜군은 수군의 모든 역량을 전라도로 집결해 맞서려 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8월 14일(음력 7월 8일) 견내량(見乃梁)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한산도(閑山島)로 유인해 50여척의 왜선을 격파·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한산도대첩). 그리고 안골포(安骨浦)에서 지원하러 온 왜군을 다시 물리쳤으며(안골포해전), 10월 5일(음력 9월 1일)에는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釜山浦)에서 왜군의 병선 100여척을 파괴했다.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이순신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9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음력 3월 4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제2차 당항포해전), 11월 11일(음력 9월 29일)에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長門浦)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장문포해전).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둔전(屯田)을 일구고 병사들을 훈련하였다.

원균과 갈등 그리고 파직되어 백의종군
하지만 당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요시라(要時羅)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량해전에서 대승
그러나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倭城)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1598년(선조 31)에도 절이도(折爾島)와 고금도(古今島)에서 왜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은 그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해 노량(露梁)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노량해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충무라는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됨
1643년(인조 21)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1707년(숙종 33)에는 충청도 아산(牙山)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신 [李舜臣] (두산백과)


오늘 차이나는 두 사람에 대한 14가지 사례를 통해 깨달으시고 신앙생활 잘하셔서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365세를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간 줄로 믿습니다.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누가복음17장 34절) 둘이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시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버림 받으면 영원히 만날 수가 없습니다.
에스라서 2장에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의 가족과 성도님들 모두 아래의 예루살렘 귀환자 명단의 이름처럼 생명책에 기록이 되셔서 목자장 예수님 따라서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다 들어가셔서 영생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스마웻 자손이 42명

35절 스나아 자손이 삼천육백삼십 명입니다.
여러분 가족은 자녀들 다 출가하고 살림나고 두 명 또는 5명 가족 전체는 20명,
교회 성도님 수가 에스라 2장의 명단처럼 42명, 156명, 3,630명 이라면 모두 새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로
아래
구약성경 에스라 2장에 1차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자 명단을 올립니다.
에스라 2장 1절~ 70절
1절.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절.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3절 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아라 자손이 칠백칠십오 명이요.
6절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십이 명이요.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삿두 자손이 구백사십오 명이요.
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바니 자손이 육백사십이 명이요.
브배 자손이 육백이십삼 명이요.
아스갓 자손이 천이백이십이 명이요.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육 명이요.

14절 비그왜 자손이 이천오십육 명이요.
아딘 자손이 사백오십사 명이요.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팔 명이요.
베새 자손이 삼백이십삼 명이요.
요라 자손이 백십이 명이요.
하숨 자손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깁발 자손이 구십오 명이요.
21절 베들레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느도바 사람이 오십육 명이요.
아나돗 사람이 백이십팔 명이요.

24절 아스마웻 자손이 사십이 명이요.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자손이 칠백사십삼 명이요.
라마와 게바 자손이 육백이십일 명이요.
믹마스 사람이 백이십이 명이요.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느보 자손이 오십이 명이요.
30절 막비스 자손이 백오십육 명이요.
다른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하림 자손이 삼백이십 명이요.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이십오 명이요.
여리고 자손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35절 스나아 자손이 삼천육백삼십 명이었더라.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더라.
40절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이십팔 명이요.
문지기의 자손들은 살룸과 아델과 달문과 악굽과
하디다와 소배 자손이 모두 백삼십구 명이었더라.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게로스 자손과 시아하 자손과 바돈 자손과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갑 자손과 사믈래 자손과 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아스나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부심 자손과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바슬룻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더라.

55절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스바댜 자손과 하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미 자손이니,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더라.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더라.

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모두 육백오십이 명이요.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을 따른 자라.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방백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64절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말이 칠백삼십육이요.

노새가 이백사십오요.
낙타가 사백삼십오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이었더라.
68절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 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69절 힘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
70절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서울제자교회 전 담임목사
동대문교회 협동목사
한국 위안부 소녀기념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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