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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기
  • 1892
  • 2022-11-16 07:24:57
*. 기왕에 보시려거든 앞 뒤 옆 위에 계시는 분들에게도 읽어보라 권해보세요.

송득후 3 – 해설과 정리

민관기가 송순재의 신학셰계를 기초로 해설한 것입니다.


송득후 목사에 대한 공적은 오해나 오판의 여지가 있다. 하여, 독립유공자 심사/포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명하고, 더 깊이 연구해야할 과제가 있다 여겨져, 위에서 (송득후 1과 2 자료)제시한 논점 중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설코자 합니다.


1. 만주신학교 교장 재직에 대해

만주신학교는 감리교회협성여자신학교 교장과 감리교회신학교 부교장을 역임한 걸출한 여선교사 채핀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왜제(倭帝)’의 미국인 배제 전략에 따라 특히, 미국인 선교사들은 요직에서 제거됨에 따라 그 자리를 파송제에 의해 송목사가 이어받았지만, 한글이나 조선역사 등이 강의되며, 대한인 성직자/교수들이 젊은 신학생들에게 어떤 사상을 주입하는가는 사실상 뻔하게 민족주의 교육임을 알고 있었기에 왜적들은 감시하기도 귀찮아서인지 1941년 이 학교를 폐교시킨다. 어찌보면 당시 만주신학교는 대한인을 직업적 성직자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중 제일 선진적 민족 교육을 택하고 있었다 여겨진다. 그 곳은 그나마 왜의 감시가 국내보다는 덜한 요소가 있었고 따라서 일일이 어떻게 하기가 번거로워 폐교시켜 버린 것으로 본다.

예로 1) 안산의 최용신 선생이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상대로 한글 교육 등을 할 시에 순사들이 수시로 상록학원을 감시하였기에 제대로 된 교육을 맘껏 시키지 못했음과 결국은 상록학원 인근에 본오소학교를 세워 어린아이들의 민족교육의 통로를 틀어막고 학생들을 뺏어가고 규제를 가하여 100명 이상이 되는 인원은 모두 다 집으로 보내 집에 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눈물바다로 만든 사건이나,
2) 서울의 감리교회신학교는 황국신민화교육이 기승을 부리자 아예 황국신민화반대 삐라를 제작 살포하여 항거하다 교장/교수 3명과 학생 7명 등 10여 명이 피체되어 지독한 고문을 받고 학교는 1942년 폐교되었던 것과,
3) 평양의 요한학교 역시 마찬가지로 교회 수가 늘어나는데 부족한 교역자를 채우기 위해 세워졌으나 역시 민족주의 종교교육을 하고 있을 것이 보나마나 뻔한 상태였으므로 감시하기가 만주보다도 더 용이하였다는 점이 작용되었는지 오랫동안 놔두다가 100여 명의 졸업생만 배출한 채 1944년 폐교시킨 것에서 확인된다.

서울의 감리교회신학교와 평양의 요한신학교 그리고 만주신학교 세 학교는 공히 민족주의 감리교회 성직자 양성(정신 방면의 민족운동가 양성)의 최고교육기관(약 50여 명의 독립유공자와 60여 명의 순교자 배출)이었음이 드러난다. 그중 감시하기가 훨씬 어려웠던 만주신학교가 폐교의 1순위로 작동된 것이다. 더구나 만주신학교의 교장이 3.1혁명에 참전했던 정경옥 교수로 바뀌고 송득후, 현석칠, 도인권, 배형식 등의 민족주의 목사들이 이사진으로 포진하고, 교감에 역시 강골 민족주의자 송정률 목사가 시무하게 되자 왜제는 만주신학교 탄압에 더욱 열을 내어 그 결과 이 학교는 1941년 감리교회 신학교 중 제일 먼저 폐교되고 만다.

감리교회 목회자 양성을 위한 3개의 신학교는 그렇게 차례대로 폐교되었다.

*. 서울의 경성제대는 어떤 경우에도 폐교될 위험이 없었다. 대한에 존재하는 단 2개의 대학 중 유일하며 최고의 매국대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엔 대학령과 전문학교령 등이 있었는데 대학은 단 2개였다. 하나는 매국대학 경성제대 그리고 감리교회신학교였었다. 대학령은 예과 2년 본과 3년제였으며, 4각모를 착용했다. 이화전문,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경성의전, 보성전문, 숭실전문 등은 전문학교령에 따른 학교였다. 예전에 있었던 이화학당의 대학과나 숭실학교의 대학과 배재학당의 대학과 등은 호칭이 대학과 였고 실제의 대학은 아니었으나, 실 능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경성제대는 대한인 중 머리에 든 게 제일 많은 이들이 왜적에게 빌붙어 먹으려 들어갔다. 경성제대 출신의 독립유공자가 2명인가하나 친일인명사전 등재자는 수다히 많다. 서울 감신대는 50여 명, 평양 장신대 30여명, 평양 숭실학교 80여 명, 서울 이화 20여 명. 서울 배재 20여 명, 서울 배화 20여 명, 광주 수피아 20여 명, 서울 정신 20여 명, 개성 호수돈여고, 원산 루씨여고, 평양 숭의여고, 대구 일신학교, 양양 정명학원이나, 그리고 제중원의학교, 세브란스의전, 경성의전, 경성여의전 등 의료인 양성기관 출신은 특별히 합하여 100여명 이상이다. 비교가 안 된다.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위에 언급된 학교들의 특성을 가만히 보라. 경성의전을 제외하면 100%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미션스쿨이다.

왜 그럴까? 그 답은 해당 교단들의 학교에선 민족주의 신앙교육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의학교 출신들이 독립유공자가 많은 것은 가르침을 주는 의사 교수들에게서 전수 받은 인류박애정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스크랜턴과 제임스 홀, 로제타 홀, 셔우드 홀, 하디,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 백정출신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독립유공자 건국포장 추서자) 등을 살펴보면 그 증거가 된다.

* 파송제와 청빙제 : 정춘수의 감독 피선 1938년 이후 1945. 8. 15까지 감리교회 선교사나 목사 등 성직자는 100% 감독에 의해 직권 파송되었다. 가라면 가야만 했던 것이다. 하여, 함경북도 곧, 장로교회 단독 선교구역으로 협약된 곳에 애산 김진호 목사를 파송하는 것은 선교협정 파기행위였으나, 이를 뻔히 알고 있던 애산은 그 파송에 순응했으며, 후일 독립운동 참여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포상 받음에 정춘수 체제에 순응한 것이 아무런 걸림돌이 안 되는 것이었다. - 교단의 통리자(統理者) 정춘수는 이러한 일을 강압에 의해 주도하긴 하나 독립운동가 목사인 김진호를 감리교회 선교지역이 아닌 장로교회 단독 선교구역 함경북도로 파송하여 교회 5개를 개척 설립하게 했다. 이 때 안산에서 최용신 선생을 도와 교사를 했었던 황종오 장로가 김진호 목사와 협력하여 민족운동과 선교활동을 수행했는데, 김진호 목사는 정춘수 체제에 순응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 공로를 부정당하지 않고 독립 유공자 추서를 받았다. - 이 논리와 상황은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의 연회장으로 취임한 송득후 목사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반면, 정춘수(3.1혁명 민족대표) 매국혁신교단 체제에서 같은 반열의 매국노는 언론활동을 하던 민족대표를 역임했다가 변절한 동양지광의 박희도(3.1혁명 민족대표, 매국행위로 무훈, 박희도의 변절은 민망한 행위로 인함이다. 어느 여학생과 옷벗기 화투놀이를 했다가 일이 폭로되어 종교계 이탈)이고, 교단 내부에서 매국행위에 동참한 이들은 갈홍기와 박연서(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가 친일행적 발굴로 2005년 서훈 박탈)등인데, 이들은 왜의 국방헌금 강요가 있자 유수의 감리교회 39개를 방매하며 여기에서 나온 20만원에서 10만원은 국방헌금으로 헌납하고 10만원은 나눠먹었으며, 수난자들의 유가족 원호조차도 하지 않은 파렴치한들이 진정한 의미의 친일매국노이자 인간 말종들이지 단순히 직책에 순응했다하여 친일행적이 있다 해석하는 건 지극히 부당하다.

한편, 정춘수 체제에 반기를 들었다가 구속/파면, 휴직 등을 당한 감리교회 평신도와 성직자들은 이를 종교인의 종교행위가 아닌 종교인의 민족신앙행위 차원으로 해석하여 포상함이 마땅하다.

한편, 청빙제는 교단의 최고지도자가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들 나름의 원칙을 세워 자기들 뜻대로 목회자를 세우는 것이다. 파송제와 청빙제는 전혀 다른 목회자 임명제도이다.


2.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 교구장 복무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목회자 임명/면직 제도는 개별교회의 판단과 결정으로 청빙하는 제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교단의 최고 행정지도자인 감독이 1,000명 교회에서 10명 교회로 파송하면 그대로 따라야하고 따르지 않으면 미파송상태가 되어 진급이 보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상황 하에 송득후 목사는 정춘수 매국혁신교단 체제에 의하여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장에 파송되었다. 하여, 송목사는 그냥 동포들을 위하여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각 권역 지역별 정세를 간략히 살펴본다.

1) 서울 – 왜제의 정무 핵심기관들의 집결처이다. 조선총독부, 헌병사령부 등이 존재하므로 감시나 통제가 한반도내 중 제일 엄중하여 무얼 공개적으로 한다든지 왕성하게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감리교회의 선교본부는 서울에 소재하여 왜제의 집중 감시를 받았으며, 최고 행정 지도자인 감독이 주재하였고 임기가 4년이나 되어, 총회장 임기가 1년이고 지역도 평양인지라 감시체제에서 훨씬 벗어나 있었던 장로교회와는 전혀 달랐다.

장로교회 총회장은 피선된 후 어찌어찌 우물쭈물 대다보면 임기가 끝나갔다. 그냥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버티면 되었다. 감리교회하고는 상황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4년은 우물쭈물하면 지나가는 기간이 아니다.

서울지역의 감리교회의 민족운동 단체는 공개든 비공개든 신간회, 근우회 이후 거의 소멸되었고, 호칭이나마 지키며 미약하게나마 민족운동에 동참하던 단체가 감리교회 여선교회, 남선교회, 청년회, 절제회, YMCA,, YWCA 정도였다. - 서울에서 멀거나 왜제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지역일수록 민족운동이 공개적이든 미공개적이든 훨씬 왕성하게 일어났음은 자명하다.
그만큼 어려웠다.

2) 감리교회의 동부연회인 강원지역을 살펴보자. 참으로 특이한 민족운동 양상이 나타난다. 상하이 임정의 연통제 조직인 철원애국단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철원애국단은 비단 철원지역만의 미공개 비합법 애국단체는 아니며 감리교회 강원도지역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독립운동단체였다.

또한, 1933년 봄 춘천여자관에서 밀담을 통해 십자가당을 조직한다. 이는 남궁억 장로(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자), 아들인 남궁염, 딸인 남궁경숙과 목회자인 남천우, 유자훈 등 제인들로 조직되었던바 기독교인중 감리교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왜제의 침략기에서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는 강원도지역이 상대적으로 감시가 훨씬 덜했단 뜻이며 제대로 감시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3)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지역인 만주를 보자.

1유형인 국내는 식민지국의 상태(여기도 앞서 기술한바와 같이 감시상태가 서울과 지방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이고, 특별히 대만도 직접 지배하는 식민국의 형태였으나 대만인은 왜제에 대항하여 항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순응하는 모습을 취하여 특별한 감시니 억압이니 하는 것이 없었으며, 2유형인 만주는 독자적으로 왜제의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고로 청국 마지막 황제 부이를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
동남아 제국들을 점령하고는 통치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고 군사적으로만 점령 상태이니 점령국이어서 실제적인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의 3유형 그리고 4째 유형인 미국이라는 자신들의 잠정적 적국이 있다.

여기에서 송득후 목사가 시무했던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의 위상이나 자리를 본다. 국내의 서울과 지방은 상태에 따라 국내에 생존하는 대한인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매국이 아니더라도 위장이든 아니든 항복/굴종/부역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한인은 없었으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강제신사참배는 지옥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태를 극복해내지 못한 지도자들의 한계는 있었지만, 몽양 여운형과 같이 위장굴복의 자세를 취하면서 실질적 광복/승전을 준비했던 지도자들도 있었다. 이와는 달리 정춘수는 매국혁신교단체제를 초기엔 물론 강요에 의해 택한 입장에서 자신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투옥된 교회의 목회자나 평신도들의 유가족을 원호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유명한 변절자 죄옹 윤치호가 투옥자 원호/석방을 위해 무던히 애를 썻었던 것과 대비된다. 한편, 기분 나쁜 부역자/변절자인 기독교 여성계의 김활란처럼 이화학생들의 강제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노골적으로 부역자의 길을 공개적으로 걸었던 경우도 있다.
김활란은 훨씬 더 나쁜 노천명 등과는 질이 다른 부역자이며, 김활란은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서 지역마다 다니며 강사를 하여서 타인의 눈에 띄게 부역이 드러나 있던 측면이 있어 더 많은 친일을 한 것처럼 보이고, 하여, 처음부터 지금까지 무훈상태이고, 동아일보/보성전문 김성수는 김활란과 같은 친왜매국단체의 대표와 격이 같은 감사를 역임했음에도 대중들에게 드러나는 활동을 하지 않아 한 때는 건국훈장 2등급 대통령장에 추서되어 친왜행적이 발굴되어 서훈이 박탈되기까지 수 십 년이 걸린 것에서 국내에 있던 지도자들의 곤혹스런 처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바가 아니다.

만주는 청국, 러시아, 몽골, 왜, 조선인들, 공산주의,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비적, 마적, 정규군, 비정규군 등 각 인종과 나라/민족/이념들이 뒤엉켜 누가 누군지도 구분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상태가 많았다. 하여, 상황을 오해/오판하여, 같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대적하여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대와 전투를 벌이는 일들도 다반사로 일어났었다. 왜는 밀정을 파견하고 상대를 이간하고 매수하여 싸우게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한 후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를 보아야 한다. 제일 중요한 의제는 감리교인 4,500여 명, 감리교회-장로교회-성결교회-동아기독교회 등 45,000여 명의 보호와 생존이 최우선 당면과제였다. 송목사는 이러한 상황의 만주선교 최고 현안인 동포애호에 복종한 것이지 정춘수의 매국혁신교단체제에 순응한 행위가 아니었다.

4) 미국을 보자. 미주의 동포사회는 1902년부터 하와이 노동이민 7,200여 명과 본토로의 이주,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의 애니깽 농장이주, 쿠바로의 이주와 혁명 참여 등 북중미로의 진출이 있었는데 특히, 미국 본토로의 이주가 두드러졌다. 미국의 주요도시 즉, 샌프란시스코, 덴버, 필라델피아, 시카고 등이 대한인들이 주요하게 진출했었던 곳이었다.

미국은 대통령제 민주공화정 국가이며 국회도 있는 3권분립의 민주국가였으며, 독립국가체제가 늦게 이루어짐과 북남전쟁으로 인해 식민지국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측면이 있어 겨우 먹는다는 것이 필리핀 정도였고 그나마 일본과의 밀약으로 조선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파기까지 하며 겨우 하나 얻은 것이 식민지 필리핀이었다. 어째든, 대한인들은 어느 곳보다 미주에서 훨씬 활동하기가 수월했다.

미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것은 왜의 감시/탄압과 박해로부터 자유로웠던 측면이 강하며, 일본의 위압적 박해와 탄압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하여, 미주 동포들의 독립운동 영역은 최소한 목숨이 위태로운 독립운동이나 활동은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되고, 또한, 거개가 자신들의 일이나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조직적으로 모금하여(애국공채 등 발행)상하이 임정과 김구의 한인애국단이라는 특공 무공단체에 2,000달러 기부(모금책 안창호 목사-충청지역 활동, 건국포장 추서자)하여 이봉창(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자), 매헌 윤봉길(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자) 의거에 그 재정이 쓰임으로 세상에 이렇게 돈이 귀하게 쓰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크나 큰 기쁨과 환희를 선사했고, 4억의 중국인들에게도 감동을 주어 장제스(장개석) 총통(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자)은 한국인들을 황포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무반을 설치케 했고,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송미령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자)은 우리의 광복활동 지원자금으로 20만 달러를 지원했다 한다.

중국인의 광복지원활동의 특징 : 사실상 중국인들의 우리민족 독립운동 지원활동은 자신들도 왜에 의해 침략을 받고 있던 상태였기에 미국인을 비롯한 서구인들의 우리민족 지원활동과는 그 격이 다르며 낮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로,

18,000여 명의 독립유공자중 외국인은 56명이라는데 그중 중국인이 45명*이고 일본인 1명, 영국인 3명 베델, 스코필드, 쇼우, 캐나다인 그리어슨, 에비슨 2명을 제외하면 미국인은 5명이고 그중 구타펠이란 미 감리교회 여선교사를 제외하면 남성은 4명 헐버트 선교사, 모우리 선교사, 맥큔 선교사, 매켄지 등으로 아주 미약한 숫자(전체 개신교 선교사 약 4,000여 명)가 독립유공자의 반열에 있음을 알 수 있어 중국인들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의 성격 같은 것에 대한 연구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졌나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1등급 대한민국장 추서자 31명중 5명이 중국인인데, 손문, 장개석, 송미령 등은 얼추 그 공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여전히 100%는 아님) 진과부, 진기미는 이해가 안간다. 특히, 진기미는 도대체 무슨 공적이 있다고 1등급인 대한민국장인지 이해할 길이 없다.

* 중국인이 45명 : 중국인이라 하지만 사실상은 자유중국이라 불리던 대만인들이다. 박정희정권시절 정권과의 관계 때문에 자유대만인에 대한 훈장 추서가 대규모로 또한 등급이 높게 추서된 것으로 본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선 우리민족 성원중 유일하게 이회영 권사(선생)에게 혁명열사증을 추서했다 한다. 우리 정부는 물론 공산당 계열의 항일운동가에게 독립유공자 포상을 한 경우가 없는 것으로 안다.
굳이 평가하여, 장제스의 황포군관학교 한인 특무반(대한인 100여 명 입학해 군관교육 받았다 전한다) 설치의 공로가 다대한 공헌이라면 신흥무관학교, 한미항공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울라칸(운남관)무관학교 등을 설립하고 독립군 장교들을 양성한 설립한 설립자나 교관들도 그에 합당한 훈격으로 추서하여 예우해야 마땅하다 여기고, 장제스의 그러한 판단/결정은 우리의 청년들을 자신들의 자유를 위한 전사 양성의 한 통로로 이해하고 그러한 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쑹메이링의 광복군 자금지원도 광복군을 정예 항일전사로 양성하여 자신들을 위하여도 싸우는 세력으로 양성코자 했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고맙긴 하다. 그러나, 그 공적을 너무 과대포장 평가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미, 영, 캐 등의 여/남 선교사들은 선교라는 자신들의 이유가 있었으나 본국 정부 당국의 방해와 정교분리 권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대한인에게 우호적이었으며, 그것은 특별히 식민지배국이라는 왜국이 신도국가이며 불교대국이라는 측면이 강해 왜적들이 서구의 기독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펼침으로 대한우호민족주의 선교정책이 활성화되었었다. 이는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의 각 제국들에 전파된 모든 기독교가 예외 없이 본국의 식민지정책의 전파자요 침탈자/첨병라는 사실을 볼 때, 세계 식민지 지배 역사상 기독교가 식민지 침략정책의 도구로 활용되지 아니한 세계적으로 유일한 예가 대한민국에 전파된 개신교임을 인지해야 한다. 특히, 감리교회가 그러하다.
미주 등 서구 등에도 한국인 친일파가 있었을까? 물론, 미국인 중에는 스티븐스라는 작자가 있어 장인환-전명운의사에 의해 처단되었으며, 미 국무성의 관료들 중 상당한 수가 자신들의 국익과 관련해 친일에 가까운 인사들이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대한인중 독립운동에 기꺼이 참여하지 않거나 소극적인 인사들은 보았어도 일본이 너무 좋거나 무어라도 얻어먹을 것이 있어 친일행위를 하였다는 미주 동포는 없었다. 이유가 무었일까?를 살펴야 한다. 감시도 없고 신경쓸 일이 없으니 자유로이 애국사상을 펼 수 있어 애국활동을 한 것이다.

이 모두 일본의 감시나 박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단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국내의 서울과 지방 그리고 만주국, 기타 동남아 등지의 점령지 그리고 미국 등을 비교하여 살펴보아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장이란 직책을 근거로 송목사의 행적을 친일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 * 일본에 유학을 하였다하여 친일파가 아니다. 미주에 있었다하여 다 애국자도 아니다. 대한인은 어디에 있든 기본이 몇 안 되는 애초의 매국노, 독립운동하다가 고문 등에 의해 변절과 어떤 상황에서의 부역은 있었을지언정 처음부터 매국과 변절의 길을 걸은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3. 만주기독교연맹의 부회장 직책을 맡은 것에 대하여

조직의 구성이 감리교회-장로교회-성결교회-동아기독교교회 등이며, 먼저 직임자들을 보면 회장이 장로교회 정상인 목사, 부회장 감리교회 송득후 목사, 총무국장 장로교회 문재린 목사, 교무국장 감리교회 도인권 목사, 교육국장 감리교회 변성옥 목사 등이다. 위에 열거된 모든 조직의 구성원들이 독립유공자는 아니나 독립운동가이며, 이중 도인권 목사는 안악사건, 상해 임정 요인과 독립군 교관을 역임하였고 중국 동흥진교회를 담임하다가 광복/승전 후 제주도로 동포들을 안전/이주시키고 제주에 수 개의 교회를 설립한 독립유공자 포상자이며, 민족주의 농촌지도자 양성기관인 목원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이 조직은 보통 왜제가 만주의 기독교를 통제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하나 어느 누구 하나 그러한 의도에 말려들어 활동한 이력의 소유자가 1명도 없다. 구성과 성격이 이렇기도 하지만 그 넓디 넓은 만주에서 개별교회를 돌보기도 사실상 어렵고 연통도 쉽지 않은 만주의 정치/군사 정세상 특별한 연합활동 즉, 왜제의 의도에 따른 활동은 발견되지 않으며, 광복/승전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도인권 목사가 이러한 이유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는데에 아무런 제약 요소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4. 3.1혁명 공적과 평양 박구리교회 그리고 수원종로교회 등 시무에 대해

1918년 집사목사 안수를 받은 송목사는 1919년 평양 박구리교회 시무중 3.1혁명을 맞이했다. 송목사는 29세의 청년목사였다. 평양지역의 감리교회 혁명의 최고지도자는 민족대표 신홍식 목사(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자)였고, 현장의 최고지도자는 김찬흥 목사(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자)였으며, 현장지휘자는 남산현교회의 박석훈 부목사(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자, 옥중 순교/순국-순국 3일 전 고문에 의한 빈사상태로 석방되었으니 옥중순국이나 마찬가지이다)이며, 여선교회, 여성청년, 여성학생, 여성노인 등이 다 독립을 선언하는 자리에 나섰으니 남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혁명으로 평양지역 감리교회 선교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목회자, 학교교사, 교회교사, 학생, 유치원보모 등 거의 전부 다 피체되어 감옥에 있으니 감리교회의 평양지역 담당 선교사는 이번 지방회는 감옥에서 열어야 하나라는 탄식을 하였다.

송목사는 독립선언자들과 피체되었다. 평양지방법원 1, 2심에서 형을 받아 상고했으나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 때 송목사와 같은 지역으로 피체/투옥되어 옥고를 치른 이들의 간략한 명단이다.
김찬흥(46세, 북향리교회 목사), 주기원(37세, 채관리교회 목사), 박석훈(36세 남산현 교회 부목사), 홍원변사(45세, 남산현교회 전도사), 한국보(30세, 채관리교회 전도사), 안영극(37세, 리향리교회 전도사). 장도성(19세, 사랍학교 학생), 조창일(36세, 리향리교회 권사), 서기풍(37세, 채관리교회 권사). 이영순(45세, 태천교회 목사), 김홍식(38세, 남산정교회 목사), 박현숙(24세, 남산현교회 여집사-해방후 대한민국 국회의원), 김연실(21세, 유치원 여교사), 채애요라(사립학교 여교사) 등이다.

한편, 송목사는 출옥 후 이북지역인 서부연회의 평북 용강 삼화교회 시무했고, 이 때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후에 1922~1927년엔 수원종로교회로 파송되었다. 이 일의 위상이 무엇인가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수원종로교회는 경기도의 수부도시인 수원에 소재할 뿐 아니라, 처음 교회로 1902년 설립되었으며, 정조대왕의 유훈이 깃든 곳이라 대한인들 특히, 수원인의 자부심 또한 유난한 곳이다. 이곳에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이후 감리교회의 실질적 최고지도자인 노블이 이 중요교회에 송목사를 수원종로교회로 파송한 것인데, 이 때는 감옥에서 출옥한 바로 후였으니, 노블의 송목사에 대한 신뢰와 노블의 우리민족 사랑을 알 수 있다. 송목사는 이 교회에서 홍승하 목사와 일하던 류홍준 목사와 협력하여 목회를 하였다.
1922년부터 송목사는 수원종로교회 재임 시 국내 선교중에선 최고의 업적을 남겼다.
1) 1913년 40평으로 건축된 교회가 너무 비좁아 교회를 교인들이 벽돌을 모으는 헌신으로 증축하였다.
2) 교회 증축과 더불어 밀러 선교사의 지원으로 20칸 규모의 기숙사를 건축하였다. 또한, 화재로 전소된 교회 소유 상점에 30칸 규모의 함석재 건물을 지어 세를 받아 교회의 건축비를 감당하였다. 이 기숙사는 수원지방회의 사경회 때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당시의 사경회는 수원 인근지역 곧, 화성, 오산, 용인, 안산, 시흥 등지에서 거의 1주일간 진행되는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솥단지와 먹을거리 그리고 이불채까지 다 가져와 숙식을 하며 하는 사경회였다. 이를 통해 교인들의 민족주의 신앙은 깊어졌고 민도는 그에 따라 급격히 상승했다. 문자와 언어 생활은 점 점 더 일치해가므로 민지의 계발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이것은 단순한 교회증축과 기숙사 건립이 아니었고 민족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드는것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3) 1924년(혹은 1926년)에는 유치원을 설립 운영했다. 원장은 김병호(독립유공자 포상자) 삼일남학교 교장이 했다. 1913년 유치원 교사 양성이 시작된 이래 1924년이면 경기도의 수부도시로서는 늦었지만 지역사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28년부터 원주읍교회(원주제일교회)에 부임하여 1) 원주지방 부인대사경회에서 많은 은혜를 끼쳤고 2) 원주지방 엡웟청년회 회장에 피선되어 문맹퇴치냐? 산업장려냐? 하는 의제로 토론회를 열기도 했으며 3) “농무회”를 조직해 회장은 신홍식 목사, 총무는 송득후 목사가 맡았다. 4) 원주부인야학(61명)과 영어야학(48명)을 설립운영하였으며 나애시덕 선교사가 강의할 시는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1919년생)가 학생시절 학습을 받았다 전한다.

또한, 원주지방 역사편집위원으로 구성서(최초 순국선열 목회자 구연영의 아들이자 구정서의 동생 목사), 정영헌, 류병만 등과 함께 했다.

1929년부터 강경읍교회(강경제일교회)에 부임하여 논산읍교회도 함께 돌보았다.

1934년부터 홍성읍교회(홍성제일교회)에 부임하여 전도부인 한도숙과 함께 하였다.

* 3.1혁명 선언서는 말 그대로 선언서였다. 독립을 쟁취하자거나 독립시켜 달라고 청원하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침략은 너희들 맘대로 한 것이며, 우리는 인정한 적이 없으니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이었다”

5. 만주의 정세 : 국내는 거의 왜적들만 조심하고 상대하면 되는 반면 만주의 정세는 그렇지 않았다. 만주는 각 정체불명의 무장 비적인지 마적인지 정규군인지 비정규군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각 무장세력들이 종횡부진 활동하는 무법지대 같았다. 이러한 조건이 바로 송목사가 처해있던 상황이었다.


6. 왜의 항상적 의도 : 왜제의 무력침략은 항상적으로 대한인에 대한 정신적 탄압과 고문, 육체적 고난을 수반했다. 조선총독이라 호칭되던 미나미란 자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인 황국신민화정책의 주요 골간인 강제신사참배, 강제창씨개명, 강제학도병, 강제징용, 강제공출, 공갈위안부 모집으로 인한 강제위안부화 등이 그것이다. 왜의 두목 천황이라 불리는 소화는 ‘조선사 편수회’를 조직하게 하고, ‘금서룡’을 시켜 조선인 ‘이병도’를 동원하여 왜곡된 조선사와 임나부일본설을 퍼트리며 대한인에 대한의 역사 왜곡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정통역사서들은 강제수거하여 불태워졌다. 이런 정도의 분서갱유는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는 사실상 큰 문제인데, 큰 문제도 되지않았다.

7. 왜의 기본 종교정책 : 왜제의 미국과 기독교에 대한 전략의 기본은 항상 언제나 이간책과 분열책이었는데, 조선인이 무엇이 부족하여 서양인들의 선교부에서 놀아나느냐? 독립적으로 자립적으로 종교활동*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늘 유혹하여 되도 않는 얼치기 저급한 민족주의를 부채질했다. 이에 만주의 7개 교회가 감리교회에서 이탈하여 독립교단을 형성하여 민족단일 종교전선에 약간의 파열구가 나기도 하였었다. 허나, 큰 영향력으로 다가오진 않았고 곧 정리되었다. 이는 그냥 정통 감리교회나 장로교회의 정통성 안에 있는 것이 오히려 친일과 관련이 없다는 설명이다(* 우찌무라 간조에게서 무교회주의를 전수받은 김교신 등의 선교사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자립적 신앙생활이라는 유형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김교신(건국포장 추서자) 등은 민족신앙적 자세를 늘 유지하였으며, 그 증거로 ”성서조선“의 발행과 류달영(건국포장 추서자)을 통한 ”최용신소전“의 발간으로 나타난다).


8.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실체와 위상

한국에서의 미 북.남 감리교회 선교 중 제일 중요한 업적이 미 북.남 감리교회의 합동이다. 미 선교사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종교적 기득권, 우월성에 도취되지 않았으며, 대한인에 대한 신뢰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인류사의 대사건인 것이다. “내가 최고지도자인데 앞으론 여러분들이 최고지도자를 하시오”가 미 북.남 감리교회의 합동인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실체이며 위상이다.

여기에 송목사가 1927년 미 (북)감리회 대한인 대표로 신홍식, 김찬흥 목사 등과 함께 미 남감리회와의 통합을 위한 연합위원회에서 활약했고, 1930년 미 북.남 감리교회 합동 총회시 신홍식, 현석칠 목사와 함께 미 (북)감리회 대한인 교역자 20인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 한 때는 하나의 감리교회였던 미 감리회는 미국에서 일어난 북남 또는 남북전쟁으로 미 감리회와 남감리회로 분열되었었다가 대한에서 미 북.남 감리교회가 1930년 합동된 이후 미국 본토의 북남 감리교회는 한참 지나서야 다시 통합이 되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미 본토에서의 전쟁에 대한 앙금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만큼 대한에서의 미 북.남 감리교회의 합동의 의미는 민족사적으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

* 미 북.남 감리교회가 선교를 시작한지 45년여가 지나 합동을 하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본디는 1885년과 1895년으로 북.남감리교회가 10년차로 전래된 이후 북.남감리교회는 미 본국에서와 같이 대결하는 사이가 아니라, 모든 일에 협력하는 관계였다.

북감리교회는 남감리교회에게
1) 한국은행 자리 선교지 알선 2) 김흥순 백헬렌 등 북감리교회가 양성한 유망한 전도인 보내주기 3) 개성, 해주와 강원도 전역을 선교구역으로 교회와 병원 시설 등을 무상으로 양도하기 4) 선교초기부터 한국인 사역자=성직자 양성 교육기관을 공동 운영하기 등을 하여 왔던바 합동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나, 1919년 후부터 합동의 필요성이 민족의 요구상 절실해지며 한국의 북.남 선교부는 북.남 감리교회의 합동을 강력히 요청하였던 바 본국의 선교부는 미 북.남전쟁의 앙금으로 거부 당하였었고, 이에 북.남 선교부는 합동진흥방침위원회를 1926년 설치하여 마침내 1930년에 합동을 이루었는데, 사실적 역량으로도 1910년경과 30년은 대한인들의 역량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선교초기는 한국인 전문 사역자들이 몇 인에 불과했고, 나이나 연륜도 부족한 상태에서 1920년대에서 1930년경에는 성직자들의 숫자(약 600여 명의 남녀 지도 그룹 형성)나 연륜들이 상당해져 합동하여 독자적 선교활동을 하는데에 이상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기독교조선감리회의 행정수장이 대한인으로 바뀌었고 목사 안수례 등을 스스로 행할 수 있었다.


9. 북만(北滿)이라는 호에 대해

‘북만’ 송목사는 1937~47년 국내나 만주기나 제일 엄혹한 시기에 북만주에 있었고 거기에 유랑하는 동포들을 섬기기 위해 헌신했다. 하여, 이 때의 호를 북만이라 했다. 그들과 내가 함께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호에 나타내었다. 이는 도산 안창호가 외로운 섬 독도를 호로 지은 것과 해석 손정도 목사가 바다의 돌이라 독도를 상징하는 호로 지은 것과 비견되는 간절하고 애틋한 동포사랑의 예이다. 그냥 동네 이름을 호로 지은 것이 아니다. 대한의 선진적 인사들은 국제정세나 왜제의 의도같은 것을 어느 정도 다 꿰고 있었기에 호도 그에 걸맞게 지었음이 확인된다.

10. 캐나다 선교부에 대한 약간의 언급

송목사는 1937년 북만주에 가서 처음 하얼빈교회를 5년간 담임했다. 후엔 용정에서 5년간 동산교회를 담임도 했다. 당시 용정은 대한의 독립과 한반도의 대한인들의 새삷을 바라는 이들의 집결처였다. 또한, 서양선교사들 특히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의 광범위한 활동이 있던 곳이었다. 그곳에선 캐나다 선교부의 탁월한 선교사 그리어슨(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자)이 일했다. 중등교육기관만 해도 은진중학, 대성중학, 동흥중학, 영신중학, 명신여학교, 광명여학교 등을 통해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으며, 일본영사관, 영국해관, 캐나다 선교부, 중국관청 등 관청과 국제기관들이 있던 국제도시였다. 여기가 전덕기 목사 파송 상동청년학원 출신 정재면 목사(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자), 간통령 김약연 목사(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자), 문재린 목사, 김신묵 여사, 윤동주 시인(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자), 문익환 목사 등 수 많은 민족신앙지사들의 집합소였다. 당시 송목사가 시무했던 동산교회에서는 윤동주, 강원룡, 문익환, 문동환 등이 청년 회원으로 활동했다.


11. 광복/승전 후의 행위 진위

광복/승전이 거의 다가온 시기와 후에 중국에 있던 송목사는 바로 조국으로 향하지 않았다. 송목사는 2년이나 더 머물며 만주지역 공산군의 박해 속에서도 동포들을 원호하였다. 이것으로 송목사의 만주신학교 교장이나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의 교구장 직임의 마음속의 본질이 파악된다.


12. 친북행위 무

광복/승전후 대한민국으로 온 목사는 1947~49년까지 충청 논산읍교회, 1949년 대전제일교회, 공산치하의 개성동문교회에서 6.25전쟁시 남하하지 않고 양떼들을 지키려 5개의 교회 목사들과 남아있었고, 1950년 공산당의 지휘관이 용정에서의 제자였던 관계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가 1950. 10. 4 국군과 유엔군의 개성탈환으로 극적으로 개성을 탈출하여 제주도로 이주하였다. 이를 통해서도 역시 송목사의 성직에의 충심과 인간애와 동포애를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은퇴하고 원로목사이면서도 약간의 목회 활동을 강경 베다니교회에서 하고 인천 주안의 원로 안식관에 머물다 아내와 사별 후 장녀와 삼남이 있는 미주로 이주하여 오렌지카운티제일교회를 자녀들과 섬기다가 1985. 8. 25 95세를 일기로 하늘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시 올 준비를 부활을 통해 하고 계실 것이다. 송목사는 빛에서 살다가 빛으로 이 땅에 와 빛으로 살다가 다시 온 곳으로 빛이 되어가셨다.


이로써 친일행적 부분에 대한 해명과 친북행적이 없음을 증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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