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9:26-30(설교: 바울을 위한 바나바의 매개)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 18
- 2025-07-23 09:39:39
예루살렘을 떠난 지 최소한 3년이 지난 후에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사귀려고 했으나, 극렬한 핍박자였던 그를 아는 사도들은 그가 회개하고 복음 전도자가 된 사실을 믿지 않고 두려워하였다.
그런 사도들에게 사울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며 소개한 바나바에 대해, 누가는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라고 하였다.
바나바(Βαρνάβας: 4:36의 주석을 보라.)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사울의 변화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은 9:3-6의 주석과 15-16의 주석을 보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은 9:20-22의 주석을 보라.
담대히 말하던(에파르레시아사토, ἐπαησιάσατο)은 2:29의 주석을 보라.
바나바의 중개 역할의 성공적인 결과에 대해, 누가는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라고 하였다.
사울과 사도들은 친밀한 사이가 되어서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출입하였다. 이 기간은 15 일간이었다(갈 1:18).① 이 기간에 사울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그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극렬하게 핍박했던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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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의 갈라디아서 1:1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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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과 결과에 대해, 누가는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이라고 하였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헬라파 유대인들(6:1의 주석을 보라.)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의 변론하니는 쉬네제테이(συνεζήτει)이며 ‘토론하다’, ‘논쟁하다’ 등을 의미한다.
사울과 헬라파 유대인들의 변론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9:22의 주석을 보라). 변론으로는 사울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대신에 사울을 죽이려고 힘썼다(9:23의 주석을 보라).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인들 역시 다메섹의 헬라파 유대인들처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좋은 기회를 살인할 기회로 바꾸어 버렸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힘쓰는 것을 안 믿음의 형제들이 대처해 준 일에 대해, 누가는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라고 하였다.
가이사랴는 가이사랴 빌립보가 아닌 다른 가이사랴이다(8:40의 주석을 보라).
다소는 9:11의 주석을 보라.
가이사랴에서 다소에 이르는 육로와 해로가 있는데, 사울이 어느 쪽을 택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가 고향인 다소로 간 것은 단순히 핍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었다(행 22: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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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사도행전(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305-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