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을 위한 바나바의 매개
최세창
- 16
- 2025-07-23 09:37:15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1. 시작하는 말
기적의 치유와 축귀의 안수기도 능력은 없지만, 안수기도를 받게끔 매개 역할을 해서 고침을 받게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처리할 일이 있을 때에, 처리할 힘이 없다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때에, 도울 힘이 없다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때에, 사랑할 것이 없다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의 포기를 당연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우리는, 그런 경우라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처리되도록 매개 역할을 해야 하고, 도움이 되도록 매개 역할을 해야 하고, 사랑이 되도록 매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처리가 되거나, 도움을 받거나, 사랑을 받는 결과라는 점에서는 직접 하거나 매개 역할을 하거나 다를 게 없습니다.
2.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를 매개한 바나바
유대교 지도자이었던 사울 곧 바울은 교인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대제사장에게서 공문을 받아 들고, 멀리 다메섹에 사는 교인들을 체포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체험을 통해 깨달았고, 주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결단력이 대단한 사람답게 교인들을 체포하려고 했던 바로 그 다메섹에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광주리를 타고 도피하기도 했습니다.
그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을 떠난 지 3년 후에,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비롯한 교인들과 사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를 극렬한 핍박자로 알고 있는 사도들과 교인들은, 그가 회개하고 복음 전도자가 된 사실을 믿지 않고 두려워했습니다. 그 정도로 바울 사도는, 한동안 교인들에게는 악명 높은 핍박자인 유대교 지도자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와 주 예수님의 직제자들과의 만남은,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선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헬라 사상에도 정통한 율법 대가로서 교회를 핍박하던 유대교 지도자이었다가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된 바울과 주 예수님에게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동고동락한 직제자들과의 만남은 매우 절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회개와 사도됨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 안타까운 상황을 타개하는 매개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바나바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 사도를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바울 사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놀랍게도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과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또한, 다메섹에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한 경이로운 일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요는, 핍박자가 사도가 된 것은, 부활의 주 예수님의 주도적인 사랑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아무리 극렬한 핍박자라도 사랑하시고, 회개하고 당신을 믿기만 하면 구원하여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좇아 하나님을 믿거나, 하나님의 성육이신 주 예수님을 믿으면, 지옥으로 끄는 죄의 사함과 자유와 평화와 성결한 삶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1:16에,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바울 사도와 열두 사도가 사귈 수 있도록 매개한 중차대한 역할을 한 바나바(Βαρνάβας)의 본명은 요셉인데, 권면과 위로를 하도 잘해서 사도들이 권위자(勸慰者)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바나바는 초대 교회가 공동생활을 할 때, 밭을 판 돈을 사도들 앞에 바치기도 했습니다. 성품은 착했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전도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선지자, 교사, 사도로 불렸고, 바울 사도의 친구이었습니다. 바울 사도와 직제자인 열두 사도를 교제하게 한 중차대한 매개 역할 외에도, 바울 사도를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함께 복음을 가르쳤고, 바울 사도와 함께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기도 했습니다.
사도인 바울과 바나바는 첫 번째 선교 여행에, 같이 구브로로 다녀 남쪽 소아시아까지 진출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얼마 동안 쉰 뒤에,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할례나 율법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문제로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결국 복음의 진리가 공인되었습니다.
두 번째 선교 여행을 함께 떠나려 할 때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나바는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을 고집하였고, 바울 사도는 마가가 첫 번 선교 여행 도중에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서 돌아가 버렸던 사실을 들어 반대하는 바람에 서로 심히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그 결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 사도는 실라를 택해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인 바울과 바나바의 한때의 다툼을 계기로, 보다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을 선교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능력 있는 두 사도를 같은 지역 선교를 위해 묶어 보내는 대신에, 각자에게 조수를 붙여 각각 다른 지역 선교를 하게 하신 겁니다. 물론, 다툼이 잘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의 소지가 된 마가는, 바나바의 신념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후에, 마가는 마가복음을 쓰는 등의 큰 활약을 하였고, 바울 사도의 신임을 회복했습니다.
아무튼, 권위자 곧 권면과 위로의 대가답게 바나바의 매개 역할은 대성공을 했습니다. 사울 곧 바울 사도가 주 예수님의 직제자들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출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15일간에, 바울 사도는 교인들에 대한 박해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그 자신이 교인들을 극렬하게 핍박했던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헬라파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를 갈았겠습니까? 메시아 사칭 죄인으로 여겨 사형시킨 예수의 추종자들을 핍박했던 바울이, 예수를 구주라고 전파하니 얼마나 부아가 치밀었겠습니까? 게다가 헬라 사상과 히브리 사상에 능통하고, 성령 충만한 바울 사도와 변론해 보니 상대도 안 됐습니다. 이래저래 죽이려고 힘썼습니다. 실은, 이래저래 죽이려고 힘쓸 상황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을 상황이 아닙니까?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웨슬리(John Wesley)의 일기에, 제임스 로버츠(James Roberts)가 회개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인트 라이브즈 감리회 지도자이었던 로버츠는 이내 자신의 옛 죄와 술에 빠져 2년 동안 방탕하게 살고 있었고, 그 기간에 ‘설교하는 집’을 허물어뜨리는 폭도를 지휘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래지 않아서, 로버츠가 동료와 함께 에드워드 메이(Edward May)네 가게에 서 있을 때, 마침 그 설교자가 지나갔습니다. 로버츠의 동료가, ‘내가 그에게 감리교인이라고 말하겠네.’라고 했습니다. 에드워드 메이는, ‘안 됩니다. 당신 자신을 배반하는 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로버츠는 그 말이 비수처럼 찌르는 것을 느꼈고, ‘내 말 역시 나를 배반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급히 집으로 돌아갔는데, 마치 사단이 뒤를 따라오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40시간 동안 눈을 결코 감지 못했고,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어찌할 수가 없어서 창문으로 갔는데, 즉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 ‘네 불의에 대해 자비를 베풀 것이고, 네 죄들과 부정한 짓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히 8:12)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의 모든 짐은 벗어졌고, 그는 지금 수년 동안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인들 역시 다메섹의 헬라파 유대인들처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좋은 기회를 살인할 기회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똑똑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한, 하나님의 사자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를 죽이려고 힘쓰는 것을 안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 사도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
다소는 로마에 속한 길리기아의 수도이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뛰어난 지역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라는 긍지를 가질 정도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향인 다소로 간 것은, 핍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2:17 이하를 보면,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이라고 했습니다.
3.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죄와 불의와 핍박과 조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의 친구가 되고 있습니까? 기도와 말씀의 위로와 권면을 주고받는 친구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복음 선교가 순탄하게 진행될 때에도, 핍박이 극렬할 때에도 지켜보시고, 때를 따라 적합하게 역사하십니다. 신앙생활이 평탄할 때에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통하여 숨이 막힐 듯 답답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깊고 오묘한 사랑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도 주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고, 주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진리와 승리를 체험하고, 증인이요 매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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