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게 에서 추태(醜態)부리고 있는 이들에게.....

오재영
  • 2434
  • 2016-03-09 00:13:02
영혼을 교도하는 목회자이며, 한사람의 구도자요 성직자로서 다양한 사람들을 대할 때 마다 형편과 대상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감정이 있지만, 그때마다 정상적인 구도자라면 기준으로 삼아야하는 내용의 글이 있다. 급류(急流)에 휩쓸린 사람을 구하는 방법이다.

먼저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의 이야기,
“목사가 교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건강한 자기 자신이다.” 이 말을 확대 해석하여 적용한다면 온갖 부패 만연한 오늘의 시대에 유일하게 세상을 향하여 교회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그 선물은 무슨 거창한 미담거리를 양산하는 것이 아닌 교회자체의 건강함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건강할 때에야 비로써 교회가 세상을 건져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푸레드릭 부크너 라는 영성작가는 또 이런 예로 설명을 하였다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을 때 의협심이 강한사람은 어떻게든 물에 뛰어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건지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대개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죽는다.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구조하러 나섰다 해도 급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수영을 잘하거나 못하거나 구조에는 아무소용이 없다.

급류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방법은 달리 있다.
우선 물 밖에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모든 안전조치를 취해야한다.
한손으로 나무둥치를 잡고 있든지, 아니면 끈으로 허리를 묽어 단단한 곳에 고정해 두든지, 아무튼 자기만은 절대로 급류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한다. 물론 짧은 시간 안에 신속히 이모든 조치를 취해야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안전을 확보한 뒤에 손을 내밀거나 밧줄을 던지면 두 사람모두 살수가 있다....

의미 있는 예화가 아닌가?
이 말은 타인을 돌볼 수 있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안전하지 않음에도 다른 사람을 건져 낼 사람은 없다. 내가 안전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건져낼 수가 없기에 우선은 내가 튼튼히 서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부크너는 덧붙이기를, “남을 위하여 피를 흘리되 죽을 정도로 피를 흘리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 주변에 보면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하면서 자기부터 망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종국에는 둘 다 죽는 길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순간적이나마 대단하고 숭고해 보일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원죄의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라면 나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오늘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이러한 무모한 이들이 반복하여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유별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한마디로 가련하고 측은한 마음이 든다. 수시로 자신을 성찰하며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영혼을 교도하는 성직자로, 건강한 개인과 교회가 되기에 온힘을 쏟아야 할 시간에 만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단의 공적 게시판에 눌러 붙어있거나, 갑자기 등장하여 벌거벗은 모습으로 망나니의 칼춤을 추듯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험한 말 퍼부으면서 신앙을 빙자하여 객기 부리는 이들이 있다.

그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미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 온갖 시련을 안팎으로 겪었을 터인데도 여전히 변함없이 메마르고 황량한, 부엽토(腐葉土)한줌 없는 오로지 증오심만으로 뭉쳐있는 그 입으로 영혼을 살리는 말씀을 전할 수가 있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는가?
지금 설교라고 하는 내용들이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말씀으로 성령께서 동의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들을 하는가?

지금 병든 개(犬)에게 파리 달라붙듯이 온갖 구설수에 휘둘리고 있는 이에게도 연민의 마음이 있다.
누구든지 자신할 수가 없으나 등장하여 험한 내용 표현하는 이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언제부터 시작된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심이든 교활함으로 이용을 당했든 한때는 그들과의 교류가 있었던듯한데, 어디에 기댄 자신감이나 믿음이었는지는 모르나 오늘에 돌아보면 사람을 구별하지 못한점과 맡은직분에 대하여, 섬김의 대상이며 소속된 일부의 사람들에게소홀함은 인정해야할 것이다. 부디 초심으로 돌아가 겸비함으로 냉철하게 자신의 지나온 과정을 돌아보는 기회가 있기를 기도드리는 마음이다.

오늘 우리가 속한 교단의 비극은 올바른 리더십의 부재로 너나없이 섬기려는 자세보다는 이익을 따라 움직이며 군림하려는 자세의 문제다.
도대체가 언제까지 아군끼리 격에도 맞지 않는 총질들을 할 작정인가? 스티븐 옥포드는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이란 꿇은 무릎, 젖은 눈, 깨어진 심장에 있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그리살진 못해도 거룩함을 추구하는 까닭은 거룩함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며, 거룩함 자체가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삶이며 그 방향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이마다 예수를 닮았기 때문이다.

힌두교 신자였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썬다씽 이 한마을을 방문했을 때 문을 열어주러 나온 여종이 흥분해서 여주인에게 달려가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도대체가 예수를 말하고, 성경을빙자하여 먹고 사는 이들이 예수 닮은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어떠한 직분을 맡고,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인격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조직의 리더 라면, 비록 어려워도 리더로서 당하는 고난을 사명으로 알아야하며 대가를 지불하는 격에 맞는 섬기는 자세와 함께 고난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 섬기는 일이 힘들면 내려놓으면 된다.

사순절 기간 아침 Q.T.시간에 결론부분에 등장한 말씀이 마음에 다가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엎어지는 것이 우뚝 서는 길이고 살아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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