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개혁의 깃발을 내릴수 없다(2)

차흥도
  • 2644
  • 2016-10-08 19:14:07
1. 감리교개혁을 위해 조직화된 중심세력이 필요하다

이번 선거는 감리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거였다.
그동안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롭게 나갈 수 있는 선거였기 때문이다.
감리교사태를 겪은 후 전용재체제도 역시 소송에 시달렸다.
한번 물러선 이후 개혁특위를 구성하면서 힘차게 다시 출발하였지만 그래서 안정을 찾아 갔지만 역시 소송의 덫에 걸려 무너지고 말았다.

장정개정위원회의 구성에 있어서 위원장의 역할은 막강하다.
가히 감독회장에 비견 할만하다.
그러므로 위원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장개위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김모목사가 위원장이라는 이 중요한 자리에 들어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은 역시 소송 때문이었고 이것은 바로 감리교개혁의 실종으로 이어졌다.
결국 ‘감리교개혁’이라는 주제를 내건 ‘전용재호’은 이때부터 계속 흔들려 끝내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이 흔들리는 ‘전용재호’가 감리교개혁이라는 목표지점까지 무사히 갈수 있는 길은 없었는가?

배가 흔들렸다는 것은 선장이 흔들렸다는 말이다.
거친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선장이 중심을 잘 잡고 조타수 이하 선원들을 독려하며 나갈 수만 있다면 이 정도의 비바람은 능히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선장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이끌어 주기도 하고 때론 견제도 해야 하는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감리교개혁은 몇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감리호‘라는 커다란 배가 개혁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선장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구성원들의 뜻과 힘이 모아져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이 세력이 없었다.
이 배의 중심세력이 되고자 하는 일에 감리교 개혁그룹이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장도 흔들렸고 이를 잡아줄 중심세력이 형성되지 않은 고로 우리는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개혁특위의 실패는 감리교 역사에 있어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고 불행한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감리교개혁을 주도해 나갈 중심세력이 있어야 하며 이를 이끌어갈 지도구심이 필요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이번 선거에 뛰어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또 실패를 하였다.
우리의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2. 우리 안에 있는 패배주의를 넘어서야

우리 안에 있는 패배주의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팽배했다.
‘감리교개혁’이라는 아젠다엔 다들 동의하지만 그 실현방법에서 생각이 달랐다.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 들였다.
감리교개혁이라는 커다란 주제에 뜻을 같이 하였고 다만 그 실현방법이 다르므로 일단 서로의 영역에서 실천해 나가자는데 동의가 되었다.

이번 선거는 지독한 학연선거였다.
출발부터 불공정한 게임이었다.
선관위원장은 위원장을 맡기 이전부터 학연선거를 하기로 동의를 한 사람이었고, 학교설립 40년에 감독회장을 내자고 이 학교출신 전현직 감독들이 변칙적 추대행위를 하였고, 이를 공공연히 외치고 다녀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과정 속에서 행해진 여러 불법행위들이 신고되어도, 다 묵살되어도 어느 누구도 이래서는 안된다고 소리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들 학연선거를 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불법행위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정책이 아니라 학연에 의존한 선거를 기획하고 실천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런 작태에 힘 있게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였다.

누가 힘 있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는가?
누가 이 불공정한 게임을 공정한 게임으로 바꿀 수 있었는가?
누가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정상적인 운동장으로 만들 수 있었는가?
감리교회엔 이를 잡아줄, 시정시킬 사람도 세력도 없단 말인가?

기울어진 운동장을, 불공정한 게임을 시정시켜 공정하게 만들 사람은 바로 개혁세력이었다.
이들만이 이일을 할 수 있었다.
서로 개혁의 실현방법은 달랐어도 이일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여 이일은 어느 캠프의 일로만 전락되었고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3. 감리교회는 정화능력이 있는가?

사회법으로 나가면 안된다고 한다.
사회법으로 나가면 출교를 시키자고 까지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전제를 망각하고 있다.
전제는 우리 감리교회가 자정과 정화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교회가 이런 자정능력이 있다면 누가 사회법으로 나간단 말인가?
감리교회에 이런 정화능력이 있다면 어느 누가 사회법으로 송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만 가지고 뭐라 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며 어불성설이다.

스스로가 자정하지 않으면서, 스스로가 정화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있으라고만 한다.
이렇듯 자정능력이 없다면 사회법으로 나가야 한다.
스스로 정화하지 않으면 당연히 사회법으로 가야 한다.

감리교회에 좋은 전통이 있었다.
서로들 간에 분쟁과 다툼이 있었어도 ‘법이요’하면은 다들 물러섰다.
그런데 어느날 부턴가 이 좋은 전통이 무너졌다.
‘힘으로, 숫자로’ 밀어붙이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위원회의 숫자만 확보하면 다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감리교 사태가 일어났고, 우리 감리교회는 엄청난 수모와 창피를 당했다.
법으로 안되는 일을 ‘힘으로, 숫자로‘ 밀어붙이는 일이 사회법으론 통용이 되지 않아서 결국엔 장로교 장로가 우리 감리교회의 대표가 되지 않았던가?

이런 엄청난 수모와 창피를 당하고서도 감리교를 이끌어왔던 주류세력은 변하지 않았다.
이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단과 같았다.
법으로 안되는 줄 알면서도, 불법인줄 알면서도 서로 모른체 해줬다.
그러면서 사회법으로 나가면 안된다고 소리만 높였다.

송아지를 잃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치는 자는 미련한 자란다.
그런데 송아지를 잃고서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자를 뭐라 하는가?
우리는 외양간이 다 무너졌어도 이를 못본척 하는 참으로 무지한 집단 아닌가?

이렇듯 스스로가 정화하지 않고 울타리를 고치지 않는다면 외부의 힘을 빌어서라도 고치고 정화되어야 한다.
다시한번 창피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 하지 못한다면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한다.
또 다시 엄청난 수모를 받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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