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 속에 담긴 행복

관리자
  • 2121
  • 2016-11-08 17:31:06
1. 시작하는 말

누구나 다 행복을 원하고, 또한 행복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온갖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심지어 행복을 위해서라면 부도덕한 짓과 범죄까지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토록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행을 만나면 당하는 불행만큼 당황해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당황해 하고,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실상, 불행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닥친 불행보다 그 불행에 기겁을 하고 놀라서 과장한 불행이 훨씬 더 크고 심각한 경우가 많습니다. 손가방 속의 돈을 잃어버리고는, 마치 전 재산을 잃어버린 것처럼 고통스러워해서는 절대로 불행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불행을 극복하고 복을 누리는 길은 찾아온 불행을 불행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불행 속에 담긴 행복을 붙잡는 것입니다.

2. 불행한 중풍병자의 행복

죄로 영혼이 병들고, 팔다리는 물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늘 침상에 누워 지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소변을 받아 내 주어야만 하는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풍병자는 밤낮 눈물과 고통과 한숨으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병으로 인해 부모 형제가 슬픔과 비애와 탄식 속에 사는 것을 보면서 더욱 괴로워하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 중풍병자에게는 실연했다거나, 직장을 못 구한다거나, 돈벌이가 시원찮다가나, 부정축재 등의 고민과 불행은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불행한 중풍병자에게도 행복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냄새난다고 외면하는 중풍병자는 소중한 친구들을 가졌다는 점에서 매우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장 소중한 친구가 누굽니까? 주 예수님께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진 친구보다 더 소중한 친구가 없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졌는가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하고 귀한 복은 얼마나 좋은 친구를 가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주 예수님의 능력을 확고히 믿었고, 따라서 사랑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불행 속에 담긴 행복을 발견하고 붙잡는 일입니다. 불행 속에서 작은 행복이나마 붙잡는 것이 불행을 극복하는 길이며, 그 작은 행복이나마 활용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이라도 몸을 들이밀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무리에게 예수님은 복음의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소문내고, 예수님의 복음을 소문내는 것은 인간의 문제와 불행을 해결하는 길이며, 영생의 복을 선물하는 길입니다. 교회와 신우회가 부흥하려면, 꿀보다 단 복음의 진리가 선포되고,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잘 나야 합니다. 이런 소문은 열심히 내면 낼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서 예수님이 복음을 말씀하신다는 소문을 들은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의 불쌍한 친구의 병을 고쳐 주실 분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고 침상 채로 데려왔습니다. 가장 좋은 친구란 영생의 주 예수님께 인도해 주는 친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가 나의 친구인가? 누가 나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나는 누구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가정 문제나 이성 문제, 직장 문제나 사업 문제, 종교 문제나 죄의 문제, 질병 문제나 악령 문제 등으로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며, 영생의 주님께 인도함으로써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환자를 예수님이 계신 집 앞까지 데려왔지만, 집 안팎의 무리 때문에 예수님께 데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혹은 말씀을 들으려고, 혹은 병 고침과 축귀의 은혜를 받으려고, 혹은 예수께 대한 시기로 책잡으려고 모여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데려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장벽이 있는데, 그 장벽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개인이나 가정 문제와 불행, 직장이나 사회 문제와 불행을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물쇠와 열쇠가 있는 것처럼,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답도 있고,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내게 열쇠가 없다고 해서 열쇠가 없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내게 해결 능력과 지혜가 없다고 해서 해결의 길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1999년 9월에 읽은 미국 주간지 ‘선’의 기사입니다.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사는 34세의 해리라는 건설 노동자는, 제한 속도 24㎞인 집 앞을 폭주하는 자동차들 때문에 동네가 항상 시끄럽고 교통사고의 위험에 놓인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고민 끝에 10대 시절에 속옷 패션모델이었던 아내를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촬영 솜씨가 프로급인 해리는 몸매가 잘 드러나게 한 반라의 아내 사진을 찍어 확대한 다음에 속도 제한 간판에 붙였습니다. 어느 남자가 봐도 감탄할 만한 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여백엔 ‘속도를 줄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멜라니’라고 아내의 이름까지 써넣었습니다.

이웃들은 놀리기도 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엄청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운전자들은 대부분 멀리서부터 차창 밖으로 목을 빼고 웬 미인인가 하며 감상하는 눈치였고, 폭주족들도 절세가인의 관능미를 간과할세라 급히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이마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아예 멈추고 차에서 내려 사진 속의 여인이 혹시 미혼이냐고 물었다가 심히 낙담하는 사내도 있었습니다.

해리는 문제만 해결한 게 아니라, 돈방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몸매에 반한 광고 회사와 사진가들로부터 모델 출연 요청 전화가 몰려오는 바람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고 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침상에 누운 환자를 데리고 인파 속을 헤치고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 확고했습니다. 그 믿음은 어떤 장벽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의 외벽에 붙은 층계를 이용해 평평한 지붕에 올라갔고, 구멍을 크게 뚫어 환자를 침상 채로 주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기상천외한 일이었지만, 주 예수님을 확실히 만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지붕은 수리하면 되지만, 친구의 병은 주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놓치면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한 친구들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믿음대로 성취시켜 주십니다. 난치병을 가지고 따라나선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동안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등의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공공연하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심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선적이며 지대한 관심은 인간의 육적이며 물질적인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요 죄 사함이요 영생 구원입니다. 병 고침이나 귀신 축출이나 물질적인 욕구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죄 사함과 영생 구원은 구주 예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 사함의 선언을 듣고, 속으로 하나님 한 분만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을 선언하니 참람하다고 하는 서기관들에게 도전하신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과 일어나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이야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죄 사함의 선언이 쉽고, 증거가 나타나는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려운 것은 의사들도 할 수 있는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멸망으로 끌고 가는 죄를 사함받았다고 하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영육의 구원자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고,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갔습니다. 그 기적의 광경을 본, 장벽이었던 사람들이 다 놀라 길을 비켜 주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이런 기적은 도무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 맺음말

불행하기 짝이 없는 중풍병자에게도 행복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의 친구들을 가졌다는 점에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난관과 장벽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를 주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주님은 영육의 치유는 물론, 메시아적 권위로 죄 사함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 각자나 가정, 직장이나 사업에 불행한 문제가 있습니까?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간구하십시오. 우리의 친구나 이웃이 불행을 겪고 있습니까?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인도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영생의 복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의 불행 속에 담긴 행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2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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