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V (고린도전서 15:25-29)

관리자
  • 2163
  • 2017-05-23 20:14:12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종말이 올 때까지 중보자로서 우주에 대한 통치를 포기하실 수 없는 이유와 종말이 온 다음에 통치권을 양도하실 이유(원문의 25절 첫 부분에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25】[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26】[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절은 시편 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를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바울 외에도 예수님과 사도들은 이 구절을 메시아와 메시아의 궁극적인 승리를 예언한 것으로 해석하였다(막 12 :35, 행 2:34-35. 참조: 히 1:3).
여기서는 [저]를 성부나 성자 어느 쪽으로 이해해도 의미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시편 101:1을 미루어 보아 성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의인법을 사용하여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라고 하였다. 이 표현은 아마 이사야 25:8과 호세아 13:14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죄의 결과요(롬 5:12, 17, 6:23) 사단의 영역(롬 5:21)인 죽음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 결정적인 힘이 상실되었는데, 결국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할 것이다. 따라서, 부활한 성도들은 다시 죽을 수가 없다(눅 20:36. 참조: 딤후 1:10, 계 20:14).
바울은 앞 구절의 이유(원문의 27절 첫 부분에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27】[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절 전반은 시편 8:6의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를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본래는 지상의 지배자인 인간에 관해서 언급한 것인데, 바울이 그 말씀을 기독론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즉, 모든 원수들과 사망에 대한 대표적 인간인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와 그 밖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우주적 주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엡 1:22, 히 2:8-9, 벧전 3:22).
[말씀하실 때](ὅταν εἴπῃ)는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통해 말씀하신 때로도, 하나님께서 미래에 만물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자 하시는 목적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실 때로도 이해될 수 있다. 핫지(C. Hodge)는 “아주 훌륭한 주석가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이 구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동사는 현재 시제가 아니라, 미래 완료 시제로 번역되어야 한다(참조: 15:24, 히 1:6).”라고 하였다.
바울의 취지는 만물을 사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신 하나님은 그 만물 중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당연한 말을 한 것은 성부께 대한 성자의 복종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28】[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24절과 병행된다”(C. Hodge). 즉, 메시아 왕국이 실현될 때에는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성부께 넘겨지고, [아들(1:9의 주석을 보라.) 자신도] 성부께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복종은 성자가 속성에 있어서 성부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직임 또는 역사(役事)에 있어서의 종속이다. 바레트(C. K. Barrett)는 “복종은 아들의 신적 덕성의 일부였고, 또 영원히 신적 덕성의 일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참조: 빌 2:6-, 갈 4:4).
성자가 성부께 복종하는 목적은, 성부께서 영원한 나라에서 만유 곧 모든 부활한 성도들과 모든 사물들 가운데 계셔서 통치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의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통치하실 것이다(눅 1:33, 계 22:3).

4. 부활 신앙과 생활의 관계<15:29-34>

앞(15:20-28)에서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된다는 것을 설명한 바울은, 여기서 갑자기 부활에 대한 논증으로 되돌아가 부활 신앙과 현실 생활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용은 15:19과 직결되고, 앞의 내용은 삽화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바울은 이 부분을,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로 시작하고 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οἱ βαπτιζόμενοι ὑπὲρ τών νεκρών)은 대단한 난해구로 수많은 해석이 있다. 로벋슨과 플루머(A.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Robetson and A. Plummer)에 의하면, 호슬리(J. W. Horsley)는 36가지의 해석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 중에 중요한 해석들로 (1) 휘페르(ὑπὲρ)를 ‘~을 대신하여’로 해석하여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신자를 위해 산 자가 대신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① (2) 신자의 일반적인 세례로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는 세례라는 설(“Chrysostom”,② J. Calvin, 이상근), (3)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소망을 가지고 세례받은 자들’의 생략 구문이라는 설(A. Barnes), (4) 휘페르(ὑπὲρ)를 ‘~의 위에서’로 해석하여, 죽은 자들(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Luther, Ewald”,③ F. W. Grosheide), (5) 산 자가 죽은 자를 대신하는 습관을 좇아, 급사하는 바람에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을 대신하여 그의 무덤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Chrysostom, Ambrose ),④ (6) 신자가 죽을 때에 살아 있는 자(가족)를 위해 기도하며 부탁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믿은 자들이 세례받는 것이라는 설(“Findlay”,⑤ A. Robertson and A. Plummer, 김용옥), (7) 죽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C. R. Erdman), (8) 물로 세례를 받지 아니하고, 순교함으로써 피의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설(눅 12:50, 막 10:38),⑥ (9) 죽은 성도의 몸을 물에 담그는, 세례 의식이 아닌 풍속이라는 설(Beza),⑦ (10) 병들어 거의 죽게 된 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라는 설(Holstein, Kling),⑧ (11) 새 신자가 입교하여, 이미 죽은 성도의 자리를 계승하여 세례받는 것이라는 설(Olshausen),⑨ (12) 고린도 교회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세례를 받은 것이라는 설(Atto),⑩ (13) 신자이었거나, 신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을 위해 신자가 대신 세례받는 것이거나, 혹은 신자가 되기 전에 죽은 가족들을 위한 가족들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설(G. D. Fee), (14) 모든 신자의 세례에 대한 일반적 상징으로써 고려하고 있는 것이며, 그 세례는 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H. Alford, “Meyer, Edward, De Wette, Stanley”(in 이상근), C. Hodge, T. C. Craig, W. Barclay, W. Carter, C. K. Barrett, W. F. Orr and J. A. Walther, p. 335, M. E. Thrall, “Parry”(in L. Morris), L. Morris, 內村鑑三.
2) in 이상근.
3) in 이상근. C. Hodge는 때때로 부활을 믿는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4) in J. Calvin.
5) in 김용옥.
6) “Godet, Flatt, Lightfoot”(in 이상근).
7) 상동.
8) 상동.
9) 상동.
10). 상동.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리를 사망과 부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라는 설(A. Clarke, D. S. Metz, R. C. H. Lenski) 등을 들 수 있다.
(1)설은 가장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터틀리안(Tertullian)은 초대 교회에서 이미 죽은 자를 대신하여 세례받은 사실이 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이교도들 사이에서만 행해졌을 것이다”(A. Robertson and A. Plummer).⑪ 또한, 대리 세례란 다른 성경적 근거가 없고, 신학적으로도 타당성이 없으므로 (1)설과 (5)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2)설과 (3)설은 부활을 부정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논증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아 타당성이 없다. (4)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휘페르(ὑπὲρ)가 ‘~의 위에서’로 쓰이지 않았다는 점과 그러한 관습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없다(C. K. Barrett, W. H. Mare, “H. A. W. Meyer”⑫)는 점을 미루어 받아들일 수 없다. (6)설부터 (12)설은 원문에 대한 비약적인 해석이거나 동떨어진 해석이다.
(13)설과 (14)설을 참조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세례’(1:13의 주석을 보라.)를 아는 교인들이, 죽은 자들-신자이든 불신자이든-을 위해 세례받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와 같은 관례는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그러한 불멸을 믿는 신앙에 관련되는 것이다”(Berk., fn., ad loc.).⑬ 이 경우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신앙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 중에는 영혼불멸이나 육체의 부활이나 환생 또는 관념(‘정의의 승리’, ‘죽음을 초월한 의식’, ‘제자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신앙 사건’)으로 이해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어떠한 사상적 동기나 어떠한 실제적 동기로 죽은 자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게 하는 효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미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 세례받는 것으로 인해 부활한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다만 그는 부활을 논증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요소에만 관심을 갖는다. 즉,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해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무엇을 하겠느냐](티 포이에수신, τί ποιήσουσιν)는 “‘그들이 무엇에 의지하겠느냐?’ 혹은 ‘그들이 무슨 소득이 있겠느냐?’를 의미할 수도 있다”(A. Robertson and A. Plummer). 또한, “그들이 자신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느냐?”(C. Hodge)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는 같은 의미를 강조하는 반문이다.
이어서 바울은 30절 이하에서 주로 자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부활의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1) C. K. Barrett: Lietzmann은 Chrysostom의 다음의 구절을 인용한다. 어떤 세례 문답자가 그들(마르시온주의자들) 가운데서 죽을 때,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의 침대 밑에 감추고 죽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에게 말을 걸고 그가 세례받기를 원하는지를 묻는다. 그 때에 그가 대답하지 않는 대신에 밑에 숨겨진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세례받기를 원한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그에게 세례를 준다.
C. K. Barrett는 “그리스의 종교적인 관습들에도 밀접한 전례들은 아니지만, 그러한 전례들이 있었다. …고린토도전서를 제외하면 이 같은 의식이 1세기의 50년대만큼 일찍이 행해졌다는 증거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의식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12) in W. H. Mare.
13) in D. S. Metz.

※ 출처: 최세창, 고린도전서(서울: 글벗사, 2001, 2판 1쇄), pp. 420-425.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5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이전 민영기 2017-05-23 총회 감사위원회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다음 관리자 2017-05-23 돌아가신 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