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을 이단시 하다니요!
박온순
- 2480
- 2017-09-11 06:51:10
박온순 목사 / 원천교회 담임
인터넷 사이트 ‘바른 믿음’의 대표 정이철 목사님께서 “과연 웨슬리는 신학적 이단성이 없었던 것일까?”(2017, 09, 05). “정말 웨슬리는 온전한 복음의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2017, 09, 07). “내가 웨슬리에 대해 배우고 들었던 것이 전부 사실이었다”(2017,09,08)라는 제하의 글을 페이스 북과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올려 많은 이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또한 감리교신학대학교 이** 교수님이 반박하는 글과 자료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차단하여 본인의 소견이 옳은 것처럼 기술할 뿐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웨슬리의 신학사상과는 전혀 다르게 오보하고 있기에 감리교 목사로서 정이철 목사님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는 바입니다.
Ⅰ. 서론
어제 우연한 기회에 정이철 목사님께서 위와 같은 제목으로 올린 글들을 읽게 되었는데 그 글의 내용을 파악하여 보니 우리 감리교단의 정통성과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매우 심각하게 훼손을 하고 있습니다. 정 목사님께서 비진리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사이트의 이름과 같이 “바른 믿음”을 지향하는 것은 귀한 일이나, 심히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한 분 하나님을 잘 섬기고자 하는 노력들이 피차에 어떤 유익이 있는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위험한 접근
정목사님은 스스로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웨슬리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신학교 교수님들과 그 외의 여러 사람들의 연구물 등을 통해서 웨슬리 신학에는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성경적인 내용이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웨슬리에 대해 이단성 시비를 거론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목사님 스스로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온 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모든 연구를 함에 있어 1차 자료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요. 목사님이 “웨슬리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침묵함이 옳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스스로의 학문적인 소양에 대해서도 많은 의심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그로인하여 이단을 가려내기 위한 지금까지의 노력들에 대해서 또는 향후의 노력에 대하여 스스로 손상을 입히는 계기가 되었으나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수호하시려면 좀 더 성실하게 노력하고 온유와 겸손하신 주님의 성품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신다면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사역이 되겠지요.
2. 합력하여 선을 이룸
무엇보다 저 자신 금번 기회를 통하여 감리교의 뿌리가 어떠한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게 하신 점에 대해서, 또는 내 신앙과 신학적인 입장의 자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게 하신 점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정 목사님의 오해로 인하여 감리교단에 악영향을 미친 부분에 대해서는 향후 정 목사님께서 약속(공개사과)하신 바를 이행하시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가 더 확대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Ⅱ. 본론
정 목사님께서 웨슬리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문제를 제기한 것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1. ‘칭의’에 관한 것과 2. ‘완전성화가 가능한 것인가,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3. “ 구원받은 자가 행위가 나쁘거나 성화가 파괴되면 구원을 잃고 지옥에 빠지는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웨슬리에 대한 그러한 사상에 대하여 말하기를,
“웨슬리가 한번이라도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 결코 죄인의 그 무슨 행위로도 발생하지 못하는 죄인에게는 ‘낯 설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칭의와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 적이 있었을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음으로 인해 칭의와 구원이 완성되었고, 더 이상의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웨슬 리가 강력하게 가르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지금까지 나는 그런 말 못들었다. 웨슬 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더불어 인간의 지속적인 믿음의 행위와 삶의 열매가 영원한 칭의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상식이다.......아무리 생각해도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이단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감리교가 정통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있다고 할지라도,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고 맞는 것은 처음부터 맞는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가 가르친 ‘완전성화’에 대해서 변명과 해석이 구구한데, 죄에 대한 유혹이 사라진다나.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는 ‘완전성화’라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그의 비성경적인 ‘완전성화’의 개념이 훗날의 거짓 방언과 거짓 성령세례 운동을 발생하게 만드는 처음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대체 ‘완전성화’라는 개념을 성경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 성화가 구원의 조건, 구원의 유지의 근거라고 가르치지 않고 오직 구원받은 자에게서는 성화가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원칙이라고 가르쳤다면 매우 안심할 일이다. 그러나 이참에 심각하게 다른 점 하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감리교 목사님들이 구원받은 자라도 다시 구원을 잃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고 했다.......중략” 구원받은 자가 행위가 나쁘거나 성화가 파괴되면 구원을 잃고 지옥에 빠지는가?”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신학적인 입장에 대한 정목사님의 지적은 대략 위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목사님께서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설교문 몇 편만 읽어 보셨더라도 이런 불필요한 논쟁과, 이로 인하여 일고 있는 파문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이에 대하여 웨슬리의 입장을 그의 설교문과 제가 웨슬리를 통하여 배운 신학과 신앙에 대한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1. 요한 웨슬리의 칭의 론에 관한 입장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음이 웨슬리의 입장입니다. 이에 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신인 협력설이라든가 성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을까요?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5)
웨슬리는 이 본문으로 “믿음에 의한 칭의 ( Justification by Faith )”라는 제목의 칭의에 관한 설교를 1738년 5월부터 하였으며 1742년 6월 8일에는 엡워스의 아버지 무덤에서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웨슬리설교전집 제 1권, 웨슬리 신학회 편, 대한 기독교서회, 2006. p.93)
1738년 5월부터 그 이후로도 이 본문으로 계속하여 설교하였다는 것은, 웨슬리가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고 난 뒤의 설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회심하기 이전(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잇에서의 회심 사건)에는 행위로 구원 얻는 줄 알고 열심을 다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시절부터 그의 열심을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매우 규칙적이며 열심이었던 과거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의 회심으로 인하여 거듭난 사건이후에 성령에 사로잡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역사적으로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웨슬리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은 지금 우리 조국의 모습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타락했었습니다. 정치나 종교나 사회적으로 그 어느 곳 하나 소망을 둘 수 없는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한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사 웨슬리 한 사람의 변화만이 아니라, 18세기 영국 사회를 피 흘림 없는 혁명을 이루도록 하나님은 그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웨슬리의 [설교6 ㅣ “믿음으로 얻는 의 The Righteousness of Faith ]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웨슬리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 로마서10:5-80
“ 믿음으로 얻은 의”(롬10:6)라는 것은 오직 독생자의 공로와 중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칭의의 조건(그리고 그 결과로서 현재의 구원이요 또 만일 우리가 그 안에서 잘 참고 견디면 주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실상 엄밀하게 말해서 은혜의 계약은 우리가 의를 얻기 위해 절대로 또한 불가결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독생자를 인하여 또 그 독생자가 이루신 속량을 인하여 ‘행한 것이 없더라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며’ (롬4:5), 그 믿음을 그에게 의로 돌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즉 그처럼 아브라함은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창15:6)....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다’고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를 위해서도 기록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의로 인정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믿음은 완전한 복종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롬4:23-25)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 용서를 확실하게 하시기 위하여, 믿는 자에게 장차 올 둘째 생명을 확실하게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사신 것입니다.” (위의 책,118-120)
정 목사님, 웨슬리의 칭의론에 대한 더 많은 자료를 제공할까요?
2.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하여
정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한 웨슬리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웨슬리가 가르친 ‘완전성화’에 대해서 변명과 해석이 구구한데, 죄에 대한 유혹이 사라진다나.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는 ‘완전성화’라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그의 비성경적인 ‘완전성화’의 개념이 훗날의 거짓 방언과 거짓 성령세례 운동을 발생하게 만드는 처음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대체 ‘완전성화’라는 개념을 성경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2017, 09, 05. 정이철)
1) 웨슬리의 완전이해
사람이 ‘완전’을 말하면 교만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웨슬 리가 이해하고 있는 완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목사님과 같이 웨슬리의 깊은 신학적 사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완전에 대해서는 웨슬리의 사상뿐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또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 설교 107ㅣ완전에 대하여 ] 다음과 같이 밝힌바 있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6:2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우선 나는 여기서 말하는 완전이란 천사들과 같은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광스러운 천사들은 절대로 ‘처음의 위치를 떠나지 않으며, 원래의 완전함으로부터 쇠퇴하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의 타고난 가치는 손상되지 않으며 특정한 것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여전히 불이 켜진 등잔 같으며, 모든 사물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명확하고 직접적이고 그들의 판단은 항상 옳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식이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냐하면 그들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헤아려야 할 수많은 것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그 본질 안에서 완벽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은 그들의 틀릴 수 없는 이해력에 의해 모두 충실히 조절되는 것입니다.......중략.......사람에게 있어서는 항상 바르게 생각하고, 모든 사물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것들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말합니다. 사람의 이해에 의지하는 그의 감정 때문에 모든 것이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과 행동은 많든 적든 그의 이해와 감정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육체에 속해 있는 동안에는 천사와 같은 완전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설교집 6권, 97쪽)
“ 사람이 부패하기 쉬운 육체 안에 있는 동안에 그 어떤 사람도 아담과 같은 완전을 얻을 수 없습니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순수했으며, 죄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심지어 거룩한 천사들로부터도 자유로웠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로 아담의 이해는 천사들의 그것만큼 깨끗했으며, 그의 감정 또한 천사들처럼 일정했습니다. 이것에 힘입어 아담은 항상 옳은 판단을 했으며,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항상 올바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한 이후로, 이러한 경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수많은 실수들을 범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는 항상 나쁜 감정들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그의 생각이나 말과 행동에 항상 올바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그의 현 상태로서는 더 이상 천사들과 같은 완전은 물론 아담과 같은 완전도 얻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설교집 6권, 98쪽)
“ 그러면 부패하기 쉬운 몸 안에 살고 있는 동안 인간이 할 수 있는 완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다오’라고 하는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혼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총체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방식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번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을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 그 전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설교집 6권, 99쪽)
“이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는 위대한 사도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비록 이 말씀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우리 주님의 겸손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보다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 모두를 향한 그의 모든 심정과 그의 모든 감정과 그리고 그의 모든 성향 전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는 그 어떤 악한 감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좋은 감정이나 기분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한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에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 설교집 6권, 100쪽)
이처럼 웨슬리가 말한 완전의 개념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의 완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아담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없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순종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마음과 뜻과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처럼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완전성화에 대한 반대의견과 성경적 근거 제시
웨슬리 당시에도 “인간이 완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 것이냐,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이냐” 고 묻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웨슬리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이와 같은 완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대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이에 관한 약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온 마음을 다해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매우 명확하고 완전한 약속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다’(신30:6). 우리 주님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그 어떠한 말씀도 더 이상 이보다 강력하게 할 수 없으며, 그 어떠한 약속도 더 이상 잘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명령으로서의 약속을 표현한 것입니다” (설교집 6권, 102-103)
웨슬리는 이 외에도 위 설교문을 통하여 많은 말씀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을 이곳에 다 싣기에는 역부족인 듯하여 필자가 즐겨 묵상하는 성경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창1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1-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18:13)
다윗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2611)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3. 웨슬리의 신학사상은 오직 성경을 기초로 하여 루터(1483-1546)와 칼빈(1509-1564)을 아우르는 통전적인 사상이다.
그렇다면 왜 웨슬리가 “신인 협력설” 이라든가 “성화”에 관한 것을 강조하였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이 칼빈 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게 된 것인데, 이에 대하여 웨슬리가 그러한 개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상황을 유추하여 본인의 소견을 밝혀보겠습니다.
1) 루터의 믿음과 행함에 대한 입장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평가 절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루터가 그렇게 말한 것은 “행함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음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분명 그렇게 말한 배경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후대의 사람들이 본래 루터의 상황속에서 강조했던 깊은 의미가 있었음을 간과하고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며 행함에 대하여 등한히 하는 경향을 보이기에 웨슬리는 당대의 나태하고 생명 없는 믿음 생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믿음과 행함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님을 강조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그 행함이 구원 얻는 조건이 될 수 없음은 이미 앞서 밝힌바와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그 열매가 있어야 할텐데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은 열매를 낼 수 가 없었겠지요.
그러한 교인들을 볼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남을 경험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했던 웨슬리가 얼마나 답답했을까는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하기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성화의 과정은 진정 구원 얻은 성도라면 반드시 따라와야만 생명을 소유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아니, 당연한 열매이겠지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14)
또한 웨슬리는 믿음과 함께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게 되는 자신의 회심의 경험을 통하여 거룩하게 변화되지 않는 믿음이 과연 구원 얻을 믿음을 소유한 자일까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고, 당시에 죽은 믿음을 깨우치고 믿음의 삶을 살아내도록 촉구하기 위한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는 절대로 별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령의 사람은 죄를 벗 삼아 살 수 없습니다. 내주하시는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요16:8)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누구든지 웨슬리가 성화를 강조하였다고 하여 이것을 구원론과 연관하여 구원을 행함으로 받는 것이라 가르친 것처럼 오도하면 안됩니다.
2) 웨슬리는 칼빈의 예정론을 넘어 통전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봄
칼빈은 인간이 구원 얻음에 있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웨슬리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웨슬리가 말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먼저 찾아오셨고, 수가성 여인을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셨으며 회개할 마음도 부어주셔야 회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웨슬리의 입장입니다. 이것을 ‘선행적 은총’이라 합니다. 내가 알기 전에 주님이 먼저 찾아와 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어찌 반응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 반응한다는 것을 어찌 ‘행위 구원론자’라고 치부할 수 있는지요.
칼빈의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결국 구원받고, 택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으면 알아서 구원해 주신다? 전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다 알아서 믿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한 믿음인 것 같으나 이처럼 무책임하고 비인격적인 관계가 어디 있습니까. 이러한 신학적인 사상이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인간이 노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천국은 따 놓은 당상으로 생각합니다. 예정론 자들은 택자와 불택자를 자기들의 소견으로 나누며 판단합니다. 이는 이단들이 하는 일 아닌지요. 매우 위험한 사상입니다. 구원 얻은 자로서 이미 천국은 주어졌으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힘쓰고 애쓸 필요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 믿음을 잃지 않도록 힘써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없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빌2:12)
“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웨슬리는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 반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죄에 대하여 통회 자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 때 인간도 그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황송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손을 내미실 때 잡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요? 세상에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 손을 어찌 놓을 수 있는지요.
그 은혜를 힘입었다면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하려고”(벧후1:4)부르신 부름에 합당하도록 더욱 힘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1:5-7,10)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구주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결코 천국을 따 놓은 당상으로 생각하여 태만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변화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자기를 죽이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명하신 말씀에 순종하며 완전으로 나아가려는 것, 그것이 이단적 사상입니까?
Ⅲ. 현대의 감리교회
저는 청소년기까지 정 목사님이 속한 교단의 장로의 집안에서 매우 율법적인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구원의 기쁨도 감격도 전혀 모른 채 하나님은 오직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도 모든 헌신의 이유도 율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혼이 날까봐.........또는 그렇게 함으로 복을 얻으려고. 또한 타 교단은 모두 잘못된 교단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특히 감리교는 이단인 줄 알았습니다.
17세 때 부모의 품을 떠나 상경하여 감리교도가 되었습니다. 20세에 이르러 어떤 계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으며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전 인격적으로 경험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감리교도가 되어 복음적인 회심이후에 우리 구주 예수님을 믿는 자유함이 어떤 것인지를 전존재적으로 경험하였습니다. 그로인하여 제 인생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고 삶의 방향과 목표가 분명해졌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주님의 시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경험합니다.
우리 감리교단의 목회자들은 비교적 개방적입니다. 웨슬리 목사님과 같이 철저하게 신앙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신앙관을 가진 목회자들도 있지만, 웨슬리 목사님의 성화의 개념을 달리 해석하여 사회의 약자를 위한 도움이나 사회 참여를 통하여 개혁을 추구하는 진보적 성향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며 웨슬리의 가르침이 그러했고 그 가르침을 따라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여 감리교는 복음이 없다고 그렇게 평가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감리교단은 타 교단에 비해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교단이나 신학교나 문제들을 은폐하지 않습니다. 서로 드러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감리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더러운 것들을 철저히 드러내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려고 작정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감리교단은 단일 교단입니다. 때로는 목회자들간에, 또는 교수들 간에 신학적 입장과 어떤 사건들을 보는 관점이 달라 갈등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기본 입장은 비뀔 수 없겠으나 자신들의 입장을 절대화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타 교단과 다른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진 **교단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지요. 주님께서 친히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더딘 것 같아도 새롭게 되는 날이 도래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고, 세상의 문제에 관여하였으나,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과 부활을 얻게 하려는 주님이 오신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회심 이후에 오직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전할 때 하루도 핍박을 받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오직 자신을 만나 주신 우리 주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하여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52년간 말을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시다가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18세기 영국 사회를 변화시킨 그 분의 마지막 말씀은 “ 주님 안에 거하는 것 보다 더한 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찌 이러한 목사님을 이단시 할 수 있는지요.
Ⅳ. 결론
루터나 칼빈, 웨슬리 모두 한 시대에 존귀하게 쓰임 받으신 매우 귀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저 천성을 향하여 가는 길에 자신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던져 디딤돌이 되어주신 분들입니다. 그 디딤돌을 잘 딛고 주님께로 건너갈 뿐 아니라, 우리도 누군가를 위하여 또 하나의 디딤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못된 방향으로 놓이지 않도록 주님의 시선에 고정하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