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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청년과 영생(상): 마태복음 19:16-22. 구원≠행위(양심, 율법, 종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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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15 18:20:52

천국이 어린아이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마태는, 여기서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자신의 많은 재물을 더 믿고 의지하는 바람에 실패한 관원이자(눅 18:18) 부자인 청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마가복음 10:17-22과 누가복음 18:18-23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서로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이 기사는【16】[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로 시작된다.
[어떤 사람]은 관원이며(눅 18:18) 부자인(19:22) 청년(19:20)이다.
[선생님이여]는 8:19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예수님을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로 인식한 호칭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신뢰를 드러낸 호칭이다.
[선한]은 아가테(ἀγαθέ)이며 원래 도덕적 선을 의미했지만, 칠십인역에서는 하나님께 대해 자주 사용되었다(시 118:1-, 왕상 16:34, 왕하 5:13 ). 헬라에서는 사람이나 물건의 중요성이나 훌륭함을 나타내었다.
[영생]은 조엔 아이오니온(ζωὴν αἰώνιον)이며 ‘죽음’(롬 6:22)과 ‘멸망’( 갈 6:8)의 반대가 되는 생명이다. 사도 요한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4. 참조: 요일 5:12)라고 하였고,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라고 하였다. 즉, 영생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사이며,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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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시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라고 하였다. 영생이란 그 명칭이 지시하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 곧 결코 끝나지 않는 생명이다.
물론, 이 영생 또는 {생명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덕으로부터 비롯되는 생명’(βίος κατ’ ἀρετήν)이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신비적 실체로서의 불멸은 결코 아니다.}(요 1:4의 주석).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청년이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유대인인 그는 율법에 근거된 영생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 12:2에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하였고, 마카비 II 7:9에는 “세상의 왕이 우리를 일으켜,······영원한 삶을 얻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이해한 영생이란 죽은 후에 부활하여 천국(메시아 왕국)에서 영원토록 누릴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질문의 요지는 세상 끝 날에 무슨 선한 일을 해야 구원 곧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레인(W. L. Lane)은 “그의 질문 형식은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인 천국 또는 영생을 무력한 상태에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대조되는 성취의 경건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질문의 배경에 대해, 그닐카(J. Gnilka, 하권, p. 117)는 “묵시문학과 함께 비로소 유다교에 퍼진 부활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구원 곧 영생을 보증하지 않고, 개개인으로 하여금 윤리적 결단과 실행에 맞서도록 촉구하였다. 무엇인가를 하려는 의욕을 갖게 되면 행해야 할 율법에 주목하게 되고, 율법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쿰란 종파에서 확실한 구원(영생)의 길로 간주되었던 엄격한 토라주의(율법주의)에 이르기까지 토라에 대한 다양한 해설들은 이 나라의 적지 않은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혼란을 빚도록 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질문에는 율법주의의 근본적인 잘못이 드러났다. 즉, 구원(영생)은 무엇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영생)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막 10:17의 주석).
그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17】[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고 하였다.①
예수님은 청년에게 어째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선을 자신에게 묻느냐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밝히고, 생명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계명들]’(엔톨라스, ἐντολάς: 5:19의 주석을 보라.)을 지키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정말 영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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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 Aland, et al., ed.: א 사본에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구와 똑같이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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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기 원한다면, 선한 일을 물을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활해 왔다면, 예수님이 바로 신성을 지니신 구주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즉, 그분의 관심은 자기 자신의 품성에 대해 무슨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계명들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선한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마태는【18】[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19】[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대답은 제 6, 7, 8, 9, 5계명을 언급하신 것이다(출 20:12- 16).
[살인하지 말라]는 5:21-26의 주석을 보라.
[간음하지 말라]는 5:27-32의 주석을 보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허락을 받지 않고 남의 소유를 몰래 가져가지 말라는 것이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사석에서나 법정에서나 사실과 다른 증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 6:1-3, 골 3:20)는 15:4의 주석을 보라.
이 계명이 공관복음서의 기사에서 맨 나중에 제시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벵겔(J. A. Bengel)과 이상근 님은 그 청년이 특히 이 계명에 불성실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나, 20-21절을 미루어 보아 받아들이기 어렵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 19:18을 인용한 것으로, 십계명의 둘째 부분인 인간에 대한 계명들의 적극적 결론이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일환으로 행해져야 한다. 이 점은 인간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22:37)을 실천한다고 하면, 그에게는 그 밖의 어느 누구도, 어떤 것도 사랑할 여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로도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요한일서 5:2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라고 하였다. 또, 4:20-21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라고 하였다.
레위기 19:18에는 이웃을 동포와 동일시하였다. 이웃은 바로 이스라엘인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바리새인들]은 이 말에서 다른 보통의 사람들을 제외시키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쿰란 종파의 사람들은 ‘어둠의 자식들’(1QS 1:10, 9:21-22)을 제외시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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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유다교인들은 이 범주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외국 사람들을 제외시켰다”( I. H. Marshall).}(눅 10:27의 주석).
{웨셀(W. W. Wessel)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웃(동포)이라는 말을 구약성경의 구절에서보다 더 좁게 해석하였다. 즉, 구약성경( 레 19:34 등)에서는 함께 사는 타국인도 포함했으나, 그들은 유대인과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들만 포함시켰다.”라고 하였다.}(막 12:31의 주석 ).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포함하여(5:43-48)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움을 베푸는 사람 사이를 이웃 관계로 새롭게 해석하셨다(10:29-37). 그렇다고 하면, 결국 이웃이란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할 때에는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한 것에 대해, {스탐(R. T. Stamm)은 “이웃을 자신보다 덜 사랑하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면 이웃으로 하여금 자신을 이웃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할 때는 자만도 거짓도 겸손도 아니라, 올바르게 자신을 평가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갈 5:14의 주석).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예수님의 구속의 대상인 우리와 같은 존재로 여겨 사랑해야만 한다.
※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51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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