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로 산다는 것은 .....

오재영
  • 1678
  • 2017-12-22 16:55:00

목사로 산다는 것은 .....


어느 정도의 연륜이 있는 목회자들이 기억하는 ‘슈퍼바야지드’의 기도문이 있다.내가 젊었을 때 나는 혁명가였고, 그때 하나님께 드린 나의 기도는 “주여, 제게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옵소서!” 라는 것이었다. 어느덧 중년에 이르러 나의 인생이 덧없이 흘렀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의 기도는 “주여, 저에게 저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또 얼마 후에는 “주여, 저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제가 우선 만족해야 되겠나이다.”라는 기도로 바꾸었다.


이제 내가 늙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헤아리게 되면서, 나의 우둔함을 눈치 채게 되면서 나는 다시 기도를 바꾸었다. 지금은 나의 기도가 “주여, 저에게 저 자신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드린다. 돌아보면 내가 진즉에 젊었을 때부터 이런 기도와 삶을 살았더라면 대부분의 내 인생을 허송세월 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그 이름도 익숙한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빌. 하이벨스(Bill. Hybels)목사는 국가의 어느 유력한 군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와 만났다. 그 전쟁 영웅은 전투 중에 자신에게 부닥치는 생사가 걸린 결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빌은 그 내용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사안들도 단순히 생사의 문제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날마다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을 상대하고 있는데...”


목사, 그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목회자인 우리에게 그의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정돈되는 디트리히 본회퍼목사, 그는“제자도의 댓가” 라는 책에서 그가 ‘거대한 분리’라고 이름붙인 글에 그리 표현했다. 그리스도께 차출된 제자 된 이들이 통과해야할 부름 뒤에 오는 첫 번째 단계는, 그의 제자를 “부름 이전의 존재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즉시 따르라하시는 그의 부르심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낸다. 즉 그가 옛 상황에 머물게 되면 그에게 ‘제자도’는 불가능해진다.


많은 이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말하고 있다. 1500년 동안 쌓여온 신앙을 빙자한 거대한 불의와 안팎으로 감당할 아픔은 상상만으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루터본인은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하여 참된 신학이 무엇인가를 깊이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불같은 시련을 당했으며 언제나 질병과 함께 수많은 시련을 감당하였다. 그가 여러 질병들 속에서 선열이 나고 고통 속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그 말은 언제나 구도자들인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나님, 내 어릴 적 고향 ‘아이슬레벤’ 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지난번 글에도 표현한바가 있으나 “목회자는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교회라는 배에 사람들을 태우고 운항하는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단지 배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고 먼저 자신에게 그 일을 맡겨준 주인의 뜻을 잘 헤아릴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거친 파도와 폭풍우 중에도 자신이 책임지고 가야할 길을 포기하지 않는 거룩한 강인함으로 연단된 꿋꿋함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라 했다. 그러하기에 목회자로 부름 받음이 확실한 이상 그가 어느 순간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에게 일생동안 고난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며,


동시에 그 숙명적인 고난을 대하고 감당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목회사역의 현장에서 겪어야할 수많은 비난과 모함을 묵묵히 주님 앞에서 사랑으로 참고 견디어야 한다고 하였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하나님께서 쓰신 모든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들이 먼저는, 그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알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시며,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쓰신 모든 사람들마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남다른 고난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들...


최근에 당당을 비롯한 신문과 방송에 본인들 스스로가 등장하여 거론하기도 부끄러운 일들을 대담하게 증오심으로 드러내는 이들의 모습들은 한마디로 실망을 넘어 우리 모두를 서글프게 한다. 지금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사역의 현장마다 생활의 염려와 함께 다양한 어려움에 처한 이때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만 방자”한 모습을 여과 없이 이교도들과 타 교단 앞에 자기가 소속된 교단과 전체교역자들을 욕보이는가?


벌써 여러해 전부터 버리지 못하고 이어오는 습관들이지만 오늘 우리 교단의 일부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흐트러진 모습들은 이제는 도를 넘었다. 모두가 치유를 받아야 할 중병의 증상들인 것은 분명한데도 오히려 남 탓하며 의(義)를 위함이라 주장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교단과 교회를 위하여 희생과 헌신을 떠벌이는 이들치고 그들로 인하여 교단과 교회가 덕을 본 일이 있는가? 오히려 불신자들에게 비웃음과 가십거리만 제공했을 뿐이다.


어제아침 가정예배시간에 서길원 목사를 통한 말씀 중에 ‘호레시오 스패포드’ 의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작사자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상념들이 떠올랐다. 영혼 구원에 헌신한 무디 전도자를 전적으로 후원하는 이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은 온다. 그러나 그 고난의 순간에 원망이 아닌 부르짖음의 응답으로 허락된 찬양의 내용이 가고 오는 시대의 고난을 겪게 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고 있지를 않는가?


지난주간에는 우리 연회내의 비전교회의 목회자 부부를 초청하여 격려하는 모임이 있었다. 모두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역을 하는 까닭에 시간을 낼 수 없는 이, 또 명칭 때문에 자리가 쑥스러워 참석하지 못한 이들 외에도 꽤 많은 이들에게 선물과 격려금까지 전달했다. 연회의 남은 경상비와 지난번 감독께서 케냐에 갈비용까지 모았다는 후문이다.


그날 옆자리에 오랫동안 군선교회의 사무총장으로 봉사하시고 지금은 은퇴하신 박종규 목사께서 군 선교와 선교사들을 염려하면서 선교사 복지주일 헌금이 본부에 20만원 밖에 입금되지 않았다고 한탄하셨다. 물론 각 교회마다 각자 교회적으로 도울 것이다. 이제는 해외에 나가있는 선교사의 숫자가 75개국에 1,272명이나 되는데 그때까지 20만원이 들어왔다니...


무슨 한들이 그리 쌓여 있기에 명색이 성직자들이면서도 집요하게 고소고발에 집착하고 골몰하며 패거리지어 선동하기에 혈안들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 교단의 안고 있는 아픔이다. 하나같이 방향을 잃고 방황중이다. 누군가 “갈곳이 없는 항해사는 순풍이 불어도 방황하지만, 갈곳이 분명한 항해사는 역풍이 불어도 이를 헤쳐 나간다.” 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따라가노라면 당연히 그 순간부터 피를 흘리는 고난의 가시관이 언제부터 영광의 면류관으로 변모한지는 모르겠으나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시류를 따라 바뀌었어도 언제나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자기를 부인하고 동시에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고 있지 않다면 그는 지금 십자가 아닌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의에 빠져 있을 때보다 더 위험한 때가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코람데오,(신전의식)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


어제는 오랜만에 당당의 메인 화면에 탈북자 가정의 김세광 전도사의 사연이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하고 또 한편으로 는 부끄럽게 했다. 전에 잠시 사연을 접한 후에는 잊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겐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의 순간이었는데도 나를 비롯한 누군가에게는 형제를 헐뜯기 위하여 지혜를 짜내는 순간이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부끄럽게 했다.


수 일전 후배목사 몇이서 “이때에 목사님도 한 말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에게 조심스럽다며 대답했다. 나보다 젊으니 목사로서 상식적으로 기억 하라고, 아무리 대단한 비전과 꿈과 욕망을 품고 있어도 “큰 교회 욕하는 이, 큰 교회 이끌어갈 가능성 희박하고, 자기는 남의 길을 막으면서 본인의길 형통하기를 바라는 이는 정직한 마음이 아니다.” 했다.


주님께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아무에게나 맡기시겠는가? 탈북자 가정을 도운 비중 있는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 그 일에 함께한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결코 짧지 않은 목회자의 길을 가면서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감당 할 수없는 교활한 사탄과의 평생 동안을 싸워야할 영적전쟁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언제나 주님 앞에서 수시로 냉철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과 자기성찰이다.


온갖 유혹과 변화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자의 말씀이 있다. “너는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鬱憤)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라.”(잠22:24-25). 구도자의 길에서 자기성찰에 실패하여 심령이 무너진 이 마다 자기혼자서 무너진 예가 없기에 두려워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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