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감리회 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 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은 바로 삭제됩니다.
II. 부자 청년과 영생(하): 마태복음 19:20-22(구원≠양심 행위, 율법 행위, 도덕 행위)
관리자
- 1544
- 2017-12-22 06:50:15

계명을 인용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의 당당한 대답에 대해, 마태는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하였다.
마가복음 10:20과 누가복음 18:21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하여 더욱 강조하였다. 이 대답은 바리새인들의 전형적인 주장이다(눅 18:11-, 빌 3:6). 그런데, 그 청년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묻기까지 하였다.
{“그의 충동적 대답은 그가 율법을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고, 그것을 완전히 성취했다고 확신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W. L. Lane). 그러나 실은 “그는 진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자기 의무를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하는 거짓된 확신을 자랑하는 것이다”(J. Calvin).}(막 10:20의 주석). 그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문자적 의미를 따른 외적이며 피상적인 준행이었다. 그는 율법의 속뜻을 올바로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었다. 그 결정적 이유로 그가 예수님의 진의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결국 영생의 주님 예수에게서 물러가고 만 행동을 들 수 있다(22절).
그가 영생보다도 많은 재물을 더 사랑하여 근심하며 갔다는 것(22절)은, 그가 소유한 많은 재물이 그의 우상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계명을 위반하며 살아온 것이다. 또한, 율법의 본정신인 인간 사랑에 있어서도 성공적인 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키며 살아왔다고 하는 청년에게 이미 영생 곧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의 배금주의를 포기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것을 권하셨다. 이 사실에 대해, 마태는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마가복음 10:21과 누가복음 18:22에는, "가서 네 소유를 팔아"의 앞에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가 삽입되어 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즉 영생을 얻고자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예수님의 권고의 내용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지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왜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이 점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나를 완전히 믿으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명령을 하신 분에 대해 완전한 신뢰나 자기 포기가 없다면, 그 젊은 부자 관원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청년이 영생을 얻음에 있어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란 앞서 언급한 계명들에 대한 추가적인 성취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J. Calvin, J. Gnilka, 하권, p. 119, E. Schweizer). 따라서 “참된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특징짓는 자기희생적 헌신”(W. L. Lane)이나, “사랑이나 동정”(E. P. Gould) 등의 결핍으로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막 10:21의 주석).
그러한 견해는 예수님의 취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표현된 내용을 문자적 의미로만 이해한 데서 비롯된 오류인 것이다. 이 점은 예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라고 하신 다음에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라거나,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라고 하신 다음에 ‘그리고 영생을 얻으리라’라고 하시지 않은 점과 성경의 구원관이 행함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요 3:16, 갈 3장, 엡 2:8)으로도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말씀은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 부자 관원에게서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결정적인 장해가 있는 것을 아셨다. 그것은 바로 그의 소유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의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재물은 곧 신이었다. 이것이 그 나름대로 계명을 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심히 지킨다고 자부하면서도 영생을 얻을 방도를 찾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결정적인 이유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 관원에게―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그는 영생을 목전에 두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결단의 표로서 재물을 포기하고, 재물에 집착된 마음과 재물이 구원받은 한 표징이라는 유대교의 교리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영생의 주님 예수와 그 주님 이외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의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터득해야 한다. 그때에 그는 전혀 새로운 곳인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지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즉, 성격상 하늘에 속해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늘에 온전히 보전되어 있으며, 또한 오늘날에도 미리 맛볼 수 있는 모든 복이 주어지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물론, 그 핵심적인 것은 영생이다. 아직 그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주님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영생을 위해 찾아온 부자 청년 관원에게 주신 예수님의 권고의 취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영생의 주님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10:37-). 주님 예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은 언제든지 주님 예수와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결단의 표로서 사랑의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
영생을 얻고 싶어한 청년의 실패에 대해, 마태는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하였다.
그가 거부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는 것은, 영생보다도 재물을 훨씬 더 사랑한 것을 반영한다.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실은 재물을 신으로 믿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6:24에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결단을 한 것처럼, 그도 예수님의 말씀을 좇는 결단을 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 장면이다.
※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515-518.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5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