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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앞 광장으로 나와야만 했던 율법사
관리자
- 1313
- 2018-02-14 20:36:53
그러나 세상엔 우연이란 없다.
만약 율법사들이 돈을 주고 산 여인(연기자)이었다면 그 이유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연히 성전 앞 광장으로 나왔던 율법사가 아니라 반드시 성전 앞 광장으로 나와야만 했던 율법사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에 관한 이야기를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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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전 앞 광장은 율법사들의 나아바리(지배구역)였기 때문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똥개도 제 집에선 50% 먹고 들어간다고... 그리고 스포츠 경기에서도 원정 경기 보다 홈 경기가 대부분 승률이 높은 편이다. 성전은 어느 곳인가?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도 있지만 극히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율법사들의 기득권이 판을 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성전앞 광장은 율법사들의 나아바리였던 것이다. 자신들의 활동영역(나아바리)에서 예수님을 넘어트리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예수님을 넘어트릴 수 있을 것인가? 이들에겐 이미 여러 차례 예수님을 넘어트리려 시도는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예수님께 보기좋게 참패를 당하였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2. 성전 앞 광장은 유대인의 구역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상태였다. 로마는 예루살렘에 총독을 파견하여 정치적으로 지배력을 강화하던 시기였으며, 로마 총독의 힘은 이미 유대왕의 힘을 뛰어 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던
때였던 것이다. 일본이 총독을 보내어 식민지 정책을 준비하였던 것과 같이 로마는 유대의 법을 허물고 로마의 법을 새로운 이스라엘의 통치적 근간으로 삼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로인해 유대인들의 적지않은 저항을 받아야만 했고 그때마다 로마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굴복시키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예루살렘의 성전은 아직 로마의 법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지 못하던 때였기에 율법사들이 준비한 시험 내용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바로 유대인의 활동구역인 성전 앞 뜰이었던 것이다.
3. 많은 유대인이 모이는 곳이 성전 앞 광장이었다.
성전은 아직 로마 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던 곳이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이 처한 정치적 이슈를 다루기에 매우 유용한 장소이기도 했다. 더불어 유대인의 구역이니 로마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인 샘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로마의 법이 못 미치는 유대인들의 구역이라 하여도 사람이 없으면 율법사들이 준비한 시험은 통할 수가 없었다. 율법사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성전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그 무엇보다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뒷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4. 당시 유대인들은 반反 로마적인 정서를 갖고 있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데 있어선 성전 앞 광장에 아무리 많은 유대인들이 있다 하여도 그들이 율법사들의 힘이 되어 주지 않는다면 도리어 큰 위험부담이 따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모든 유대인들을 율법사의 편에 서게 할 시험의 내용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모세의 법을 따를 것인가?를 그 시험의 내용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이 시험을 총독관저 앞 광장에서 했거나 로마군병들이 모인 곳에서 했다면 도리어 율법사들이 로마인들에 의해 끌려가 죽을 지도 모르는 아주 민감하고 위험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없는 곳, 로마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선 무조건적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내용이 로마의 법이냐? 아니면 모세의 법이냐? 였던 것이다.
5.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유대인들을 일순간 반대자들로 만들어야만 했다.
당시 부패한 유대종교인들이 많았기에 대다수의 유대인 중, 하층민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새롭게 이끌어 줄 지도자, 선지자와 같은 인물을 갈망하고 있었던 때였다. 이러한 기대감은 자연스럽게 메시야를 대망하는 믿음의 모습으로 변하였었던 때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인들의 대망을 이용하여 수 많은 거짓 메시야, 거짓 지도자와 선지자들이 나타나 미혹을 하였지만 그들은 스스로 무너지고 사라져 갔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거는 기대감은 그 어떤 시기 그 어떤 이들 보다 높을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타락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눈의 가시처럼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지지도는 일순간 자신들의 나아바리(기득권)를 잃을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마음을 실망이라도 시켜야만 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기회로 예수님을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더할나위 없는 결과를 얻어 낼수 있는 호기로 삼으려 했였던 것이다.
6. 반드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게 하던지 아니면 로마의 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간음의 문제를 두고 서로 양립하고 있던 모세의 법이냐? 로마의 법이냐?의 시험은 경우에 따라선 일순간 유대인들을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던지 아니면 로마의 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율법사들에겐 질수 없는 도박(쇼당)이었으며 무엇을 선택하던 예수님은 일순간 유대인들의 적이 되던지 아니면 로마의 적이 되어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잃게 될 수 밖에 없었던 민감하고도 막중한 시험문제이었던 것이다.
7. 성전 앞 광장은 율법사가 시험을 하여 이길 수 있는 최적, 최상의 장소였던 것이다.
그래서 율법사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되 다른 곳이 아닌 성전 광장에 있을 때 시험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전 앞 광장에서 율법사들이 예수님께 패한다면 그나마 자신들이 갖고 있었던 모든 기득권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시험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앞 광장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율법사들도 그들 나름대로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00% 승리를 자신 할수 있었던 쇼당의 패(시험문제)가 자신들에게 있다 생각을 했었으니 그들은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사들이 우연히 성전 앞 광장에 계신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연적으로 의도되어 진대로 율법사들은 쇼당의 시험지(간음한 여인)를 들고 성전 앞 광장으로 나와야만 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