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사의 치명적인 잘못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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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13 21:54:32

  1. 시작하는 말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 “악의로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느냐?”, “모르고 그런 것이 아니냐.”, “잘되자고 그런 것이 아니냐.” 하는 말들이 자주 들립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책임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피해자도 문책하지 말고, 봐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말이 이미 벌어진 불행한 사태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지나 우둔한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은, 그 자신과 남들에게 치명적인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을 배워야 하고, 필요한 지식과 정보와 능력을 갖춰야 하고,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웃사의 치명적 잘못

다윗 왕이 하나님의 궤를 소달구지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왔습니다. 금으로 씌운 하나님의 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과 만나가 담긴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 궤가 실린 소달구지는 아비나답의 아들인 웃사와 아효가 몰았습니다. 다윗과 백성들은 갖가지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 앞에서 주악하며 행진했습니다. 모두가 좋아한 이 장엄한 의식에는 불길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다윗 왕은 궤의 고리에 채를 끼워 레위인들의 어깨에 메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겨 소달구지에 하나님의 궤를 싣고 옮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실은 소달구지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었고, 궤가 떨어질까 봐 웃사가 붙들었습니다. 누가 봐도 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웃사의 잘못함을 인해 진노하여 웃사를 치셨고, 웃사는 하나님의 궤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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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죽고 말았습니다.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처사입니다. 더구나, 웃사는 레위 지파였고, 또한 자기 집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의 궤를 섬겨 온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승승장구하던 다윗 왕이, 화를 내며 그곳 이름을 ‘웃사를 침’이라는 뜻인 ‘베레스웃사’라 칭했겠습니까?

사람이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잣대로 모든 사람을 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나 고착된 사상을 따라 선악과 시비와 미추를 판단하고, 그 잣대로 다른 사람의 처사를 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직장인이나 종교인이나 공무원이나 정치인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고, 기업이나 종교나 나라에 편 가름과 혼란과 폐해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그러한 병폐를 분별하지 못하고, 쉽게 말려든다는 것입니다. 문병하 목사가 소개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왕이 그 나라에서 그림을 잘 그리기로 소문난 여자에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을 그려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한 달 뒤에, 여자는 왕을 찾아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고, 그 그림을 본 왕은 큰 소리로 그 여자를 꾸짖었습니다. “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을 그려 오라 했거늘, 어찌 이렇게 괴물같이 추하고 늙어빠진 노인의 모습을 그려 왔느냐?” 왕의 호통에 여자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림에 있는 추한 노인은 소녀의 아비로 제가 어렸을 때, 집에 큰 불이 나서 저를 구하기 위해 들어왔다가 심한 화상을 입어 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오면서 이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거리던 왕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고…”

왕은 여인에게 여인이 생각하는 제일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을 그려 오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왕의 뜻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선입견과 고정관념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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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 잣대로 도저히 잴 수 없는 좋은 사람도 많고, 악한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각한 문제는, 웃사와 다윗 왕처럼, 하나님의 처사까지도 자기 잣대로 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불완전한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의 처사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사고는커녕, 이성적 사고도 아닌 순간의 감정적 사고로 죽음을 초래한 웃사의 사건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절대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누구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제사장도 규례를 따라야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웃사도 그 규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긴급한 사태에 규례를 생각 못하고, 감정적 처사를 한 것입니다.

웃사의 경우는 불가피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생각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물인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 여하에 따라서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될 정도로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머리로 이러쿵저러쿵해도 될 수준의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한한 사람의 관점으로 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전적으로 순종해야 할 존재입니다. 민수기 23:19을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웃사의 행동에서 당신에 대한 무엄과 불경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어긴 웃사의 무엄과 불경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다윗 왕과 백성들에게 파급되는 문제였습니다. 한동안 하나님의 궤를 경건히 대했던 웃사가, 경홀히 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궤를 오래 모시면서 친숙해진 것입니다.

수양이 덜된 사람은 친숙해질수록 더욱더 경홀히 여기고, 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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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잘된 사람은 친숙해질수록 더욱더 존경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시원찮은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해질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그 말씀을 하찮게 여겨 거역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해질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귀히 여겨 순종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규례를 어기고, 멋대로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으로 여겨 소달구지에 실은 다윗 왕과 하나님이 아닌 다윗 왕의 처사를 따른 백성들에 대한 엄한 경고였습니다. 역대상 15:13을 보면,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게 아닙니다.

주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한답시고 검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를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의리와 용기가 있는 감정적인 행동이었지만, 주 예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참으로 주 하나님을 위하는 길은 자기가 아닌, 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와 지시와 말씀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웃사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보고 깨닫기는커녕, 화를 내며 그곳을 ‘웃사를 침’이라는 뜻인 베레스웃사라고 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처사를 안 받아들이고,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 다윗 왕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승승장구해 왔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내 믿음이 좋았다고 해서, 오늘의 내 생각과 내 행동이 믿음의 생각이요 믿음의 행동이라고는 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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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입니다. 늘 깨어 근신하고, 기도하며 말씀에 착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사단의 궤계에 걸려들지 알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궤를 가드 출신인 블레셋 사람인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가게 했습니다. 이방인인 오벧에돔은 웃사의 죽음과 다윗 왕의 두려움을 알았을 텐데도 기꺼이 하나님의 궤를 모셨습니다. 오벧에돔은 웃사의 죽음과 다윗 왕의 두려움이 하나님의 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만복의 근원임을 알았습니다. 모국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번번이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궤 때문임을 잘 알았습니다. 실로, 에벧오돔은 하나님의 복과 권능을 아는 지혜와 믿음의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걸려 넘어진 돌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같은 돌을 자기의 복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3. 맺음말

자기 뜻을 내세워 행했던 웃사와 다윗 왕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제의 믿음이 좋았다고 오늘의 믿음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어제 말씀이 담긴 하나님의 궤를 잘 모셨다고 오늘도 하나님의 궤를 잘 모신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이방인인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궤를 인하여 그와 그 온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다가 일어난 비극에 대해 하나님을 문제 삼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 늘 깨어 근신하고,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의 온 집안에 하나님의 복이 날로 더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할 것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6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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