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영적인 지혜이자 하늘로부터 임하는 징표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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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25 00:53:51
이상은 말 그대로 이상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이상을 원하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길 바라고 현실에서 얻고 이루기를 원한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목사들도 현실을 원한다. 현실에서 얻고자 한다. 그러기에 천국을 말하지만 정작 천국을 믿는 지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정말 천국을 원하는 가도 궁금해진다. 어쩌면 천국을 포기했으며 천국을 믿고 있지 않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왜 목사들과 현 교회들이 개독교 소리를 듣는가?
성경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아니다. 성경 때문도 예수님 때문도 아니다. 교회들이 빛을 잃고 맛을 잃었으며 목사들의 타락 때문에 개독교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까? 목사는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목사다움을 보여야 할까? 그것이 바로 이상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목사들에게서 이상이 사라졌다. 오히려 그 이상을 무시하고 조롱하기조차 한다.
그래서 목사다움을 잃고 교회다움을 잃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현실과 다르지만 현실은 아니지만 우리 마음이 그리는 이상향 즉 천국인 것이다.

천국을 믿는가? 대부분의 목사들과 성도들은 믿는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향을 말하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철부지처럼 여긴다. 이상의 성경적인 표현은 천국이다. 천국의 이성적이지만 비현실적인 표현이 바로 이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힘이 되기도 하고 능력이 되기도 하며 권세가 되기도 한다.

이상이 있는가?
그 이상이 대형 교회를 이루는 것인가? 그 이상이 많은 성도들을 전도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난 또 다시 묻고 싶다. 대형 교회를 이뤄서 무엇을 할 것인가? 많은 성도들을 전도하여 모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말이다. 결국 자신의 왕국을 만들려 하고 자신이 만든 왕국의 백성(종) 삼으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목사의 이상이 대형교회나 전도가 되서는 안된다. 교회의 크고 작음이나 교인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언제나 목사의 이상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향해야 하며 진정한 참 자유로운 영적인 삶의 행복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성도들의 이상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성경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은 믿음의 선조들이 본 이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한다면 하나님을 통해 본 이상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성경의 말씀을 들으면 이상히 여긴다. 그러나 오늘날 목사들은 듣고 본 이상을 말하면 대부분의 목사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언젠가 나는 어느 목사님과 대화하기를 '감리교회는 교리와 장정에 의해 치리되어야 한다.'고 말을 했었다.
그랬더니 그것은 너무도 이상적인 말이며 지금 우리 감리교회의 현실 속에선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했다. 그래서 난 또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들(규칙)을 교리와 장정으로 삼은 것입니까? 만약 진정 그것이 사실이라면 교리와 장정을 바꿔야지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내용으로 바꿔야지요."라 했더니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 했다.

나는 언젠가 선배님이자 어른이신 목사님에게 내가 본 이상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미쳤다 하였다. 그것은 꿈이라 했다. 그래 맞다 이상은 꿈이다. 그러나 꿈이라고 해서 미친 것이 아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고 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꿈을 먹고 살기를 원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 꿈은 세상의 헛된 욕망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참된 꿈이자 성령을 통해 들(본)은 이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꿈은 환상이 되어야 하며 이 꿈과 같은 이상이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현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령)의 증언이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함께 머물던 하란을 떠나야만 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하나님을 통해 이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이다. 그 이상은 하란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가나안보다 메소포타미야 문명이 번창하고 있던 하란이야 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것이다. 그러나 하란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 후손들이 떠나야만 했던 애굽과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본(들었던) 이상을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말을 했을 것이다. 그 때마다 모든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 이상을 버리라 했을 것이며 쓸데없는 망상이라고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카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의 말을 좋게 여겼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성경에 나와 있지 아니함으로 그 이유는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들(보)었던 이상을 듣게 된다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야만 했던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며 조카 롯의 마음도 헤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통이다. 아브라함과의 영적인 교통인 것이다.
이 교통은 아브라함과 같은 이상을 체험하지 않고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영적인 지식이자 지혜가 된다.
교통은 간접적인 체험 그 이상이다. 분명 현실적인 체험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상적인 인간의 상상력 이상의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이 상상력 이상의 그 무엇을 바로 성령의 감동과 감화라 하는 것이다.

야곱은 욕망을 갖고 태어났다.

그 욕망은 형 에서보다 형 나은 존재가 되고픈 것이었다. 야곱은 언제나 에서와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 형 에서와 견주어 더 낫다고 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형보다 엄마인 리브가와 함께 하길 좋아 했음으로 음식을 잘 만들 수 있었다. 야곱은 자신의 욕망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음식을 통해 형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사는덴 성공을 했으나 그렇다고 야곱이 곧바로 에서의 형이 되거나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형과 동생이란 것은 단순한 출생의 시간 차이가 아니며 단순한 에서와 야곱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이 현실을 받아 들여야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야곱은 자신의 욕망을 이상으로 삼았다. 왜 그랬을까? 정말 야곱의 욕망이자 탐욕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곱에겐 그 욕망과 탐욕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이 이상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인 것이다. 태중에 있을 때 어머니인 리부가가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야곱에게 이상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야곱은 욕망이 이상이 되고 이상이 욕망이 된 독특한 경력의 사람이다. 그래서 야곱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자신의 그 헛된 욕망과 같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야곱이 품었던 이상 때문에 많은 오해도 있었고 많은 시련과 고통과 어려움이 따랐다. 차라리 그 이상을 포기했더라면 야곱은 부모님의 품 안에서 가족들과 함께 평안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야곱은 허망한 욕망과 같은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욕망과 같은 이상이 현실이 되는 은혜를 경험한 믿음의 조상이다.

야곱이 이렇게 자신의 욕망과도 같았던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이것은 야곱에게 있던 욕망 그 이상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은 야곱의 욕망속에서 이상을 보게 하신 것이다. 이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인 것이다. 이러한 야곱의 이상을 이해하게 되고 야곱과 같은 꿈과 이상을 품게 된다면 야곱의 믿음과 심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로마서를 통해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9:13)고 하였다. 이떻게 사도 바울은 야곱과 에서에 대하여 이러한 확신에 찬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사도 바울은 성령을 통하여 야곱과 교통을 하였으며 야곱의 이상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교통이다.
믿음의 공유이며 공명인 것이다.

요셉은 말그대로 꿈을 통하여 이상을 본 믿음의 선조이다.
꿈은 형제들과 부모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차라리 꿈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요셉은 노예로 애굽에 팔려 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셉은 꿈을 통해 본 이상을 말하였고 어려움과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요셉이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요셉이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다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억울함과 고난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신의 꿈을 포기(이상)하지 않았다. 이것을 요셉의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애굽의 왕 바로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됨이라 하였다. 요셉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이해가 되는가? 아니 어떤 믿음인지 공명이 되는가?

울림은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영(성령)에 감동됨으로써 요셉은 자신이 꾼(본) 꿈(이상)이 헛된 망상이 아님을 알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요셉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으로 그 이상(꿈)을 이루었다.

모세는 태어나서 얼마되지 못해 부모로 부터 버림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모세는 환상(이상)을 본 믿음의 선조가 되었다. 그 이상(환상)이 바로 출애굽이다. 호렙산의 떨기나무의 불(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다. 그리고 이상(출애굽)을 품게 된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 외친 출애굽의 하나님의 말씀은 밑도 끝도 없는 막무가내식이었다. 그래서 무시를 당했으며 그래서 조롱과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갈렙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후예들은 모세의 출애굽에 대한 막무가내식 선포가 울림이 되었다. 모세의 음성은 단순한 사람의 소리 그 이상이 되어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울림이 되었고 그들에게도 소망(이상)이 된 것이다.

이상은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소망이자 희망이다. 그리고 바램인 것이다.
믿음은 단순한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성이 바랄 수 없는 이성적인 꿈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상이라 부르는 것이다.

성경을 보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행2:17~19)

징조.... 피와 불과 연기.....

이것은 또 다른 이상이다.
이것은 또 다른 성도의 꿈이며 환상이다.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의 울림(감동)인 것이다.

히브리서엔 많은 믿음의 선조들에 대하여 열거를 한다. 그들의 믿음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약술하였다. 과연 히브리서 기자의 판단을 옳다 할 수 있을까? 어떤 근거로 어떤 자료를 바탕으로 말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신학자나 교수가 아니다. 그러므로 근거나 자료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선포를 하기 위해선 믿을 만한 근거나 그에 대한 전 이해가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에게 임한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영적인 공명현상이며 공유이자 하나 됨인 것이다. 성령은 이러한 영적 교통(공명, 공유, 하나됨)을 통해 또 다른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지식을 지혜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체험이 되며 그래서 영적인 씨름이 되기도 하고 영적인 싸움이 되기도 하며 영적인 깨달음이 되기도 하며 거듭남의 영적인 새로움이 되는 것(피조물)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5:17)

이러한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불의 세례라 하기도 하고 성령의 세례라 부르기도 한다.

징조... 피와 불과 연기.... 그리고 불과 성령의 세례.....
이상은 영적인 지혜이자 하늘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징표(표적)가 된다.

주님이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며 이 노래를 들어 보려한다."God Is 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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